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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37화 (237/373)

학사재생 237화

제 237화

“그대 말대로 그 무서운 존재가 대업을 망치지는 않겠는가?”

“어려운 질문이군요.”

자영 아니, 진무영의 입가로도 쓴웃음이 흘렀다.

“하나 결국, 대업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단코 달성되어야 한다.

진무영의 음성에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이 주고치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게 하였다.

“그대를 믿겠네.”

“…….”

진무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웃음을 보였다.

“이런…….”

대신해서 돌아온 음성에는 난색이 어린다.

“제법 오래 기다려주신다 했는데, 역시 때가 되었군요.”

“무슨 말인가?”

“전하. 저는 이만 다시 궁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주고치의 눈이 흔들렸다.

“갑작스레, 지금 말인가?”

“예. 억지로라도 궁에 머물려 했다가는 목이 남아나질 못할 것 같아서요.”

“허…… 그게 무슨.”

“전하, 시간이 없습니다.”

당황하는 주고치를 향하여 나지막하게 하나, 힘 있게 목소리를 전달한 진무영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번에 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황제가 되어 있으셔야 합니다.”

묵직한 진무영의 시선이 주고치의 어깨를 짓누른다.

주고치의 입장에서야 헛웃음이 새어 나올 일이다.

굳이 그가 힘을 주지 않더라도, 그리될 것이다.

“걱정 말게. 내 의지에는 흔들림이 없으니…….”

진무영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지는가 싶더니, 신형이 흐릿하게 흩어진다.

그 유령 같은 모습을 바라보던 주고치의 입가로 더욱 짙은 조소가 어렸다.

“아무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이 몸이 아니던가. 이미 먼 길을 떠나왔거늘…….”

짧은 대화였지만 피곤하다는 심경이 많이 들었다.

두 눈을 감자, 머지않은 과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 왔음을…….’

눈앞으로 붉은 핏방울이 번진다.

그리고 곧 그 핏방울은 어둠이 되어 세상을 뒤덮는다.

이것은 꿈이다.

어둠 속 은은한 불빛 사이로 비추는 얼굴을 마주한 주고치의 뇌리가 외쳤다.

‘꿈일 수밖에 없지.’

그게 아니라면 죽은 황제,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존재할 리가 없을 테니까.

더욱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면 이 꿈은 과거의 회상이었다.

몇 번이고 이날을 되새기고, 회고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이다.’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강을 건너기 전.

황제를 향해 비통하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가 들은 그 이야기가 정녕 사실입니까?”

“어디서 들은 것이냐?”

언제나처럼 근엄한 얼굴을 하고,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황제가 묻는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녕, 정녕 그 계집이……!”

“사실이다.”

위엄 있지만 나긋하다.

꾸짖는 듯하지만 중심이 잡혀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무엇이 바뀐단 말이냐?”

피곤한 듯, 몸을 뒤로 누인 황제가 물었다.

“왜 바뀌는 것이 없습니까! 어찌하여 그리 태평하시단 말입니까! 폐하 아니, 아바마마. 저는, 소자(小子)는 무엇입니까?”

“…….”

“대답을 해보십시오.”

다급하다. 마음속에 솟은 불길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거칠게 몸집을 불리기만 한다.

“왜, 저와 그 계집이 폐하처럼 그 자리를 위해 피와 눈물을 쏟길 바라십니까? 오로지 혈로(血路) 위에서 생존한 자만이 군림할 수 있는, 그런 대 명을 바라시냐는 말입니다! 아니, 그도 아니라면…….”

입과 눈으로 그 열기를 토해낸다.

쏟아낸다.

“애초부터 피를 쏟을 인물은 정해져 있던 것입니까? 폐하는 소자가 아닌 그 계집을 택하려 하셨습니까?”

불같은 목소리를 파묻어버릴 정도로 큰 천둥이 쳤다.

속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이 가라앉은 황제의 눈이 주고치의 눈동자를 직시한다.

“묻겠다. 어떠한 의지에 따라 지금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냐? 하늘의 뜻이냐, 아니면 땅이 너를 불렀느냐, 혹은 올곧게 선 네 마음인 게냐?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은 황제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네 의지는 누구의 것이냐?”

주고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는 터져버린 활화산처럼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구잡이로 뒤엉킨다.

“저는…… 나는…… 대 명의 태자입니다.”

“참으로 보잘것없구나. 그 태자의 자리는 누가 준 것이냐? 네가? 하늘이? 아니면…….”

가느다란 웃음을 짓는 황제의 목소리가 주고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마구잡이로 가슴과 정신을 난도질했다.

“으아아-!”

기합은 비명이었다.

절규였다.

숨기고 있던 검을 쥔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 순간 주고치는 생각했다.

‘피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내칠 것이다.

당장 내일의 해를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하나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을 할 수 없을 일이기에 검을 밀어 넣는다.

힘없이 주름진 목덜미를 찍어 누른다.

“아…….”

눈앞으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입가로는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아찔하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런 그를 황제가 내려다본다.

노쇠한 두 눈에는 더 이상 위엄이 없었다.

권위와 젊음도 사라졌다.

무겁게 움직인 팔이 주고치의 어깨에 닿는다.

작게 달싹이는 입술이 아무런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내 아들아.’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을까?

많은 감정과 여운을 남긴 황제는 흐릿한 웃음을 보인 채 숨을 거두었다.

비릿한 피 내음이 코끝을 적셨다.

변한 것 없이, 세상은 어둡기만 하다.

참으로 잽싸기도 하다.

움직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달아나기 시작한 진무영을 쫓는 황준우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다.

‘역시 진무영, 놈이 맞았군.’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생각보다 뛰어난 성장을 이룩하였고, 걸음이 재빠르다지만 황준우의 제공을 벗어나기에는 이르다.

‘가자, 수왕.’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본성을 억누른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수왕검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서부터 튀어나갔다.

찌이익-!

대기를 찢어버리는 전율적인 소음과 함께 빛살이 된 검은 단숨에 진무영의 심장을 향해 날을 들이민다.

동시에 진무영의 신형이 둘로 갈라졌다.

하나 그 틈새를 파고드는 수왕검이 더욱 빠른 듯했다.

핏물이 허공으로 비산했으며, 둘로 갈라지던 진무영의 신형이 하나가 되어 비틀거린다.

눈 한 번 깜짝할 새라고밖에 표현 못 할 짧은 틈이었지만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충분한 여유였다.

“진무영.”

차가운 목소리가 진무영의 귓가에 닿았다.

“오셨군요.”

창백한 안색으로 반기듯 인사를 건넨 진무영의 앞섬이 잘려나가며 또 한 번 핏물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손에 쥔 수왕검을 진무영의 목에 겨눈 황준우의 눈에는 망설임 없는 살의가 배었다.

“이렇게 눈앞에 직접 나타나 주니 고맙기까지 하네.”

“후후…….”

“남길 말 같은 건 묻지 않을게. 죽은 사람의 기억 따위는 남기지 않자는 주의라.”

진무영을 향해, 눈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검이 빛살처럼 뻗어졌다.

목이 아닌 어깨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또 한 번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역시 잽싸네.”

가볍게 혀를 찬 황준우의 검이 초승달처럼 휜다.

그 놀라운 움직임에 경악스러운 눈을 한 진무영이 검을 뽑았다.

“의천!”

다급한 음성이 주변으로 자욱한 안개를 자아낸다.

안개와 수왕검이 부딪치며 폭발이 일었다.

‘강기로 만든 안개? 아니, 구름인가?’

무엇이 되었든 진무영의 무공은 아닌 듯했다.

‘무기.’

명력에 의한 이능.

아니, 보패(寶貝)다.

이토록 거대한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정도의 형상이 순수하게 강기로만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권능을 행사한다는 것은, 보패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했다.

“역시 네놈도 가지고 있었구나.”

결국 눈앞의 안개는 수십, 수백을 뛰어넘어 수천조차 지나친 무한의 강기의 벽이다.

초절정의 고수도 그 끝에 닿는 순간 몸이 산산조각으로 갈려 형태를 잃을 터였다.

어지간한 검 역시 닿는 순간 먼지로 화하여 사라질 것이다.

‘곤란하군.’

황준우조차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하나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니다.

‘다시 해볼까.’

마음을 먹고 호흡을 들이쉬는 순간 근육이 수축하듯 오그라드는 감촉이 전신을 지배한다.

“후욱-!”

호흡을 내쉬는 순간에는 수축하였던 근육이 폭발하듯 쏟아지며 찰나의 순간 수천, 수만 갈래의 움직임을 토한다.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무(武)로서 가장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던 삼국의 무신 여포의 체술(體術)이다.

콰과광-!

귓가를 셀 수도 없는 수많은 폭음이 때렸다.

두들기고, 터트린다.

이윽고 눈앞에 세워진 안개의 벽을 무너트리고 검을 쥔 채 어딘지 모르게 감격에 찬 시선을 비추는 진무영을 마주한다.

“이건 피할 수 없을 거야. 진무영. 이만 끝내자.”

차가운 음색이 죽음의 신을 찾을 때였다.

황궁에서부터 허공으로 날아오른 불빛이 터졌다.

짧은 순간 황준우의 시선이 그 빛을 향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채 달싹이던 진무영의 입술이 내뱉던 말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졌다.

‘주연하?’

짧은 정신의 흔들림.

그 틈새가 육체의 움직임을 뒤흔들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뒤덮은 강기의 안개가 황준우의 검을 막아선다.

카가각-!

안개가 갈라지고,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피를 칠하였지만 무엇 하나 깊숙이 닿지 못한 수왕검이 물러났다.

“너, 연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후우, 후우……. 글쎄요.”

쏟아져 나온 피가 감당하기 힘든 것인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가다듬는 진무영의 입가로 즐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대답을 들을 이유가 없지. 내 마음을 흔들어 한 번의 기회를 잡았으나, 두 번은 없을 거야.”

황준우의 육신 내부에서 다시 한 번 기운이 휘몰아치듯 모여든다.

그 힘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과연, 시간의 여유가 있으실까요?”

하나 진무영은 느긋하게 되물어왔다.

마치 황준우는 그럴 수 없다는 듯, 마음을 뒤흔드는 말이다.

“쓸데없는.”

잡념은 버린다.

눈앞의 적을 베고, 새로운 적을 마주한다.

무신 황준우란 본래 그런 존재였다.

“지금쯤이면 바깥도 난리가 났겠군요.”

“네 목이 날아간 이후에 알아도 될 일이다.”

“흐음, 그럴까요. 한데 무신이시여. 어째서 그 폭죽이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고만 생각하시는 겁니까?”

“……!!”

“시간은 충분히 번 것 같군요. 즐거웠습니다.”

진무영의 활짝 핀 입 안으로 수왕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하나 이번에도 수왕검이 가르는 것은 두터운 몸뚱이뿐이다.

“쿠에엑-!”

그래도 꽤나 깊숙이 닿았는지 몸을 휘청거린 진무영이 피를 쏟으며 무너졌다.

곁을 지나치며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본 황준우가 이를 악물었다.

“기다려라. 곧 다시 찾아와주마.”

빛살처럼 멀어지는 그 신형을, 흐릿한 시선 너머로 확인하는 진무영의 입가로는 연신 웃음이 흘렀다.

“후후…… 후후후…… 기다리라니, 그처럼 달콤한 말을 남기시면 떠나는 한 걸음이 만금보다 무겁지 않겠습니까. 정말 가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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