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39화
제 239화
“조력자가 한둘이 아니로군.”
사라진 진무영을 찾기 위해 혈흔을 쫓던 황준우가 가볍게 혀를 찼다.
하나로 이어지던 흔적이 종전에 들어서부터 둘, 셋으로 늘더니 끝내는 수십 갈래 이상으로 갈라졌다. 조직적인 움직임이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눈앞에서 진무영을 놓친 안타까움에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소득이 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황궁 내 혹은 인근에 진무영의 조직이 있다.’
한때 강호제일의 암중단체였던 활협단의 수장이었던 진무영이다.
이제 와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할 능력이 부족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서운 점은, 그런 조직을 소리소문없이 만들어냈다는 것이었다.
“사마정에게 알아보라고 해야겠군.”
모르고 당한다면 위험하지만, 알고 방비한다면 큰 문제가 아니다.
때마침 어둠을 타고 접근해오는 사마정의 기척이 느껴졌다.
[맹주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돌린 순간 사마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에서 전달되는 느낌이 결코 좋지 않다.
“무슨 일이야?”
[무림맹주가 죽었습니다.]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매화검존 운백.
오랜 시간 무림맹주라는 자리에서 군림하며 화산파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되는 존재다.
정의롭지는 않지만, 중도는 아는 인물.
또한 주제를 파악하고 자리를 잡는 데 용의주도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 말은 눈치가 빠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죽었다.
“천수를 다한 건가? 아니, 아직 그럴 때는 아니었는데.”
자연스레 황준우의 머릿속에 살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개방의 방해가 있어 쉽지는 않았지만, 무림맹주의 죽음은 근래에 일어난 일은 아닌 듯합니다.]
황준우의 의심이 점점 깊어졌다.
‘황제에 이어 무림맹주까지……?’
천하의 큰 별들이 속속들이 지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중심 속에 움직이는 인물이 보이는 듯도 했다.
“진무영?”
[그의 이름이 새로운 무림맹주로 지목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심이 아니다.
확신을 가진 황준우의 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놈이 판을 짰어. 대체 무슨 목적이지?”
황궁에 이어서 강호무림까지 진무영의 암계(暗計)가 회오리치고 있다.
생각이 깊어지기도 전, 적안서 한 마리가 사마정의 어둠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어둠 속 사마정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휘청였다.
[맹주님.]
음성이 무겁다.
묵묵히, 황준우의 시선이 사마정을 향했다.
[무림맹주, 진무영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준비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쳐도 너무 빠르다.
무엇보다 진무영은 방금 전까지 황궁, 이 자리에 있었다. 황준우의 검격을 맞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이기도 할 터였다.
“진무영이 맞아? 그 녀석 지금 인사불성일 텐데?”
[맹주령(盟主令)으로 진행된 일이라고 합니다.]
“맹주령…….”
맹주령은 무림맹에 있어, 따지자면 국가의 옥새(玉璽)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진무영이 자리에 없더라도 충분히 선전포고와 함께 병력 구성까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미 백호단(白虎團)과 청룡단(靑龍團)은 선발대로 남기를 향했다고 합니다.]
“정말 빠르기도 하군.”
백호단과 청룡단은 일차무림대전 이후 새로이 구성된 무림맹의 대표 외부 무력단체였다.
한 번 큰 피해를 입었던 만큼, 대부분 후기지수 혹은 군소방파의 제자들 위주로 이루어지게 된 젊은 단체이지만 인원으로만 치자면 각각 삼천이 넘는 숫자다.
말한 바 있듯 강호무림의 싸움에 있어 육천이라는 숫자는 적지 않다.
무림맹의 전력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모자랄지 모르지만 한순간에 쏟아져 나올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런 숫자를 선전포고와 동시에 움직였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진무영이 벌인 일이었다.
“이거 왠지 당한 것 같은데.”
외부에서도 난리가 났을 것이라는 말을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웃고 있던 진무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주 어쩌면, 황준우가 황궁을 향하리라는 것까지 그의 계획 중 일부였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측 준비는?”
[부맹주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서문지언이라면 백호단과 청룡단이 도달하기 전에 충분한 채비를 갖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큰 활약을 할 것이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은 확실히 흔치 않았다.
비단 서문지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의 남천맹에는 많은 인재가 있다.
아무리 황준우가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지만, 일차무림대전 당시 큰 피해를 입은 무림맹으로서는 남천맹과의 승부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진무영은 바보가 아니다.
겪어 본바, 누구보다도 영악함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현재의 무림맹이 남천맹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분명 숨겨둔 꿍꿍이가 더 있다.
아니, 애초부터 이 판 전체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이라도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는 황준우의 영역이 아니었다.
‘역시 진무영을 잡아야 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유난히 마음에 걸렸던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작금에 와서는 그 어떠한 인물보다 황준우를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
난적이다.
황준우의 머릿속이 바삐 움직였다.
우선 무림맹과 남천맹의 전쟁.
꿍꿍이가 더 있겠지만 남천맹이 쉽게 무너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문지언이 아니더라도, 여차하면 황석후까지 나설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쪽은 믿는다.
예로부터 생각했지만 홀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우선 황궁부터 정리하자.’
이쪽 역시 아직 복잡한 사정이 많이 남았다.
그리고 외부의 일은, 가능하다면 머리를 친다.
“사마정. 흔적들이 많다. 이중 진무영을 찾아야 해. 할 수 있겠어?”
황준우의 물음에 어둠 속 사마정의 시선이 주변을 훑는다.
복잡할 정도의 수많은 흔적들.
추적의 달인이라 하여도 쫓기 쉽지 않다.
[해보겠습니다.]
“부탁할게.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고.”
장기에서도 장수를 잡는 것이 가장 빠른 만큼 금적금왕의 계를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한 번 사마정을 잃을 뻔한 전적이 있던 만큼 더욱 조심스러웠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사마정을 남긴 황준우의 걸음이 다시 황궁을 향했다.
주연하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바쁜 하루가 될 듯했다.
이어진 황준우의 걸음이 향한 곳은 금강각이었다.
오전 내내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하늘 꼭대기에 뜨는 오시(午時)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적호가 무엇이라도 대답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우선 금의위.’
역시 이쪽을 손에 쥐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생각을 한 황준우가 금강각 안으로 들어선 직후였다.
‘뭐지?’
주변의 공기가 무겁다.
또한 어딘가에서 짙은 혈향이 나는 듯도 했다.
‘이거 느낌이…….’
너무 좋지 않다.
진무영이라는 이름이 또 한 번 머리에 밟힌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은 다급해졌다.
적호가 아닌 본인의 방문 앞.
걸음을 멈춘 황준우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눈썹 끝은 빠른 속도로 떨린다.
‘이거…….’
나쁜 직감은 쉽게 틀리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는데, 방문 너머의 혈향이 너무나 지독하다.
‘알면서도 당해야 하는 함정인가?’
주변으로 몰려든 시선.
벗어난다고 하여 해결될 일은 아니다.
“휴우…….”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쉰 황준우의 손이 방문을 밀었다.
드르륵-!
제법 익숙한 피 내음이 코끝을 강하게 휘감는다.
문을 여는 순간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또 한 명의 희생자인가.’
고위 관직의 인물 혹은 같은 금의위, 어쩌면 흔하디흔한 궁녀일 수도 있다.
하나 누구의 것이 되었든 그 목숨이 가볍지는 않다.
궁녀에게도 그들의 삶이 있다.
마필을 보며 충분히 깨닫지 않았던가?
궁궐 내에서 물품처럼 취급당하며 갇혀 있는 새장 속의 새와 같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다.
존중받아 마땅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각자의 삶과 행복이 있다.
“뭐야…….”
이 자리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낯익은 얼굴이 목만 남아 바닥을 구르고 있다.
목소리가 가늘게 늘어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림맹의 선전포고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주연하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지금만큼 흔들리지는 않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었으니까.
하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결과는 엄연한 현실이다.
“마 조장.”
어여쁜 아내와 딸을 자랑하던 가장이 죽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핏물로 방바닥을 수놓고 있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절로 치밀어 오른다.
“서강.”
그런 황준우의 뒤편으로, 차가운 조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금의위를 살해하는 것으로 모자라, 오체분시를 하여 방관한 죄를 인정하느냐?”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주변으로는 천하를 얼릴 것 같은 한기가 치솟는다.
“대답을…….”
다시 한 번 채근하던 조문영의 몸이 멈추었다.
‘이놈…….’
분명 뒤돌아서 있다.
한데 목 끝에 칼날이 겨누어져 있는 기분이다.
한 걸음 아니, 한 마디라도 더 내뱉는 순간 죽는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지독한 현실감을 가진 채 조문영의 전신을 뒤덮었다.
짧지 않은, 이 각이 넘는 침묵이 흘렀다.
조문영을 비롯한 모두가 숨 한 번 마음대로 내쉬지 못한 채 굳어 있던 시간이다.
그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주변을 모두 삼킬 것 같던 차가운 살의가 가라앉았다.
“후우…….”
누군가 벅차올랐던 숨을 길게 내뱉는다.
그때서야 서서히 등을 돌려 조문영의 두 눈을 마주한 황준우가 웃었다.
“이번 일, 정말 후회하게 될 거야.”
“……범죄자 주제에 오만하군.”
침착을 가장하려 하였지만 목소리가 떨린다.
뒤를 이어, 조문영의 곁에 선 무호를 마주한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네놈의 솜씨냐?”
“어디 건방진 놈이 부장에게!”
무호는 열변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빛살처럼 쏘아진 강기가 무호의 목을 꿰뚫었다.
“끄륵……!”
목에서부터 핏물을 토한 무호의 신형이 무너졌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일격이었다.
“것 참, 제 성을 이기지 못해 죽어 버렸군. 주화입마라도 찾아왔나?”
황준우의 서늘한 음색이 다시 한 번 주변을 뒤덮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분명히 목이 꿰뚫렸다.
문제는 누가 했는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황준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듯으로만 보였다.
범인은 분명했지만, 감히 지목할 엄두가 나지 않는 솜씨다.
모두의 입에서 쓴 신음이 흘렀다.
그들에게 있어 다행히도 더 이상의 죽음은 없었다.
대신하여 웃음을 그린 황준우의 두 눈이 조문영을 향했다.
“다음은 네 차례가 될 수도 있겠지.”
“놈을, 놈을 잡아서 옥에 가두어라!”
짧은 신음을 흘린 조문영의 명령이 떨어졌다.
“내 발로 갈 거야.”
하나 그보다 빨리 나선 황준우의 걸음이 금강각 정문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다.
“다시 보자고. 조문영.”
목소리가 마치 검이라도 된 듯 조문영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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