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28화
제 228화
물론 황준우에게 돌아오는 길에 적발당한다면 사마정이 보낸 문서가 노출될 수도 있지만, 겉으로만 보자면 적안서는 흔히 보이는 평범한 쥐일 뿐이다. 찾기도 쉽지 않고 잡는 것 또한 어렵다.
게다가 적안서는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할 경우 가지고 있던 문서를 삼키게끔 훈련이 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사마정의 가치가 무림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황궁까지 침투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꼭 부탁한다고. 여기까지. 기억했지?”
황준우의 물음에 적안서가 울음소리와 함께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이고는 방 밖을 향해 뛰쳐나간다. 사실 직접 보면서도 신기했지만 막상 실수한 적은 없으니, 어지간히 훈련받은 인간 못지않다고 볼 수 있었다.
‘죽은 황제와 대영반, 두 사람의 사인만 명확하게 규명해도 이 싸움은 불리할 게 없다.’
가정된 상황에 따라 오히려 유리해질 수도 있다.
작금 주연하에게 가장 난감한 상황은 그녀가 황제의 암살범으로 지명되고 있다는 점이니 말이다. 그로 인해 바깥에서는 영왕이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평소 그와 인연이 많은 군부의 수장들은 현재로써는 믿어주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지만 부실하게나마 증거가 나온다면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을 터다.
반역에 가담하고 싶은 인물은 누구도 없을 테니 말이다.
“흐음…….”
계획되었던 일을 해결한 황준우는 방 한편에 놓아둔 죽립을 들어 올리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우선 대영반이 된다.”
그리고 사마정을 통해 정보를 섭렵하여 불리한 상황을 타파한다.
“마지막으로는, 연하가 발 좀 뻗고 편히 잘 수 있도록 돕는다.”
입가로 웃음을 지은 황준우의 신형이 단숨에 방 안에서 사라졌다.
“청소는 정말 매일 해도 끝이 없네.”
금강각을 벗어나 장락궁에 도착하여, 곳곳에 숨어 주연하를 감시하는 이들을 모두 처단한 황준우가 혀를 찼다. 황궁 곳곳에서 보내는 주연하를 향한 시선들이 지치지도 않고 매일 나타난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사라지면 경계할 법도 하건만 그런 분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주연하의 주변 동태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무공도 제법 늘었네.”
장락궁 지붕 위, 연무장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주연하를 보는 황준우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녀의 무재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 상태로 몇 년이 더 지나면 그녀 역시 초인이라는 경지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고수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검무를 황준우는 앉은 자리에서 한참이나 바라본다. 무언가에 홀린 듯 몽롱한 시선 속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낮게 가라앉아있다가 불쑥, 튀어 오르곤 한다.
‘아름답구나.’
문득 머릿속에 연인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니, 우린 친구야.’
아주 오랜 시간 황준우와 주연하,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았다고 믿었다.
‘정말?’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제 마음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세월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설령 그 오랜 시간을 정녕 친구로 바라보았다 한들, 지금에 와서 바뀔 수는 없는 걸까?
고민이 이어지고 있던 때, 주연하의 검무가 끝을 맺었다.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턴 황준우가 헛웃음을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나는군.”
혀를 찬 황준우는 곧장 등을 돌렸다.
[붙어 다니는 눈은 없으니까, 편히 행동해. 이따 밤에 한 번 더 올게.]
혹시나 주변 시선을 신경 쓰고 있을 주연하를 위해 한마디를 남기고는 장락궁을 떠난다.
“이거 경호보고 장가가라 할 때가 아닌가…….”
뒷짐을 쥔 채 다시 금강각으로 돌아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황준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막상 홀린 듯 주연하의 검무를 바라보던 자신을 떠올리니 부끄러움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탓이다.
“이따가 자기 전에 이불이나 신나게 걷어차야겠다.”
사실 굳이 다짐을 하지 않아도 부끄러우면 몸이 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나름대로 그렇게 발악을 하고 나오면 조금이나마 부끄러움이 덜어질 때도 있었다.
“……될까?”
아주 가끔, 아니 사실 제법 거의 효과가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끙…….”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걷는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황준우와 같이 죽립을 눌러쓴 채 다가오는 무인이 보였다.
‘누구지?’
도약 한 번이면 닿을 근거리.
이때까지 상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풍혁기 이상의 고수라는 뜻이다.
그쯤 되지 않으면 황준우의 인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상대 역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서로 죽립을 들어 올리고 시선을 마주친다.
‘처음 보는 얼굴.’
하나 어쩐지 낯설지 않다.
서로의 어깨가 지나치는 길.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상대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금의윈가요?”
조심스러운 말투와 달리 목소리는 낮고 굵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마주한 황준우의 고개가 주억여졌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상대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만 같은 태도다.
하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이건 뭐지?’
두근, 두근.
심장이 박동한다.
알 수 없는 불쾌함이 황준우의 온몸에 차올랐다.
눈빛은 바쁘게 움직여 상대를 훑는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흐릿한 것에 몇 번이고 놀란다.
이만한 거리에서 황준우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고수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닙니다. 그냥 반가운 사람을 닮은 듯하여…….”
싱긋 눈웃음을 지은 사내가 물었다.
“성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은 자영입니다.”
“……서강.”
“서강, 서강이라. 후훗. 또 뵙지요.”
웃음을 지은 자영이 멀어진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준우도 다시금 금강각을 향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하여 자영이라는 사내에 대한 의문이 차올랐다.
‘어디선가 느껴본 기운이기는 한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닮은 듯 다르다.
‘진무영 녀석이 저 정도 고수였나?’
분명 진무영의 실력은 대단하다.
하나 황준우의 기억에 의하자면 자영에 비해 몇 수는 처져 있었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내에 저만큼이나 성장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황준우 본인조차도 매일 매일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단서만 주어진다면 순식간에 벽을 넘을 수도 있다.
하나 만약 그렇다면, 황준우는 그간 진무영을 제법 얕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터였다.
‘놈 역시 시대의 천재.’
다시금 시선을 돌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영의 흔적을 쫓는 황준우의 입가로는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정녕 진무영이라면…… 이번 황궁행의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지겠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당한 보폭으로 어딘가를 향하던 자영의 걸음이 멈추었다. 시선을 돌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황준우의 흔적을 쫓는 눈빛은 크게 흔들린다.
“아아…….”
속 안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것임이 분명한 탄식이 흐른다.
불에 달군 듯 뜨거워지며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인 몸은 잘게 떨린다.
양손으로 어깨를 감싼 이후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무너져 버린다.
“아아…… 당신, 당신입니까?”
음성과 눈빛에는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천하에서 당신의 눈빛만이 저를 이렇게 감격하게 만들 수 있음인데…….”
몇 번이고 달뜬 숨소리를 내뱉은 자영이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킨다.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무너져 있을 시간은 없다.
“서강, 서강이라…… 거짓된 이름조차 제 마음을 울리는군요. 후후.”
지면을 다시금 양발로 디딘 자영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애초부터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천하의 무신에게 다가가는 길.’
그 어떠한 일조차 우습게 본 적 없다.
쉽게 여기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여 그를 갈구했다.
황궁에서의 일은 그 마지막 단계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겠지만, 분명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방금 전, 우연하게 마주친 황준우를 보기 전까지만 하여도 자신감이 충분했다.
하나 이제는 다르다.
“역시 쉽게는 안 되겠죠.”
상대는 무신이다.
그가 누구보다 동경하는 인물이자, 천하제일의 영웅.
“그래도 지지는 않겠습니다.”
완전히 그의 곁에 서기 위해,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비로소, 같은 전장에 서게 되었군요. 이제부터는 함께입니다. 후후.”
짙은 눈웃음을 짓는 자영의 혀끝이 다시 한 번 입술을 핥았다.
자영과의 만남은 한동안 황준우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하나 오래 생각한다 하여 무언가 바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자영에 대한 생각을 지운 황준우가 잠들기 전 이불에 발차기를 하고 있을 무렵, 마필이 화급하게 황준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서강! 서강! 자고 있는가!?”
“……크흠.”
한참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쓰고 얼굴을 붉히고 있던 황준우가 헛기침을 하고는 몸을 일으켜 죽립을 눌러썼다.
“무슨 일이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간다.
“중요한 일이네. 어서 이 문 좀 열어보게.”
“흠…….”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묘하게 다급한 표정을 한 마필이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후우…… 후우……, 잠시 숨 좀 가다듬고 이야기하세.”
“그러던지.”
황준우의 입장에서도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 지났다.
“아, 근데 자네는 잘 때도 죽립을 쓰고 있나?”
숨을 가다듬은 마필이 의아한 듯 묻는다.
“……아니.”
“하면 지금은?”
“급한 일 있던 것 아닌가?”
“아차차, 내 정신 좀 봐라.”
짧은 위기를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넘긴 황준우가 속내로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백균 부장이 자네를 찾네.”
“백균?”
금의위 오(五) 부장 중 하나이자, 무호와 대적하고 있다는 유일한 인물.
역시 다음 금의위무에 참가하게 될 유력한 후보다.
그를 떠올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맞네. 그 백균 부장이 지금 자네와 나를 보고 싶다더군.”
“어디서?”
현재의 금강각은 조용하다.
근무를 나간 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자시(子時)의 끝에 다다르며 대다수가 잠에 빠져든 시간인 탓이다.
“궁 바깥에서 보자고 하는 것을 보니…….”
마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이 늦은 시각, 궁 바깥에서 보자는 것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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