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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35화 (235/373)

학사재생 235화

제 235화

끼익, 끼익.

모충기는 움직이는 쇳소리가 유난한 소리로 귀를 때린다고 느끼며 눈을 떴다.

“…….”

한 치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눈가 끝을 타고 흐르는 촉촉하고 끈적한 감촉이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흐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창의 제독.

권력의 중심에 누구보다 가깝게 다가갔다고 생각했던 그가 양팔과 다리가 모두 묶여 벽면에 매달린 채로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다 놈 때문이다.’

자영이라고 했던가.

어느 날 주고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온 이름을 알 수 없던 무사.

주고치는 의아할 정도로 그의 말을 신뢰했다.

덕분에 동창 제독이라는 위치에 있던 그가 이런 햇볕 한 점 없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일어나셨군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으으…… 네놈.”

모충기는 이를 아득 갈았다.

부릅뜨기 힘들어 반쯤 감긴 눈에는 독기가 어린다.

비록 이런 꼴이 되었지만 정적에게 꼬리를 만 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흐음…… 눈빛을 보아하니 아직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책은 멀었나 보군요.”

“닥쳐라. 네놈이 전하를 홀려 현안(賢眼)을 흐리게 만들었다 한들, 그 영광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흐흐.”

“큰일입니다. 제 잘못을 모르는 개가 두 마리나 있으니, 일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아악!”

동시에 모충기의 뇌리도 번쩍였다.

지독한 통증이 허리춤에서부터 시작되어 전신을 뒤흔들었다. 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깨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기절하기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고문 기술자의 손길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몸을 감히 개 따위로…….’

하나 그 와중에도 모충기의 독심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서는 어둠 속의 자영이 내뱉은 말에 담긴 의미를 빠르게 읽어 내린다.

‘개가 두 마리. 그렇구나. 무호 놈이 결국 제 자만과 욕심을 이기지 못해 실패했구나.’

오랜 시간 황실의 정보를 다루는 동창의 제독으로서 활동해왔던 모충기의 머릿속에는 단숨에 큰 그림이 그려졌다. 아는 이가 몇 없지만 이미 황궁 곳곳에는 자영의 손길이 깊이 뻗쳐 있었다.

그중 모충기를 가장 놀라게 했던 부분은 바로 금의위까지 닿은 손길이었다.

문제는 대체 금의위의 누가 자영과 맞닿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모충기는 자신과 맞닿은 무호를 빠르게 움직였다. 자영이 돌아오기 전 황실을 안정화시키며 자리를 공고히 다지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호는 제법 쓸 만한 인재였다.

재능도 뛰어나며 머리도 좋지만 아직 욕심을 제어할 줄 모르는 애송이.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적당한 자극으로 몰아붙인다면 알아서 파국을 향해 치달았을 인물이다.

그런 그를 자영이 몰랐을까?

‘아니지.’

동창의 제독인 그마저 사로잡아 지하 감옥에 가둔 자영이다. 그가 무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고서 이용하려 하였다.

다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흐흐…… 꼴좋다고…… 아악!”

다시 한 번 번쩍이는 빛살과 함께 온몸을 떨게 하는 고통이 전해졌다.

빌어먹을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지독하게도 멀쩡하다는 사실이었다.

“곤란합니다. 당신이 성급하게 움직인 탓에 잠자고 있던 용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금의위는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자영의 목소리에는 불쾌함, 그리고 어째서인지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욕심 많은 당신이라 한들 내가 없는 동안만큼은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남겨두었거늘…… 정말로 쓸모없습니다.”

“크아아악-!”

살이 찢어지는 감촉과 함께 다시 한 번 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여라!”

동시에 거친 음성이 감옥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핏발 선 모충기의 두 눈에는 휠 수 없는 의지가 가득했다.

“아니 될 말이죠. 죽여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영의 목소리 사이사이로 웃음이 섞여 들린다.

“모충기. 죄를 지은 개라 한들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침을 뱉은 모충기의 입가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헛소리! 난 네놈들의 개 따위가 아니다.”

“…….”

짧은 침묵이 흐르고, 어둠 속 자영의 눈동자가 모충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동공과, 짙은 검은 눈동자.

그를 마주한 모충기의 시선이 떨린다.

“글쎄요.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알겠죠. 후후.”

웃음이 찐득하게 모충기의 몸을 감싸 안았다.

초저녁, 황준우는 황궁을 나서 마필의 집으로 향했다.

황궁 인근에 있다고 밝힌 만큼 거리는 멀지 않았다.

궁성을 벗어난 이후 느긋한 걸음으로 일각 정도 걷자 도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네.”

주변 가정집과 큰 차이가 없는 작은 집.

그 앞에 선 황준우의 물음에 마필이 웃음을 보였다.

“금의위 조장이라고 하여서 뭐 거창할 줄 알았나.”

“솔직히 그렇지.”

조장이라고는 하지만, 자그마치 금의위다.

일반적인 관병이나 관리들에 비하자면 꽤나 많은 보수를 받는 직종인 것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마필의 집이 큰 장원까지는 아니어도 이 층 정도 되는 큰 집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쉽게도 황궁 인근은 집값이 제법 비싸서 말일세.”

농인지, 진짜인지 모를 말을 남긴 마필이 집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작은 여자 아이가 뛰쳐나온다.

“아빠!”

“아이고, 우리 예쁜 딸!”

이제 기껏해야 일곱, 여덟 살 되었을까.

귀엽게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단숨에 뛰어들고, 단숨에 그를 받아 허리 위로 들어 올린 마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 지냈어요?”

마필의 물음에 어린 소녀가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응. 아빠 말대로 밥도 잘 먹고, 엄마 말도 잘 듣고,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어.”

총기 가득한 소녀의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한다.

그를 바라보는 황준우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황서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귀여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귀엽지 않다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오, 글공부까지?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기대해 볼까!”

신이 난 음성을 토한 마필이 볼을 비비자 소녀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따가! 따가! 아빠!”

“아, 맞다.”

덥수룩하고 까칠한 수염을 뒤늦게 자각한 마필이 얼굴을 떼어내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손님 세워놓고 뭐하는 거예요.”

딸의 목소리를 따라 집 문 앞까지 나온 중년의 여인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함께 딸려 나온 고소한 밥 향기가 황준우의 배 속을 자극했다.

“그러게. 배도 고프니 빨리 소개부터 해주지.”

“아, 그럴까? 우선 이쪽은 서강. 나랑 같이 일하는 금의위 위사야.”

황준우의 시선이 마필의 부인, 중년 여인을 먼저 향했다.

“반가워요. 서령이라고 해요.”

서령은 미인은 아니지만 꽤나 밝은 표정이 보기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이 같네요.”

친화력도 제법 좋은 듯했다.

어째서 마필이 그녀를 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 성이라.”

“어머, 정말요? 이것도 인연이네요. 호호.”

황준우의 말에 서령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첫인상보다 제법 귀엽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일 때였다.

“내 아내일세.”

앞으로 나선 마필이 엄격한 얼굴로 말한다.

“알아.”

“이이도 정말.”

서령이 얼굴을 붉히며 마필의 허리를 팔꿈치로 푹 찔렀다.

“딸아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즐겁게 지켜본 황준우의 물음에 마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환한 웃음이 번졌다.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모습이다.

“선이일세.”

“마선?”

“예쁘지?”

“혹여라도 예쁘지 않다고 하면 검까지 뽑겠군.”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을 거야.”

“큭큭.”

웃음을 흘린 황준우는 고개를 크게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귀엽네.”

“우후후.”

“한데 안에서 나오는 밥 냄새가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데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마필과 황준우를 맞이하고자 나왔던 서령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는 주방을 향해 달려간다.

“저래 봬도 음식 맛은 끝내줘.”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마필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황준우에게 자랑했다.

“뭐, 기대해 보지.”

집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사가 차려졌다.

마필의 자랑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서령의 음식 솜씨는 굉장히 훌륭했다.

“어떤가?”

마필이 두 눈에 기대감을 가득 담은 채 묻는다.

“굉장하군.”

황준우는 가감 없이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특히 이 유린기는 내가 먹어 본 것들 중에서 최고야.”

농담을 반쯤 더해 눈앞에서 닭들이 날아오르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을 정도였다.

“으하하하!”

자연스레 마필의 입에서 큼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맛있게 먹어주신다니 너무 좋네요. 호호.”

황준우의 말을 듣자 마찬가지로 큰 웃음을 터트린 서령이 주방으로 향하여 유린기를 더 가져왔다. 그 양이 상당히 많아 부담이 될 정도라 잠시 당황한 황준우였지만, 결과적으로 말해 그릇은 고기 한 점 남김없이 깔끔히 비웠다.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만금장에서 자라며 제법 고급스러운 입맛을 가지게 된 황준우에게 있어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음, 차까지 깔끔하군. 마 조장, 행복하겠어.”

식사 시간이 끝나고,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려 첫맛을 음미한 황준우가 또 한 번 감탄을 토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인의 음식 솜씨가 이 정도라면 매일 같이 집에 돌아오고 싶을 듯했다.

“후후. 사실 내 아내가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객점에서 일했었거든.”

“오호? 혹시 자홍객점을 말하는 겐가?”

“오, 알고 있나 보군.”

알다마다.

황준우가 알기로는 그 객점 역시 황석후가 운영하는 상단 중 하나의 소유였다.

확실히 북경 내에서 음식 솜씨가 좋기로 제법 유명하다고 들었다.

“운이 조금 없어 숙수 경쟁에서 밀리긴 했지만 실제 음식 솜씨만큼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자신하네.”

“자신해도 돼. 내가 인정할 정도니까.”

황준우의 호응에 신이 난 듯 마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그럼! 거기 대숙수가 보는 눈이 없는 게 분명해. 어찌 내 아내의 요리를 먹어보고 다른 놈을 뽑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자홍객점의 대숙수가 누구였는지 떠올린 황준우였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알 리가 없지.’

그런 세세한 인물까지 황석후에게 물어 기억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홍객점을 이끌어 온 인물인 만큼 안목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서령의 상대 숙수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래도 이 정도 솜씨라면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어차피 두 사람이 당장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당신도 그만 자랑해요. 내 얼굴이 부끄럽네.”

“아니 뭐, 내 아내가 예쁘다고, 음식 잘한다고 자랑하는 게 문젠가?”

“술도 안 먹었는데 왜 그래.”

서령이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고 마필이 다시 한 번 큰 웃음을 터트린다.

‘이제 보니 자랑하려고 불렀구먼.’

그래도 나쁘지 않다.

한 가정의 아버지.

금의위가 아닌 가장으로서 마필을 보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에게도 그의 삶이 있다. 그 사실이 황준우의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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