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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20화 (220/373)

학사재생 220화

제 220화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놀라지 않는구나.”

“알고 있었으니까.”

“정녕 황제 폐하의 승하 소식이 바깥까지 알려졌다는 말이냐?”

주연하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되물었다.

“많은 사람이 아는 건 아니고. 뭐, 나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나 알려나?”

“무림에서 무명(武名)을 제법 날린다고는 들었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이상하다.

아무리 주연하가 바깥 일에 관심이 없다고 하여도, 지금 황준우의 이름은 강호무림에서 가장 유명하다. 남천맹 또한 마찬가지다. 한데 주연하는 그 모든 것을 모르는 듯했다.

“잠깐, 연하 너. 바깥소식을 전혀 접하지 못하는 거야?”

주연하가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천맹은 알아?”

“이름은 안다. 다만…… 무림의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그마치 근래 들어 가장 화두가 되는 이야기가 남천맹 그리고 황준우다.

“너…… 완전히 고립되었구나.”

황준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맞는 것 같은데?”

주연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황궁의 일 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뿐이다. 달리 말해…… 이 정도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뜻은 맞구나.”

“음…….”

황준우는 볼을 긁적였다.

“남천맹과 네 이름 역시 아버, 아니…… 영왕 전하께서 전해주시는 소식을 통해 들었다. 굉장히,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내고 있다더구나.”

“거참,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다니. 그 짓도 못 해먹을 일이긴 하구먼.”

주연하가 입가로 묘한 웃음을 흘린다.

“어쨌거나, 그래서 지금 너랑 그 황태자랑 한참 권력 쟁투 중이란 거지?”

“맞는 말이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주연하가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너와 만나는 것도 고심이 깊었다. 만약에라도 이로 인해 너와 만금장에까지 피해를 끼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군.”

“소호를 돕는 의문의 단체가 크게 도와주었다. 덕분이 아니었으면 이곳까지 올 수조차 없었겠지.”

“사마정이 일을 열심히 했네.”

“아아, 별것 아냐.”

혼잣말을 한 후, 주연하를 보고는 싱긋 미소를 흘린 황준우가 팔짱을 꼈다.

“자, 그러면 정리해서 쉽게 말해보자. 너 지금 굉장히 힘들지?”

“괜찮다.”

잠시 흔들렸던 주연하의 동공이 곧게 자리를 잡았다.

말아쥔 두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보인다.

“질문에만 답해. 힘들지?”

“난 괜찮다.”

“주연하.”

“힘들어도, 괜찮다.”

“연하야.”

나지막한 말을 내뱉는 황준우의 무거운 시선을, 몇 번이고 정면으로 부딪치던 주연하의 시선이 식탁 아래로 떨어진다.

두 주먹을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내 삶이다. 또한 내 몫이다. 누군가에게 이 짐을 떠넘길 수는 없는 게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주연하의 시선이 다시 황준우를 향했다.

“그래, 친구.”

선해 보이는 눈웃음이 주연하의 마음 한복판을 파고든다. 문득 첫 만남이 떠올랐다. 다소 우연에 의한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다. 그 어린 시절 주연하에게 있어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없었다.

영왕, 주윤호가 처음으로 친우라고 밝힌 소주의 대인 만금장주 자제의 생일 연회.

왕궁에서나 볼법한 큰 생일상이었다.

또한 소주대인을 향한 경외와 존경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었다.

하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저보다 어린 주제에 건방진 소년과의 만남이었다.

다소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궁궐에서 했었다면 옆에 있던 누군가 호통쳤을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나가는 그 상황이 너무나 즐거웠다. 어쩌면, 그 만남이 주연하에게 있어 일종의 일탈이었을지도 몰랐다.

왕족이 아닌, 또한 고위 관리가 아닌 자리에서 친구를 만난다.

그것도 관리들 사이에서는 다소 천대받을 일도 많은 상인 집안이다.

하나 주연하에게는 그러한 거부감이 없었다.

보고 자란 영왕이 이미 만금장주와 친우인데, 딱히 나쁜 인식이랄 것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다소 나쁘게 보여도 상관없었다.

말했듯 그 만남은 주연하에게 있어 일종의 일탈이었고 자유였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든 것이다.

때문일까?

친구, 황준우란 존재는 주연하에게 있어 꽤나 각별했다.

가끔은 길을 걷다가도 황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걸으면 더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같이 먹는다면 두 배는 더 맛있을 듯했다.

무공을 수련할 때도, 홀로 술을 마실 때도 그 얼굴이 떠올랐다. 가끔은 다소 낯선 그 감정에 혼자 얼굴을 붉힌 기억도 많았다.

비록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황준우라는 이름은 언제나 주연하의 머리에,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라…… 과연, 그런 것이겠지.”

“영 힘들 때면 도와준다고 했잖아. 나, 다시 말해 제법 능력 있는 사람이다.”

“알고 있다. 적어도 네 무공만큼은…….”

처음 접했을 때부터 충격적인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가 무명을 날린다고 하였을 때에도 많이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도록 조용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할 일이었다.

“하나 이 일은 황궁의 일이다.”

“모르지 않아.”

주연하의 두 눈 역시 호선을 그렸다.

“힘드냐고 묻는다면 그러노라 답하겠다. 지치냐고 한다면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구나. 해서 너를 보러 왔다. 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들떴다. 지친 마음이 조금은 치유되는 기분이더구나. 그리고 이렇게 마주한 지금은…….”

말을 하던 주연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선은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는 듯 빙글빙글 돈다.

하나 결국에는, 언제나 그렇듯 방황을 멈추고 정면을 직시한다.

시선을 마주한다.

“해, 행복하다.”

“음…….”

예상치 못했던 말에 황준우의 얼굴 역시 붉게 변했다.

“짜, 짧은 시간이라 하여도, 그런 행복이 있으면 나는 해나갈 수 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

“한 번 말한 적 있는 것 같지만, 난 언제나 네 옆에 서 있을 것이다. 서로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말이다.”

굳건한 의지가 담긴 시선을 보며 황준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유약해진 듯, 지쳐 보이기도 했지만 역시 변하지 않았다.

주연하는 주연하다.

강인하고, 때문에 아름답다.

주변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황준우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기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작은 행복이다.

“그건 조금 반칙인데.”

“황제가 되겠다면서 동등한 존재로 옆에 있겠다니.”

“황제는 무릇 만백성을 통치하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니 내가 무엇이 된다 한들 우리는 동등할 수 있을 것이다.”

“오, 제법 멋있는데.”

“제왕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덕목일 뿐이다.”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쨌든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그러면 이제 내 마음을 말해보자. 주연하. 난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다소 낮은 음성에 주연하의 몸이 살짝 떨렸다.

“기왕이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웃으면 더 좋겠네.”

“무슨 말을…….”

“당연한 말이지만 죽는 건 더 싫어. 그래서 말이지. 이번만큼은 내가 희생을 조금 하고 싶네.”

“말도 안 된다!”

다소 부끄러운 듯 몸을 꼬는 것도 같던 주연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도와줄게.”

“그럴 순 없다.”

“아, 물론 나한테 피해가 안 가는 수준에서 말이지.”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느냐!”

“왜 안 돼?”

“위험하다.”

“천하에서 나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어. 내가 무명을 조금 날린다고 들었지? 아냐. 많이 날려. 나, 무신이야.”

“천하제일 무신, 황준우.”

씩 웃은 황준우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그게 나야.”

“네 한목숨만 걸리는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달리 말해서,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야?”

“어찌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이렇게.”

황준우의 오른손이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스치고 지나간 순간이었다.

“……!?”

무인이라고 보기 힘든 새하얀 피부는 시커멓게 물들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눈매는 고집스럽게 변하였으며, 높은 코 역시 살짝 뒤틀렸다. 작다면 작은 변화들이었지만 본래 황준우가 가진 인상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어때?”

“역변공도 익힌 게냐?”

“그렇게 이해하는 게 쉬울 거야.”

황준우가 웃으며 말했다.

외모가 달라지니 그 느낌도 상당히 변했다.

이전까지는 잘생긴 외모가 뒷받침되어 다소 화려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투박하다. 또한 어딘가 거친 느낌도 들었다. 놀라운 점은 그런 모습도 제법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역변공이 아닌데 모습을 그렇게 변화시킨단 말이냐?”

“자세히 설명하기는 그렇고, 술법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원래 이런 데에는 잘 안 쓰는데, 상황이 상황이니까.”

“술법? 차라리 역변공이라 말하는 게 더 믿기 쉽겠구나.”

자칭 무신 황준우가 술법마저 능숙하게 사용한다.

주연하는 믿기 힘든 현실에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놀랍기는 하다만 만에 하나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역시 위험하다.”

“여기다가 수염 몇 개만 달아도 절대 못 알아볼걸.”

장담하고 말하는 황준우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던 주연하의 고개가 다시 내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준우가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어이, 친구. 그만 망설여. 이럴 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손을 확 잡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빚은 배로 갚고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라니…….”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말에 주연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잡아. 딱 한 번만 도와줄게.”

“약속을 하나만 해다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해.”

“해야만 한다.”

“일단 말해 봐.”

“아주 만약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태가 위험하다 싶으면 나를 버리더라도 달아나야 한다.”

“너…….”

“약속해다오.”

주연하의 목소리는 단단하기까지 했다.

약속하지 않으면 결코 손을 잡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졌다.

그런 주연하를, 다소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준우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꺄악-!”

갑작스럽게 몸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는 사태에 놀란 주연하가 비명을 내지른다.

“정말…… 고집만 부리기는.”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강제로 데리고 가려고. 내 손 잡은 것도 아니고, 등에 업혔으니 이제 못 뺀다.”

“황준우!”

“말했지만 이번 일 잘되면 빚이나 갚아.”

“너야말로 제멋대로 아니냐!”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아, 그래. 빚은 기왕이면 어여쁜 아가씨 한 명 소개시켜 주는 걸로 하자.”

“……뭐?”

“그냥 근래 들어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 사랑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도와줄 거지?”

“무슨…….”

어이가 없다는 듯 음성을 흘리던 주연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동자에는 다소 분노도 어렸다.

“절대, 절대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늦었다니까.”

“빚 따위는 만들지 않겠단 말이다!”

“늦었어. 주연하. 그럼, 우린 이만 갈게. 할머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꺄악-!”

일 층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 황준우의 신형이 곧장 사라졌다.

“빌어먹을 놈! 시끄럽게 굴 거면 다신 오지 마라!”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이 층으로 올라온 노파의 분노한 음성이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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