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25화
제 225화
“그렇기 때문에 금의위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야. 적어도 대 명에 대한 충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뒷배가 필요하다는 말이네.”
황준우는 웃음을 흘렸다.
오래도록 제국을 지탱해온 공신 가문의 인물조차 언제 속내가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한데 고작 몇 가지 문답이나 시험으로 사람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불가능하다.
결국 정말로 공신 가문에 속하는 인물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금의위는 대부분 추천제로 선출되기 마련이었다. 황궁에 복직하는 무관으로서 금의위에 뽑힌다는 것은 상당한 영광이니, 이를 노리고 줄을 서는 무관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러면 두 번째로 중요한 게 무공인가?”
“미안하지만 아니야. 사제.”
황준우의 자신만만한 말에 웃음을 보인 제갈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일단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하잖아?”
“아…….”
문과의 과거시는 몇 번 치렀지만 무과와는 인연이 없었다. 무신이라 불리었지만 관직에 뜻을 둔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그러면 충성 이전에 과거 시험 합격이 들어가야 되는 것 아니야?”
“아쉽게도 휘의 순서가 옳다. 대부분 금의위가 될 이들은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결정되는 편이니 말이다.”
“황제가 제법 엄한 편 아니었나?”
피로 역사를 써 권좌에 오른 선대 황제의 위엄은 만천하를 아우를 정도였다. 황궁 내에서 그와 같은 비리가 버젓이 벌어지는 일을 두고 보았을 리가 없다. 황준우의 의문에 주연하의 입가로 조소가 흘렀다.
“폐하께서는 말년에 드시면서 크게 변하셨다.”
“흠…….”
나이가 들면 사람의 기세가 약해지기 마련.
얼마 전의 풍혁기를 떠올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금의위가 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는 거지.”
“무공은 사실 아무렴 상관없다는 건가.”
“무과에 급제할 정도면 평균 이상은 한다는 거니까. 금의위 훈련을 받다 보면 자연스레 무공 실력도 올라가고.”
따지고 보면 본래부터 고수를 영입하는 것보다, 조금 모자라더라도 그 측이 더 황실에 대한 충성을 다지기 좋았다. 어찌 됐든 금의위의 무공과 수련으로 강해진 무인은 그 만족도에 대한 보상으로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다질 테니 말이다.
황준우는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나랑 조직운영은 잘 안 맞아. 유능한 부하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황궁을 조직 정도로 비유하는 게냐.”
“따지자면 어마무시하게 큰 조직이지. 무림맹이나, 황궁이나. 우리 남천맹까지.”
“뭐,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구나.”
주연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주억였다.
“자, 아까 금의위무에 대해 물었지? 금의위를 선출하는 과정에 위와 같은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면, 금의위무는 조금 달라. 이 부분에서는 사제 말대로 무공이 가장 중요하거든.”
“오호?”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갈휘가 말하는 계획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거 취향에 조금 맞는 일이네. 결국 내가 금의위무에 참가하면 되는 것 아냐?”
“그렇지. 물론 무공이 전부는 아니야. 금의위무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금의위 위사들의 지지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니까 말이지.”
“물론 그쪽도 방법이 있겠지?”
“이쪽에서도 금의위와 접점이 제법 존재하는 편이다.”
답을 대신한 것은 주연하였다.
“남은 건 무과시험 합격인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라면 주연하를 통해 증명할 수 있다.
하나 무과시험은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편법이 있겠지?”
황준우의 물음에 눈웃음을 지은 제갈휘가 고개를 주억인다.
물론 없을 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황궁이 엉망인 상황이라면 더 쉽게 위장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내키지는 않는구나.”
주연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마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결국 몇 가지 조작을 통해 황준우를 금의위 내부로 침투시킨다. 그리고 곧 있으면 열릴 금의위무의 후보 중 하나로 지명하여 무호와 대립하게 한다.
여기까지만 갈 수 있다면 뒷일은 일사천리다.
아무리 무호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여도 황준우에게 미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으니 말이다.
“휴…… 결국 이조차 내 업보로구나.”
한숨을 쉰 주연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손 놓고 무호가 금의위 대영반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에게 휘둘리는 것보다는 몇 배 낫다는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
“업보라고 생각하면, 안정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를 잘 다스리면 되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라…….”
주연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 쏟아지는 빗물 아래에서 했던 다짐이 마음속의 수면 위로 다시금 떠오른다.
강하게 움켜쥔 두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단단하게 굳어진 시선은 어느덧 황준우를 향했다.
“부탁해도 되겠느냐?”
“물론이지. 그러겠노라 이 자리에 왔잖아.”
“다시 한 번…… 고맙구나.”
주연하가 웃음을 보인다.
그를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황준우 역시 상큼한 웃음을 흘렸다.
“난 네 그런 점이 좋아.”
“무,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주연하는 괜한 민망함에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달래기 위하여 손부채질을 했다. 황준우는 그런 주연하를 잠시 오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방 안이 제법 덥구나.”
곁눈질로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한 주연하가 또 다른 말을 건넨다.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네가 나보다 고수여서 그런 게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마.”
“조용히 하여라. 휘.”
“…….”
“큭큭.”
“웃지 말거라. 준우!”
“미안하지만 안 웃을 수가 없네. 큭큭.”
“으으…….”
얼굴을 붉힌 주연하가 약이 오르는 듯 몇 번의 거친 숨을 내뱉더니 등을 휙 돌린다.
“이쪽이 해야 할 준비를 할 테니 대기하고 있어라.”
그리고서는 쿵쿵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머리 위로 김이 오르는 듯한 헛풍경이 보일 정도였다.
“마마랑 많이 친근한 것 같아 보이네.”
“아무래도. 친구…… 니까.”
멀어지는 주연하를 보며 작게 중얼거린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제갈휘를 향했다.
“두 사람 잘 어울려.”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될까?”
“마마랑 똑같이 굴기는. 적어도 사제는 지금쯤 슬슬 뭔가 눈치챈 것 같은데.”
“아니, 난 그런 의미 아니었는데. 사형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
생글생글 웃는 제갈휘가 크게 고개를 주억인다.
도저히 몸이 병약해서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난 그냥…… 연하가 미안하다는 말을 안 써서 좋다는 건데.”
“오호……?”
“연하는 늘 고맙다고 하거든. 미안하다는 말보다야 훨씬 듣기 좋지.”
“과연…… 천생연분인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부정은 안 하네.”
“…….”
짧은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보낸 황준우가 팔짱을 낀 후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나저나…… 사형.”
“불가능해.”
황준우가 뒷말을 내뱉기도 전 제갈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새하얗다 못해 밝아 보이는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음영이 드리웠다.
그를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자연지기나, 술법 시술로 치료할 수 있다면 진즉에 했겠지. 이미 이 몸은 늦었어.”
웃음을 지은 제갈휘의 표정이 어째서인지 흐릿하게 느껴진다. 그의 몸 전체에 가득한 탁한 기운이 황준우의 눈에 보였다.
장량이 보였던 아니, 마왕 동탁에 비견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탁기다.
저런 기운을 인간의 몸에 품은 채로 버티는 것 자체가 신비한 일이었다.
때문에 황준우 역시 함부로 먼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괜히 치료를 하려다가 자극받은 탁기가 날뛰기 시작하면 제갈휘의 말마따나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 말이다.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말해줄 수 있어?”
사형제지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신비하다.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을 어렵지 않게 묻는다.
얼굴을 처음 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지, 사형이 편한 사람인 건가?’
그러고 보니 백교와 닮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선한 느낌이기는 했다. 나긋한 말투 역시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따진다면 그 또한 제갈휘의 능력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말해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
“때가 아니라고?”
“응. 적어도 아직은…….”
말을 늘이는 제갈휘의 음색에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 더 이상 음성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흠…….”
결국 황준우는 짧은 신음을 흘리고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땅과 물의 자연지기가 떠올라 제갈휘의 몸을 휘감는다.
썩어가는 속내까지 어찌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체력을 북돋는 효과 정도는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과연, 사제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과언이 아니었구나. 대단해.”
놀란 표정을 한 제갈휘가 자신의 몸을 둘러본다.
탁기에 자극이 되지 않게 그의 주변을 휘감는 기운은 대단하다는 표현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게끔 만들 정도였다.
“뭐, 내가 이쪽 방면으로는 굉장히 잘난 편이지.”
“후후, 그래.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내가 아는 모든 무인 중에서도 사제만큼 자연지기를 잘 다루는 존재는 없어. 가히 천재적이구나. 왜 가주께서 팔괘술을 건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질문을 한 황준우는 곧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유달리 비밀이 많다.
묻는다고 모두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이제 잘 알았다.
“별 뜻 없이 말 그대로야. 사제가 타고난 자질과 팔괘술은 그야말로 최고의 궁합이야.”
“그래? 보통 조화 이상부터는 어느 정도 자연지기를 다루지 않나?”
“근본이 다르지.”
“아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황준우의 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사실 무기를 잡는 순간부터 모든 무인의 성향이 갈린다. 그것이 유달리 크게 드러나는 것은 처음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다.
각자의 특징에 따라 강기의 특성이 달라지듯 말이다.
그리고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후 깨달음이 더해지면 특성은 하나의 결정체로 변하게 된다.
바로 심상지기다.
때문에 무인이 가진 각자의 심상지기는 다르다.
조율의 경지에도 그와 같은 변화가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특성에는 분명 제갈휘가 말하는 근본이 많은 것을 좌우할 터였다.
“왠지 뭔가 알 것도 같은데…….”
눈이 가라앉은 황준우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제갈휘의 말이 그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얕은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그 긴 침묵의 시간을 지켜보는 제갈휘의 시선에는 몇 번이고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인간의 희망이라 불릴 만하네. 재능이란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잖아.”
황준우 본인은 크게 자각하지 못한 듯했지만, 자연지기를 자유롭게 다룬다는 근원, 그러니까 근본은 조화 이상의 무인과 술법사들이 가장 탐을 내는 재능이었다. 같은 경지와 깨달음으로도 훨씬 더 친숙하게 자연을 다룬다는 사실이 그릇의 차이를 만드니 말이다.
한데 황준우는 이미 그를 가지고 있다.
단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었을 뿐인데 본인은 새로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가히 괴물 같은 진보다.
“천재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하겠군. 확실히 사제라면…….”
입맛을 다신 제갈휘의 눈에 희망이 깃든다.
그렇게 조용한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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