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24화
제 224화
“제갈휘라고 합니다.”
인사를 건네는 말투와 목소리는 나지막하다 못해 점잖다. 얼굴선이 가는 데다, 제법 고운 탓인지 가는 눈매가 길게 이어진 웃음 역시 보기 싫은 편은 아니었다. 병상 위에 누운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듭 말해 제법 예쁘다.
미리 남자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황준우 또한 여자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한데 그 모습이 황준우에게 있어 누군가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다. 언뜻 다른 듯도 하지만, 확실히 비슷한 면이 많다.
“후후, 이런 모습이라서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이불자락으로 입가를 감추는 모습도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친숙하다.
“음…… 확실히 닮았네.”
“아아, 아니. 아닙니다.”
상대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던진 황준우가 곧 손을 내저었다. 제갈휘가 닮은 상대가 머릿속에 아른거리다 보니 말투는 저도 모르게 공경스러워졌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 공자. 후후.”
무엇이 수줍은지, 어딘지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히는 제갈휘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아나요?”
“이야기를 조금 들었습니다.”
“이야기?”
황준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연하를 향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구나.”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일 때였다.
“아아, 마마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그보다 더 전에 이미 황 공자를 알고 있었는걸요. 아이고, 몸 한 번 제대로 일으키기도 쉽지가 않네요.”
정말 온 힘을 다하는지 고운 인상을 찌푸리면서까지 바닥을 짚고 일어난 제갈휘가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휘!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기에는……!”
“괜찮습니다. 까짓거 기력이 조금 모자랄 뿐인 걸요.”
“그게 문제인 게다.”
“정말 괜찮습니다. 후후.”
주연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제갈휘의 시선이 황준우와 마주친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는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우후후, 이제야 조금 시선이 맞네요.”
“난 지금 상황이 왜 이해가 안 되지.”
“아아, 맞아. 설명을 해 드려야지요. 음, 그러니까 제 이름은 제갈휘입니다.”
“그건 아까 들었고요.”
“제갈문중에서 자랐으나, 제게 가르침을 하사해주신 분은 백택 스승님이십니다. 우후훗.”
꽤나 즐거운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린 제갈휘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린다. 하나 황준우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아는 걸까요.”
“당연히 백택 스승께서 말씀해주셨지요.”
제갈휘가 여전히 반짝거리는 눈으로 답했다.
“음? 백택이라는 성함을 가진 분을 전 모르는데…… 아, 잠시만.”
황준우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따지자면 제갈휘 측이 훨씬 더 고혹적이기까지 한 외모를 가졌으나 첫인상과 분위기부터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무런 접점도 없이, 두 사람이 이토록 닮은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시 그 백택 스승이란 분이 교 자 함자를 쓰시는?”
“아아, 맞습니다! 바로 그분이지요.”
제갈휘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럴 수가. 잠시만, 그러면 그쪽이…….”
“전 약 오십 년 전에 스승님께 하사받았습니다.”
“오십 년 전?”
“후후, 그렇게 안 보이나요?”
“네. 뭐.”
제갈휘의 외모는 아무리 보아도 이립을 넘기지 않아 보였다.
많이 쳐줘 봐야 황준우와 또래로 보일 정도인 것이다.
하나 상대가 제갈세가의 인물이라면 납득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쪽 사람들도 뭔가 일반의 기준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 같으니…….’
겉만 소녀인 신아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면 속 편할 터였다.
“하면 제게는…… 사형이 되겠네요.”
황준우의 입에서 어색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얼굴은 저도 모르게 붉어진다.
제멋대로, 따지자면 꽤나 방자하게 살다 보니 부모와 스승이 아닌 상대를 높여 부른다는 것이 꽤나 어색한 탓이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만, 그냥 편히 불러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사형께…….”
“스승님이 그런 것을 따지는 성격은 못 되시지 않습니까?”
“음…….”
신음을 흘리는 황준우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주억여졌다.
“무엇보다 제가 괜찮습니다. 사실 같은 스승님의 밑에서 수학(受學)한 동료를 만났다는 기분이 더 크니까요.”
실제로 제갈휘는 꽤나 들떠 보였다.
근래,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로 보기 힘들었던 모습들이다.
“영 불편하시면 그저 사형이라는 호칭 정도만 유지해주세요. 이건 제 부탁입니다. 후후.”
“뭐, 그렇다면야…….”
눈을 가늘게 뜬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나저나 팔괘술을 제법 훌륭히 익히신 듯하군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황준우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서강이라는 이름표를 단 어색한 얼굴이 느껴진다.
한데도 제갈휘는 황준우를 한눈에 꿰뚫어 봤다.
과연 범상치 않은 제갈세가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잠깐, 근데 스승님은 오십 년 전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였던 건가?”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일반인은 아니셨구먼.”
또한 보인 것보다, 감춰진 게 더 많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은 많았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었다지만 전생에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황준우다. 그런 그를 백교는 단숨에 압도한 전적이 많았다.
따지자면 그때 당시 느꼈던, 고작 우내십존 정도의 무공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사형, 스승님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어?”
“음…….”
제갈휘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감함이 어렸다.
모른다기보다는 연유가 있기에 말하기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다.
“미안합니다.”
“아니, 뭐. 사형이 미안할 건 아니지. 그나저나 천하가 두렵지 않다 여겼거늘,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구나.”
언제나 느끼지만, 전생의 자신을 떠올릴 때면 부끄러운 사실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이 독존(獨尊)이라 여겼다. 천하를 오시하며 광오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태어나서 알아가는 새로운 사실 하나, 하나가 그때의 기억과 겹쳐지는 어떤 밤에는 홀로 이불을 걷어차며 잠을 설치기도 했다.
“황 공자라면 능히 천하를 발아래 굽어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지요.”
“뭐, 낯부끄러운 건 둘째 치더라도 그거 황궁에서 하기에는 위험한 발언 아닌가?”
“우후후, 뭐 어떤가요. 듣는 사람도 우리뿐인데.”
그 ‘우리’에 들어가는 주연하를 바라보았지만, 역시 불편한 내색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주연하는 일반적인 황족과는 많이 달랐다.
“아, 그 뭐냐…… 사형 측도 조금 편히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만 이러니까 어색한데.”
“그러면…… 그래 볼까?”
두 사형제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대화는 끊어지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모습을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던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면 이제 사형제 간의 만남은 조금 뒤로 미루어두고 본론을 꺼내보자꾸나.”
“아, 맞다. 나도 듣기는 했지만 사형을 본 건 처음이라.”
창백한 안색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제갈휘와의 첫 만남이 꽤나 강렬했던 탓에, 잠시 잊고 있던 본론을 떠올린 황준우가 웃음을 흘렸다.
“괜찮다. 오히려 두 사람이 그리 가까운 사이였다니 내가 다 기쁘구나. 휘.”
“예. 마마.”
“금의위 대영반께서 암살당하셨다.”
다시 들어도 충격적인 이야기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준우는 물론, 평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주연하조차도 큰 충격을 받았었다. 한데 앉아 있는 제갈휘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예상하고 있었느냐?”
“수많은 가정 중 하나에 속했을 뿐이지요. 다만 저 역시 그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결국 막지 못했고 말이지요.”
“휘.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설마하니 대영반이 암살당할 것이라고는…….”
주연하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바닥을 바라보던 제갈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여 금의위 무호 부장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뭐야, 이것도 수많은 가정 중 하나?”
“가정은 맞지만, 수많은 경우 중 하나는 아니야. 대영반의 암살이 현실화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은 굉장히 한정적으로 변했으니까. 개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떠올리는 거지.”
제갈휘가 눈웃음을 지은 후 다시금 주연하를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결국 그가 찾아오긴 했나 보군요.”
“네 말이 맞다.”
“무호 부장은 욕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금의위에 대한 애정과 대영반에 대한 충심이 있으니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군요. 흐음…….”
짧은 신음 이후, 입맛을 다신 제갈휘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마마께 무슨 제안을 했지요?”
“승상의 자리를 달라더군.”
굳이 무호가 내건 대가는 말하지 않았다.
작금 상황에서야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건 또 예상외로군요. 욕심만큼 겁도 많은 성정을 가진 그가 어찌하여…….”
제갈휘의 눈이 가늘어진다.
생각이 깊어지는지 시선은 다시금 바닥을 향했다.
“누군가 그를 충동적으로 이끌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대체 누가?”
“글쎄요…… 황자께서는 본래 심성이 그리 과감하지 못하신 분입니다. 태조께서 폐한 승상의 자리를 다시 살리실 리가 없지요. 하면 동창 제독인가? 아니, 그 또한 그릇이 못 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제갈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렵군요. 작금의 황궁에서 무호 부장을 그토록 충동질할 수 있는 인물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머리를 알면 더 쉽겠지만, 짐작할 수조차 없으니 아쉽게도 돌아가야겠군요.”
“역시 무호 부장과 손을 잡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게냐?”
“그 또한 방법이지요.”
“하면 다른 계책이 있느냐?”
“계책이라 부르기엔 민망합니다. 다만 마마께서 잊고 계신 것이 있으신 듯합니다.”
“내가 잊고 있는 것?”
“예. 금의위 대영반이 되기 위한 절차에는 금의위무가 있지요.”
“아, 금의위무!”
“금의위무?”
주연하의 감탄과, 황준우의 의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금의위 대영반은 보통 세 가지 경우에 의하여 선출됩니다. 첫째는 황제의 임명. 하나 아시다시피 지금 궁에는…….”
황제가 없다.
뒷말을 잘랐지만, 그를 이해 못 할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두 번째로는 전대의 위임.”
이 역시 불가능하다.
전대 풍혁기가 암살되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니 말이다.
“세 번째가 바로 금의위무. 사제. 금의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묻는 걸 보니, 역시 무공 아닐까? 금의위 하면 황궁 제일의 무력 집단이기도 하고 말이지.”
“사실 그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이 있긴 하지.”
제갈휘의 시선이 주연하를 향했다.
“대 명 아니,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
“아…….”
그 때문에 새로운 대영반이 선출되는 일에는 황제의 명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 황제라면 그 자리에 누구보다 믿을 만한 인물을 앉히고 싶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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