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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22화 (222/373)

학사재생 222화

제 222화

먹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아침 해가 밝았다.

전날 밤까지 지치지 않고 내리던 비는 궁성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 흔적만을 남긴 채 완전히 그쳤다.

영수궁의 아침은 평소에 비하자면 꽤나 시끄러웠다.

“마마,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다소 흥분한 듯한 영수궁의 상궁, 소호의 말에 잠에서 깨어나 궁녀들의 도움으로 궁장을 차려입던 주연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걱정할 일이라도 있느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어제 함께 온 사내 아니, 낭인 말입니다.”

“아아…… 그자에 대한 이야기냐.”

주연하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소호가 알기로는, 궁에 들어온 이후 몇 번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마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호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얼굴도 창백하게 떠올랐다.

“추문(醜聞)이 신경 쓰이는 것이냐?”

“어찌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걱정될 뿐입니다.”

소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린다.

아마 주변에 다른 궁녀들이 없었다면 발마저 동동 굴렀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기껏해야 낭인 한 명 아니느냐.”

“그 낭인과 외부에서 함께 오셨으니 문제인 겁니다.”

“흐음…….”

짧은 신음과 함께, 마지막 옷고름까지 동여맨 주연하가 소호를 직시했다.

“아무렴, 폐하를 암살했다는 소문보다는 낫지 않을까?”

“마, 마마!”

“식사를 가져오거라. 아침 먹을 때가 됐구나.”

소호의 표정에 다시 한 번 경악이 떠올랐다.

“아침, 아침을 드시겠다고요?”

궁에 들어온 이후로 주연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녀를 자주 찾아오는 암살 위험 중에는 독도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험 속에서 밥을 먹는다는 행위가 쉽지만은 않다.

때로는 부담감이 그녀의 속을 무겁게도 했다.

“그래. 혹시 모르니 직접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마마.”

“아, 그리고 네가 말한 낭인 사내도 이곳으로 불러다오.”

“그자는 왜?”

“함께 식사를 하며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마마?”

“부탁하마.”

주연하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망설이던 소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방문이 닫힌 순간, 다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황준우의 표정이 풀렸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오른다.

“날 불렀다며?”

“감히! 천한 낭인 놈이 누구 앞이라고 혀를 함부로 놀리느냐!”

황준우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주연하의 옆에 선 소호에게서 다급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쪽도 성격 하나 안 변했네.”

“네놈이 감히……!”

“그만, 소호.”

흥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소호를 말린 주연하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킨다.

“우선 자리에 앉거라. 식사부터 함께 하자꾸나.”

고개를 가볍게 주억인 황준우가 자리에 앉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의 소호가 그를 시선으로 찢어 죽일 듯 바라본다.

“덕분에 간밤에 잘 잤다.”

“별말씀을.”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 후, 소호를 바라본다.

“어차피 이 방 안에서 하는 말은 바깥까지 들리지 않아. 소호한테는 진실을 말해두는 게 좋지 않아?”

황준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란 소호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를 알아?”

“괜찮겠느냐?”

“애초에 안 괜찮으면 이 방에서도 먼저 나가라고 했겠지. 네가 믿는 사람이잖아? 나도 믿어보려고.”

황준우의 말에 잠시 눈을 떨던 주연하가 웃음을 그렸다.

“고맙구나.”

“두 분?”

소호의 검은자위가 하얀 동공 안에서 데구루루 굴렀다.

눈빛에는 곧 이채가 어렸다.

“설마…… 아니, 전혀 다른데.”

다시금 황준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의문과, 기대가 반쯤 섞여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끔 했으니까.”

“진짜 만금장 소장주라고요?”

“어허, 이제는 남천맹주라고 불러 주시지그래.”

“남천맹주? 당신이?”

소호 역시 근근하게나마 바깥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그중 최근 무림맹을 진동시키는 남천맹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다만 소식이 어두운 만큼 그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두 몰랐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달라진 것 같은데요?”

“다 방법이 있다니까.”

씩 웃은 황준우가 주연하에게 보여주었듯 얼굴을 변화시킨다. 오른 손바닥이 지나가고 기억하던,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성숙미가 풍기는 황준우의 얼굴을 본 순간 소호는 경악을 토했다.

“뭘 그렇게 놀라고그래. 역변공 처음 본 사람처럼.”

“여, 역변공이라고요?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순식간에…….”

“비슷한 거니까.”

본래의 목소리로 말하던 황준우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변화시킨다.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는지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던 소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사람이 무슨…….”

“원래 세상에는 생각하는 것보다 신기한 일이 많은 법이지.”

“자자, 소개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밥을 먹자꾸나.”

지켜보고 있던 주연하가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 황준우가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음식에는 독을 안 넣나?”

“당연히 넣는다. 그걸 매 끼니마다 고르는 게 소호의 몫이고 말이다.”

“오, 과연. 지금 여기 있는 음식은 안전하다 이거지?”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었단 말이지. 당가의 무형지독이라도 풀렸으면 소호가 어찌 잡아내겠느냐?”

“그건 그러네. 뭐, 나야 상관없다만…….”

만독불침.

모든 독으로부터 자유로운 황준우였다면 그런 상황조차도 웃음만이 나왔을 터다.

하나 주연하는 다르다.

원하는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삶이 어찌나 혹독했겠는가? 그 심정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음, 맛있네. 역시 궁궐 음식. 너도 어서 먹어.”

예의조차 따지지 않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는 황준우를 향해 미소를 보인 주연하가 함께 젓가락을 들었다. 그사이 정신이 돌아왔는지 소호가 거듭 소리를 쳤다.

“자, 잠깐. 당신이 남천맹주라면 무신? 무신 맞아요!?”

“뭐 그렇게도 불리지.”

“세상에, 맙소사. 그 꼬맹이가 무신이라니…….”

아직 어린 시절의 황준우를 기억하고 있는 소호가 이마를 또 한 번 짚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꽤나 오래 갈 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 참. 밤에 오는 녀석들 처리할 겸 해서 숨어 있는 쥐새끼도 몇 마리 잡아다 버렸다.”

“과연…… 내가 찾지 못한 이들도 있었단 말이냐.”

“제법 잘 숨었더라고. 그래 봐야 뭐, 이 무신님 앞에서는 의미 없지만. 흐흐.”

“여러모로 고맙구나.”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푹 주무신 것도 다 당신 아니 무신, 아니…… 어쨌든 남천맹주가 지켜준 덕이군요.”

“그냥 준우라고 불러. 아, 바깥에서는 서강이라고 부르고.”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강?”

주연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궁 내에서 사용할 가명이야. 괜찮지?”

“어감이 나쁘지는 않구나.”

“우리끼리 있을 땐 본래 이름으로 불러 주고. 난 그게 좋거든.”

“나, 난 그냥 서강이라 부를게요. 혹여 실수할까 봐 겁나네요.”

소호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저었다.

당장 이 자리에 황준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눈과 표정에 어린 기대감만은 감추지 못했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무신이라는 별호를 가진 전력은 결코 우습지 않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마마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야.’

그 뻔히 보이는 속내에 황준우는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상황 자체를 타파해 버릴 거니까 말이지. 너무 걱정 말라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가 연관되어 있으니까 말이지?”

주연하의 입가로 잠시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제법 노력을 하고 있지만 황태자 측이 동창을 쥐고 휘두르는 탓에 쉽지가 않다.”

“동창이라…… 환관들이 포함된 정보 집단이던가?”

“여러 가지 일을 맡는다면, 주로 그런 일에 능통한 것은 사실이다.”

“금의위는?”

객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황준우가 물었다.

“내게 유리하도록 돕고 있지만, 아직 대영반의 마음이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완전히 손을 잡는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흠…… 내가 한번 설득해볼까?”

황준우는 풍혁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큰 인연은 없지만 성정이 올곧은 인물이다.

몇 가지 근거만 제시한다면 확실히 황준우의 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용없을 게다. 우리 측 책사가 몇 가지 정황 증거를 들고 설득한 결과가 지금이니…… 명확한 증빙이 되기 전까지 더 이상 큰 움직임은 없을 게 분명하구나.”

“명확한 증거라…….”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할 일이 떠오른 기분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상황이 좋지 않다. 나는 지금 폐하의 흉수로 몰리기 직전이다. 최대한 버티고는 있지만 조금만 헛디디는 실수도 용서가 되지 않겠지.”

“들어서 알고 있어. 그래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지금 네 세력이 황자 측에 비하자면 불리하지만, 완전히 밀리지도 않고 있다는 거네.”

“아버지의 도움 덕이다. 외부에서 손을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이미 나는…….”

“아, 영왕 전하께서…….”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가 눈을 반짝였다.

“거기에 대영반까지 확실히 손을 들어주면 꽤나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겠군.”

“중립을 취하고 있는 이들 중 알게 모르게 대영반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많다. 또한 순수하게 금의위를 얻는 것이니 궁궐 내의 싸움에서도 굉장히 유리하겠지.”

“좋아, 그러면 아까 말한 대로 내가 대영반을 설득해볼게.”

“달리 방법이 있느냐?”

“그건 찾아봐야지. 근데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

“흠…….”

다소 애매한 말이다.

지금처럼 황궁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나 황준우라면 어째서인지 잘해낼 것 같은 기분이 먼저 들었다.

“믿겠다.”

“물론이지. 믿으라고.”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하며 웃음을 보인다.

“한데 두 분…….”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말을 하던 소호가 재빨리 입을 닫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말해 보거라.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닌 게냐?”

“아니, 아닙니다.”

“거참, 사람 궁금하게 하고 그러기야?”

“말 안 할 겁니다.”

“소호.”

“마마가 재촉하셔도 안 합니다.”

“야한 생각 했구나?”

“무슨 그런 망발을!?”

황준우의 농담에 소호가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아니면 말해봐. 뭔데.”

“격장지계 따위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흠, 반응이 어딘지 모르게 우리 경호랑 닮았는데…….”

닮았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흠칫 떤 소호가 눈매를 높게 세울 때였다.

“누가 널 찾는데?”

그 말과 함께 표정을 굳힌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바깥에서부터 낮으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냐? 자곡.”

“그것이…….”

조심스러운 음성에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들어와서 이야기하여라.”

드르륵-!

허락이 떨어진 순간 문이 열리고 닫힌다.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선 자곡은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주연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영반께서 귀천(歸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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