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19화
제 219화
“……피해!”
복면인들 사이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늦었네.”
나지막한 풍혁기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 선두에 서 있던 복면인들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핏물이 솟구쳤다.
하나 복면인들의 반응 역시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최소 열은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예리한 강기와 더불어, 주변의 대기에 바람의 무게를 실었다. 직접적인 물리력은 크게 없지만 찰나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무게는 복면인들의 발목을 제법 잘 움켜잡고 있을 터였다.
한데도 고작 다섯.
아무리 골목길이라 하여 조심스럽게 강기를 운용했다 한들 기대 이하의 성과였다.
‘해가 갈수록 느려지는군.’
풍혁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흘렀다.
“흠…….”
기습을 가한 후, 한 걸음 물러난 암살자들 중 하나가 고민하는 눈빛으로 손을 들었다.
“기척이 더 남아 있다 하였더니…….”
지붕 위,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복면인들이 풍혁기를 향해 화살을 겨눈다.
검이나 도, 짧은 거리에서 휘두르는 장병기로는 위험이 크다고 느낀 탓일 터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자객이나 무림인이 써먹을 방식은 아니군.’
명백히 황궁에서 나온 이들이다.
어쩌면 군부의 누군가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황태자와 황녀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었으니 언제라도 찾아올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조용했던 쪽이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이나 그의 이름이 황궁에서 가지는 무게감이 컸던 탓도 있을 터고 말이다.
‘달리 말해 이제는 조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이겠지.’
조소를 머금은 그의 시야에 머리 위를 뒤덮는 화살 비가 보였다. 빗방울 사이에 섞여 날아오고 있음에도 힘이 강인하게도 어려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궁병들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나오는군.”
그것도 북경 한복판의 골목길이다.
자객 혹은 살수도 아니고 군대라니, 대체 일을 어디까지 벌일 생각이란 말인가?
불쾌감으로 눈가 끝을 떤 풍혁기의 양손이 또 한 번 크게 떨쳐졌다. 날아오는 화살들은 역행하여 제 주인의 심장으로 되돌아간다.
퍼버벅-!
그 놀라운 신기(神技)에 복면인들 사이로 짧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뭣들 하고 있느냐! 기회다!”
하나 두령으로 보이는 이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릴 뿐이다.
화살 공격 이후 생긴 짧은 틈새에 또다시 검과 도, 창이 몰아친다.
그를 물러내면 또 한 번 화살이 날아온다.
조금 거칠게 힘을 쓰려고 하면 암살자들은 재빨리 건물 뒤 혹은 골목길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자연스럽게 풍혁기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곤란하군.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명백하게 따져 복면인들은 풍혁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고 귀찮게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그조차 쫓아가 하나, 하나 잡아낼 수도 있을 듯하지만,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하다. 나이가 드니 내력만큼이나 걱정인 부분이 바로 체력이었다.
“무호.”
결국 조금 거리를 벌린 채 물러나 있던 무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풍신공은 강호절학 중 몇 없는 자연지기를 다루는 거친 무공이다. 주변의 아군이 다칠 수도 있으니 풍혁기가 전투에 들어갈 때는 모든 금의위는 거리를 벌리고 물러난다. 괜히 싸움에 끼어들어서는 방해만 될 수도 있는 탓이다.
하나 이제는 달라졌다.
오랜만의 실전은, 그가 늙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체감하게 했다.
“나설까요?”
“부탁하지.”
무호의 나지막한 말에, 고개를 주억인 풍혁기가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던 풍신공의 기운을 조금은 옅게 흩었다. 무호 정도의 고수라면 이 정도만 되어도 제 실력을 모두 뽐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붕 위의 궁수들을 맡겠네, 무호 자네에겐 지상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로 답하는 무호를 곁눈질로 바라본 풍혁기가 웃음을 보였다.
“금의위에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풍혁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전면으로 세워진 날카로운 바람의 강기는 경계하고 있는 지붕 위 궁수들을 동시에 겨누었다. 마음 같아서는 순식간에 그들 모두를 처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본인이 기억하던 과거의 풍제는 더 이상 없다.
‘이번 일만 정리되면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야겠어. 무호라면 금의위도 잘 이끌겠지.’
조금은 지친다는 생각을 한 풍혁기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어린 순간이었다.
왼쪽 날개 뼈 뒤, 심장 어림에 서늘한 감각이 맞닿았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불에 타오르는 것 같은 화끈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피륙이 꿰뚫리는 소리가 혈관을 타고 뇌리까지 섬뜩하게 전해진다. 입가로 핏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검은 눈동자는 무거웠다. 또한 떨림이 없었다.
“무…… 호…….”
더 긴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음성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쿨럭-!”
의문 대신 쏟아지는 것은 핏물이다.
무호는 그런 풍혁기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검을 뽑아 든다.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섬뜩하고, 예리한 감각과 함께 풍혁기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짧게 경련하는 그의 마지막을 곁눈질로 흘린 무호는 검에 흐르는 핏물을 떨치며 말했다.
“가자.”
흐릿해지는 풍혁기의 시야 속, 고개 숙이는 복면인들의 사이를 지나치는 무호가 있었다.
황준우와 주연하, 두 사람이 한 식탁을 마주 보며 앉았다.
말은 없었다.
첫인사와 함께 웃음이 터진 이후로도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킨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다.
하나 주변이 조용한 것만도 아니었다.
“지미럴, 어린놈들이 뭐가 그리 애달플 것도 많다고 서로의 얼굴만 뜯어보는 게냐. 조만간 아주 서로 잡아 잡수시려 하겠구나.”
조금 거리를 벌리고 앉은 노파의 입에서 연신 욕과 함께 거친 말이 쏟아지고 있는 탓이었다.
벌써 이 각째.
두 사람은 빗소리와 욕설,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만 있을 뿐이다.
“하여간에 젊은것들이라 지치지도 않는구먼. 확 두 놈 다 잡아다가……!”
지치지도 않는지 또 한 번 욕설을 내뱉으려던 노파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창가 밖을 향했다.
쏴아아-!
빗줄기가 쏟아지는 풍경은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빌어먹을, 기분 잡치는군.”
인상을 와락 찡그린 노파는 성큼성큼 걸어 술과 잔 두 개를 꺼내왔다.
그리고 식탁 위에 마주하여 잔을 올리고는, 말없이 양측 잔을 채운다.
이후 제 잔을 비운다.
맞은편 자리, 제일 처음 따라주었던 첫 잔을 비우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노파는 계속, 쉬지도 않고 눈앞에 놓인 잔에 찬 술을 연거푸 마셨다.
“두 연놈 다 정신 사납다. 눈빛만 주고받든, 할 말을 나누든 이 층으로 올라가서 해.”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노파의 일갈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음성은 잠이 든 듯 멈추어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돌려놓았다.
“할머니? 술 마셔요?”
주연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왜, 늙은이는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아니, 그건 아닌데…… 할머니 술 마시는 것 처음 봐서요.”
“지미랄. 답답하면 마시는 거지.”
“그러네요. 답답하면 마시는 거죠.”
자조 섞인 웃음을 보인 주연하가 노파에게 다가가 맞은편 술잔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안 돼. 임자 있는 술이다.”
“아……?”
“그리고, 마시고 싶으면 사 먹어.”
“그럼 사 먹지 뭐.”
황준우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술, 맛있는 안주로 부탁할게.”
“금화 몇 문으로 생색내려는 거냐?”
“그렇게 봐도 괜찮고. 손주 같은 놈 재롱이라고 생각하면 좋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노파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미묘하게 입술 끝이 씰룩인다.
“재수 없는 놈. 둘 다 이 층 가서 기다려. 알아서 내줄 테니까.”
“기대할게.”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먼저 이 층을 향했다.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화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바라보던 주연하가 그 뒤를 재빨리 쫓았다.
“할머니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게냐?”
“너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다 보니 말이지.”
“아…….”
또 한 번 짧은 신음을 흘린 주연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사정이란 것이…….”
말을 끝맺지 못한 주연하가 머뭇거리자 계단을 오르던 황준우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웃는 얼굴로 가벼운 음성을 흘렸다.
“올라가서 이야기해. 아, 힘들면 굳이 말 안 해도 괜찮고, 알지? 얼굴이라도 봐서 좋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고맙구나.”
“별걸 다.”
계단을 올라, 텅 빈 객점 이 층 한편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또다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황준우는 아무런 재촉을 하지 않았다. 주연하는 그런 황준우를 묵묵히 마주하면서, 떨리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궁금하지 않은 게냐?”
“궁금해.”
“물어도 괜찮다.”
“좋은 생각이네. 어딜 물어줄까? 볼? 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린 황준우가 이를 딱딱, 부딪친다.
“후훗, 네 그 수준 낮은 말장난도 여전하구나.”
“의외겠지만 잘 안 해.”
“거짓말 치지 말거라.”
“진짠데.”
“믿을 수 없다.”
“그것참 아쉽네.”
“흐음…….”
황준우와의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편안하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모든 생각을 접고서는 그저 마음을 놓아 버린다. 마치 그녀를 기른 아버지, 영왕의 앞에 섰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감정은 안락함 또는 편안함과는 오히려 거리가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마음이로구나.’
본래 사람 마음 중에서도, 제 마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린 주연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사실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 이 자리에 나오기 위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거늘, 허락된 시간은 너무나도 짧기만 하구나.”
“오늘만 보고 말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물론 그렇기야 하다만…….”
그 미래조차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재 그녀의 상태는 꽤나 위태로웠다.
어쩌면 이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때문에 주연하는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궁을 나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친구조차 볼 수 없는 인생을 살다 갔노라는 감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후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될까.”
“신경 쓰지 말고 둘이 이야기해. 번거롭게 하지 말고.”
고민하는 주연하와 황준우 사이로 노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지나간다. 식탁 위로는 제법 그럴싸하게 구워진 오리 요리와 함께 하얀 술병이 올라왔다. 이후 노파는 두 사람을 잠시 번갈아 바라본 후, 말없이 다시 일 층을 향했다.
“잔을 채워 줄 수 있겠느냐?”
“물론. 아 근데 난 술은 못해.”
“약속했거든.”
황준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주연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나는 너의 그런 면도 참으로 좋다. 다소 아쉽지만,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사내와 친구인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고마워, 이해해 줘서.”
술잔에 술이 따라진다.
주연하는 그를 단숨에 비우고, 연거푸 두 번째 잔까지 마셨다.
다소 상기된 주연하의 얼굴과 눈빛에서는 더 이상 망설임이 비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