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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18화 (218/373)

학사재생 218화

제 218화

“어째서 이런 곳으로 오자고 하신 겁니까.”

첫 대화는 무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불만으로 시작되었다.

“추억을 쫓아온 길이지. 내 대신 사과할 터이니 너무 염두에 두지 말게나.”

“어찌…….”

풍혁기의 말에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튼 무호가 한숨을 내쉰다.

“그나저나 술 향이 정말 좋군.”

“그래도 금화 백 문은 과합니다.”

“어차피 내가 사는 것 아닌가. 공수래공수거라,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갈 길인데 늙은이가 이런 사치 한 번쯤은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부탁했던 일은 어찌 되고 있나?”

“……대영반께서 말씀하셨기에 전력을 다해 조사 중이긴 합니다만, 정황상 태자 전하가 흉수일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정황상이라…….”

풍혁기가 눈을 감으며 길게 자란 수염을 쓸어내린다.

“대영반, 이쯤에서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태자 전하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굳이 나서서 뜨는 해를 가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무호의 음성은 조심스러웠다.

“그 뜨는 해가 대 명의 백성들을 불태워 죽일 수도 있지 않나.”

“대영반!”

다소 위험한 발언에 무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내가 역모라도 짠다고 생각한 겐가?”

“대영반 말씀을…….”

“무호, 우리가 무엇인가?”

“금의위가 무엇이냐는 말일세.”

“그야 황제 폐하와 황궁을 지키고 나아가 대 명의 신민들을 위한 검이지요.”

“또한?”

“누군가를 벨 수 있는 검이기에 더욱 명예를 알고 거짓이 없어야 하며 성실하고, 정의로운 인애를 알아야 하지요.”

“훌륭한 답이로군.”

흡족한 웃음을 보인 풍혁기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면 태자 전하가 뜨는 해라 한들 현재 우리의 황제인가? 언젠가 그리되실 수도 있지. 하나 아직은 아니지.”

“그래도…… 적법한 후계자이십니다.”

“적법한 후계자라 하여도 그른 방법을 택했다면 잘못된 일일세. 자네는 명예로운 금의위일세. 아닌가?”

“맞습니다.”

“명예로운 금의위로서, 명예롭지 못한 황제를 진심을 다하여 보필하고 지킬 수 있겠나?”

“그는…….”

“잊지 말게, 무호. 충심이란 언제나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일세.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어서는 안 돼. 앞으로 우리가 평생 모셔야 할, 보필해야 할 분이기에 더욱 확실해야 하는 거란 말이야. 어찌 의심 담긴 충심으로 천자(天子)의 곁에 서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야말로 오히려 불충이고, 명예를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긴말을 내뱉은 풍혁기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함께 잔을 들어 술을 비운 무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연다.

“대영반의 충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나 그로 인한 오해가 너무 짙어지고 있습니다. 태자 전하를 비롯한 몇몇 분들은 대영반께서 황녀 전하의 편에 섰다고 알고만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대영반뿐만이 아니라 가족분들께, 또 더 나아가 우리 금의위에게도 큰 위기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음…….”

신음을 흘린 풍혁기가 술잔을 채우고, 또다시 술을 비운다.

그러기를 몇 번, 무거운 침묵 속에 술잔만을 비우던 풍혁기가 짙은 탄식을 흘렸다.

“하아…… 무호. 아마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네가 날 대신하겠지.”

“총애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책임 없는 내가, 자네에게 무책임하게 너무 큰 짐을 쥐여주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네.”

“대영반…….”

“날 믿어주게. 무호. 이번 일에는 분명 문제가 있네. 황궁을 떠났다가 돌아오신 이후로, 태자 전하께 변화가 생겼네. 결코 상서로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

“내 못된 생각이, 나쁜 예감이 맞는다면…… 설령 이 목숨을 잃더라도 황녀 전하의 곁에 설 각오가 있네.”

“대영반.”

“무호.”

술병을 들어 올린 후, 무호를 직시한 풍혁기의 눈에서 힘이 토해져 나온다.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무호가,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술을 모두 마신 풍혁기와 무호가 떠났다.

마지막 순간, 다시 한 번 풍혁기와 황준우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다.

이후 짧은 시간 창밖을 바라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풍제가 연하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는 상황이네.’

다소 쇠약해졌다지만 황궁제일고수라는 명함은 많은 황궁무인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다. 이름난 군부의 인물들도 풍혁기를 따르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금의위 대영반이라는 직책 또한 가볍지 않다. 황궁 내에서라면 동창과 함께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무력집단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당장은 별일이 없겠네.’

걱정만 가득하던 머릿속에 조금은 안도감이 어렸다.

물론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당장으로서는 그도 힘들어 보였으니 말이다.

“망할 놈들이 갔구먼.”

생각이 정리될 때쯤, 자다 일어난 건지 노파가 한쪽 눈에 낀 눈곱을 털어내며 주방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후 식탁 위, 묵직하게 놓인 금화 주머니를 들어 올리고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가는 길이라고 두둑이도 놓고 떠났구먼. 제 복을 사간 거니 아쉬울 건 없을 게야. 흘흘.”

“풍제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깜짝이야! 네놈은 아직도 안 간 게냐?”

기척을 죽이고 있던 황준우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노파가 왼쪽 가슴 한편을 부여잡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미럴 놈! 기척이라도 내고 있던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 않느냐!”

“생각 좀 하고 있어서 말이야.”

“지미럴 놈. 길 가다 자빠질 놈. 아주 그냥 똥통에 빠져버릴 놈.”

온갖 욕이란 욕을 다 내뱉는 노파가 지친 표정으로 남은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손놀림이 빠르지는 않았다. 느긋이, 마치 흔적을 기억하듯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풍제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니까?”

“그걸 왜 물어!”

“궁금하니까 그렇지.”

“네놈은 나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

“객점 손님과 주인으로 만났잖아.”

“지미럴.”

노파의 욕은 대답인 듯했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릿속이 갑작스럽게 빙글빙글 회전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객점 손님과 주인? 궁금해서 그러는데 할머니 나이가…….”

질문을 하는 사이로, 빗물 젖은 낡은 문이 다시 한 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빗소리가 유난히도 귀를 강하게 때리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새로이 문을 연 인물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손님이 유달리도 많군. 쯧.”

혀를 찬 노파가 먼저 반응하며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멍하니, 들어선 인물을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 노파의 목소리가 청천벽력처럼 떨어졌다.

“뭐하냐, 기다리던 년 왔는데 반기지 않고!”

“아…….”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그 짧은 신음에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황준우를 바라본다.

여전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먼저 움직인 측은 황준우였다.

표정 하나 알아보기 힘든 면사 뒤에 얼굴을 숨긴 채,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의 앞에 선다.

“아…….”

이번에 신음을 흘린 것은 여인 측이었다.

“반갑네.”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넨다.

“아…… 그래. 오랜만…….”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또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쏴아아-!

들리는 것은 쏟아지는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뿐이다.

조용히 들어 올린 오른손으로 짙은 어둠과 같은 면사를 거두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황준우의 입가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고생 좀 하고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

“여전히 예쁘네. 주연하.”

다소 민망한, 그리고 나직한 말에 주연하의 속눈썹 끝 가닥이 잘게 떨린다.

시선을 내렸다, 올렸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당황하는 것 같던 그녀는 곧 황준우와 닮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조금 건방진 듯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인사말이로구나.”

“큭큭.”

“후후.”

두 사람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쏴아아-!

“문이나 닫고 지랄들을 해라. 이 재수 없는 어린 것들아!”

틈새를 파고든 것은 여전히 거센 빗줄기 소리와, 노파의 커다란 음성뿐이었다.

“그나저나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군.”

깊게 눌러쓴 죽립을 들어 올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 풍혁기의 말에 곁에 선 무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이 시기에 비가 많이 오면 농작물들도 잘 자라겠지요.”

“자네가 그런 일도 신경을 썼나?”

“부모님이 농부셨습니다.”

“아…… 하긴 그랬다고 했지. 기억나는군. 자네가 제일 처음 금의위에 들어 왔을 때 말이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어.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농사나 짓다 가는 삶은 싫다고 말이야. 제법 호기로운 목소리였지. 후후.”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엇비쳤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내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자네가 농작물까지 신경을 쓸 정도라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우리 모두가 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세. 사내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누구라 한들, 하는 일에 귀천(貴賤)을 둘 수는 없는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게야.”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를 느긋이 지나치며,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선 풍혁기의 시선이 골목길 사이에 지어진 건물들의 지붕으로 향한다.

“음,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지만 암검(暗劍)을 든 밤손님까지 반길 도량은 없어서 말일세.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

풍혁기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지붕 위로부터 검은 복면을 쓴 암살자들이 빗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건물 사이사이의 어두운 길, 심지어 발밑에서까지 검이 솟아났다. 마치 미리 이 자리에 함정을 준비해두고 있던 것 같은 움직임이다.

한눈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암검이었지만 풍혁기의 몸에 닿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가벼운 손짓은 거친 강풍이 되어 하늘에서 떨어지던 암살자들을 밀어냈으며, 몸을 떨치는 순간에는 사방으로 기운이 퍼져나가며 검을 부러트린다.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 골목길에 자리 잡은 건물 중 무엇에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암살자들은 말없이, 독기에 가득 찬 시선으로 새 검을 뽑아 들거나, 다시금 자세를 잡으며 풍혁기를 노려본다.

“내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여도 이런 허접한 장난에 당하겠나. 무엇보다, 장소를 너무 잘못 정했네. 비가 오는 날이라고 바람이 힘을 잃던가? 아니지. 비는 언제나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법일세. 하물며 지금같이 많은 비가 쏟아지는 날임에야…….”

몸이 살짝 허공으로 떠오른 풍혁기의 주변으로 강기로 이루어진 투명한 바람의 칼날이 가득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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