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0화
제 240화
황준우는 제 발로 지하 감옥을 향했다.
뒤를 따라온 금의위 무인들이 망설이며 그의 손목과 발목에 묵직한 수갑을 채운다.
“서강 정말 자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하던 금의위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죄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심문관이 할 일이다.
평범한 위사에 불과한 그는 불합리함, 의문 등을 모두 묻어 둔 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나 아니야.”
말이 없을 줄 알았던 황준우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그를, 묵묵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본 금의위 위사가 감옥 문을 잠갔다.
쿵-! 철컹.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서늘한 지하의 기온이 황준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로군.”
웃음을 흘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황준우의 눈이 차가운 빛을 흘렸다.
여러모로 진무영에게 당했다.
대다수가 참을 수 있고,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마필의 죽음만은 달랐다.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마 조장…….”
이를 간 황준우의 눈에 살의가 다시 한 번 번뜩인 후 사라졌다.
직접 손을 쓴 흉수인 무호는 죽였다.
하나 뒤에서 움직였을 조문영, 더 위로 가자면 진무영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다.
상대의 발 빠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나 이제부터는 황준우 역시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적이 먼저 패를 보였으니, 이제는 이쪽에서 치고 나갈 차례였다.
때마침 감옥의 두터운 외벽 틈 사이로 적안서가 흘러들어왔다.
“결국 자취를 완전히 감춘 건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읽은 황준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찾았다고 한다면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진무영의 목을 칠 셈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예정대로 황궁부터 정리한다. 사마정에게 전해. 아무래도 ‘그’가 돌아올 때가 된 것 같다고.”
적안서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감옥 밖을 향해 뛰쳐나간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준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옥살이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할 틈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무림맹과 남천맹의 전쟁.’
진무영이 준비해놓을 수 있는 수를 몇 가지 떠올려 본다.
‘열화궁과의 전쟁에서 보았던 초원 전사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위협적인 존재다.
무엇보다 무림인에 비해 전쟁에 익숙하다는 점이 가장 난감했다.
‘그때 보았던 숫자 정도가 전부라면 다행이겠지만…….’
진무영은 늘 상식 이상의 결과를 보이곤 했다.
아마 더 많은 수의 초원 전사, 어쩌면 초원 전체에 그의 영향력이 맞닿아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대병력이 국경을 넘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황제가, 군부가 허락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렇군. 그래서 놈이 황궁을 노렸다.’
황제가 죽고, 어찌 되었든 현재 권력의 중심은 주고치에게로 돌아갔다. 초원 병력의 전체는 안 되더라도, 더 많은 숫자가 국경을 넘어들어올 것이다.
‘이쪽은 확실하다고 봐야 될 것 같아.’
뒤늦게 떠올린 것이 아쉬웠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마 남천맹에 있는 전왕이라면 황준우보다 일찍 이 그림을 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천당가…….”
말한 바 있듯 사천당가의 무인은 극소수다.
하나 독을 사용한다는 장점은 전쟁에 있어 여전히 두려운 힘이었다.
‘진즉 정리했어야 되는데.’
무림에서의 원한은 씨앗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말이다.
진무영이 황준우와 큰 원한이 남은 사천당가를 이용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눈앞에 보이던 적이 셋으로 늘어났다.
“무림맹, 초원전사, 사천당가.”
제법 구색이 나쁘지 않다.
아마 이뿐만이 아니라 숨겨진 병력이 더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나 여전히 남천맹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천맹의 전력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거대하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잘 보일 때가 없어서 그렇지, 제갈세가만 나서도 초원전사들 정도는 꼼짝을 못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말했듯 남천맹에는 만금장이 있다.
그리고 만금장의 힘을 예측하고 있는 이는 황준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남천맹 내에서도 제대로 그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여차하면 곤륜 측에서도 나서겠지.’
가장 큰 변수는 진무영 본인이다.
일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실제 전력을 다한 황준우의 공격을 그만큼이나 피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수준이었다. 아마 현재 강호에서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인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터였다.
‘부맹주가 직접 나서도 백 초식 안에는 승부가 갈릴 거야.’
영악한 적이 무공마저 만만치 않다.
차라리 무식하리만큼 밀어붙이던 마왕 동탁, 그리고 무공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여포가 상대하기 편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놈의 움직임을 쫓아서 옭아매야 하는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황준우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감옥의 철문 건너편으로 두 사람의 기척이 다가왔다.
“제멋대로 나서더니 결국 꼴좋게 됐군.”
먼저 말을 건넨 이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어려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무호를 직접 죽이지 못해 많이 아쉽나 보지, 백균?”
황준우의 물음에 씩씩거리는 음성의 주인, 백균이 철문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제 금의위도 끝이라고 막 나가는 것이냐. 건방진 놈.”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마 조장은…… 내 동료였다.”
“…….”
철문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른 뒤에야, 백균의 깊은 한숨이 퍼졌다.
“후우…… 옳은 말이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도 방치할 녀석이라면…… 화도 나지 않았겠지. 그리고…….”
두터운 철문 너머로까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전해진다.
“고맙다. 어쨌든 내가 못한 일을 네가 해주었네.”
말은 무겁고, 더뎠다.
하나 진심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황준우는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그 마음만은 분명히 전해 받았으니 된 일이다.
“솔직하지 못한 친구를 기다리려니 제법 오래 걸리는군.”
뒤를 이어 적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균의 방문은 예상외였지만, 그가 찾아올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원래 두 사람 사이에는 약속이 있었으니 말이다.
“어때? 알아본 결과는?”
“네 말이 맞더군. 아주 빌어먹게도 말이지.”
적호의 목소리에서도 분노가 느껴졌다.
하나 다소 투정과 같던 백균의 경우와는 그 깊이가 달랐다.
적호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는 듯했다.
“마 조장의 죽음에도 놈이 연관되어 있겠지?”
“확신하고 있어.”
“내가 증거를 찾겠다. 분명 관련된 인물이 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네놈이 이 안에서 나오게 해주마.”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조용하게 있었다고 하여도 황궁 내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금의위 부장이다.
그만한 자신감을 가질 밑천이 있다는 뜻이다.
“기대하지.”
“미리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네가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약속은 지키마.”
“나도 비슷한 마음이지만, 응원하마.”
먼저 말한 적호가 등을 돌리고, 백균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우선이랄 것 없이 멀어진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둘 다 다를 바 없는 수준이군.”
제법 거칠고, 비뚤어진 표현 방식이지만 두 사람 모두 말 만큼 황준우를 싫어하지는 않고 있다. 본론이 따로 있는 척, 이 자리까지 찾아와 상태를 살펴보러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연하지만 황준우 역시 두 사람이 싫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정도(正道)만을 걸어.’
그 바른길은 스스로를 책임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주기도 한다.
황준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획을 떠올리면서도 몇 번이고 마필의 죽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음을 괴롭혔다. 당장에라도 그냥 뛰쳐나가 조문영의 머리를 치고 황궁을 휩쓸어버리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하나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황궁은 존속되어야 한다.’
어찌 됐든 천하를 움직이는 큰 손은 있어야 국가가 유지되는 법이다.
국가를 잃은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가혹할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되었다.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다.’
설령 암계를 풀어가는 일이라 하여도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보니 이 자리도 나쁘지 않군. 또 손님인가.”
황준우의 웃음 섞인 말에, 감옥 너머로 조용히 다가오고 있던 하나의 기척이 몸을 흠칫 떤다.
“……많이 놀랐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놀라게 하려고 몰래 다가온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네가 혹여 상심하고 있을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뿐이다.”
떨리는 음색에 걱정이 가득하다.
“걱정 마. 상처 하나 받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나 황준우야. 알지? 쉽게 무너지지 않아.”
“잘 알지. 알다마다. 나의 벗…… 언제나 그리운 친우여.”
담담한 황준우의 말에 다가온 손님, 주연하의 목소리에도 안도감이 깃들었다.
“사태는 들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이 안에서 꺼내줄 것이니.”
차가운 철문 위로 손을 올린 그녀의 음색은 단단하다.
적호와 비슷한 말이지만, 그 각오가 역시 더 깊게 느껴진다.
“굳이 안 그래도 돼. 알겠지만, 마음먹으면 탈출도 별것 아니라고. 붙잡힌 것도 황준우가 아니라 서강이니 뒤탈도 없을 테고…….”
“황준우든, 서강이든, 그 본질은 변할 것이 없다. 너는 내 벗이다. 누가 감히 나의 벗에게 누명 덮인 죄를 씌운단 말이냐.”
“고집하고는.”
“흠……, 바닥이 많이 차구나.”
짧고 단단한 숨을 내쉰 주연하가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대고 지하 감옥의 바닥에 주저앉는다.
“감옥이니까.”
“그렇지. 감옥이니까.”
무거운 답변과 함께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런 차가운 곳이 쓰일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구나.”
“불가능해.”
“너무 단호하기 그지없는 것 아니냐?”
“알잖아.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네가 설령 황제가 된다 하여도 그 마음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야. 괜한 욕심으로 상처 입지 말란 뜻이지.”
“끙…….”
“귀엽기는. 큭큭.”
“뭐, 뭐가 말이냐?”
“앓는 소리가 강아지 같잖아.”
“가, 감히!”
“어울리지 않는 말과 목소리로 소리쳐봐야 먹히지 않는다고.”
“끙…….”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낸 주연하가 머리를 짚었다. 이후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뒤늦은 후였다.
“큭큭큭.”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얼굴이 붉어진 주연하가 철문을 머리로 가볍게 찧었다.
“안 아파?”
“네가 웃어서 입는 마음의 상처보다는 덜 아프구나.”
“곤란한걸.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닌데.”
“시끄럽다.”
“그런 의미에서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쪽에도 준비해둔 비장의 수가 있거든.”
“일단은 불러들일 생각이긴 한데, 어떤 방향이 가장 좋을까 사형하고 상담 좀 해봐. 지금 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테고, 금의위, 나아가서는 황궁 전체를 정리할 수도 있을 거야.”
조금은 나른하게 앉아 있던 주연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철문을 바라보는 눈에는 빛이 어린다.
“그런 수가 있으면 진즉에 이야기했어야 할 것 아니냐.”
“다소 묵혀둘 필요가 있었거든. 검은 부위를 최대한 캐내려면 말이지.”
“검은 부위를 최대한 캐내기 위해 묵혀둔다라…….”
일리 있는 말이다.
위기 또는 기회라 느낄수록 검은 속내는 더욱 잘 드러나는 법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 검은 속내가 황궁 내부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도려내기가 쉽지 않다.
행동에 나서는 것에도 꽤나 큰 제약이 발생할 터였다.
또한 용기도 필요하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
황궁에 몇이나 있을까?
주연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설마…….”
“짐작했어?”
“대영반이 살아 있구나!”
“정답.”
황준우의 눈에서도 빛이 쏟아져 나왔다.
“조만간, 풍 영감이 돌아올 거야.”
죽은 줄 알았던 풍신의 귀환이다.
황궁에 사막의 용권풍 정도는 우스운 거친 바람이 몰아칠 터였다.
작금의 상황에 있어 그의 귀환이 만들어낼 파장이 얼마나 클지는 굳이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연하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몇 번이고 번쩍였다.
“대영반이 살아 있다.”
마치 주문처럼, 그 단어를 왼 주연하가 철문을 강하게 내리쳤다.
“황준우!”
“뭐야, 놀랐잖아.”
말과 달리 목소리는 침착하다.
오히려 즐기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목적이 검은 부위를 크게 도려내기 위함이었으면 내게 계획이 있다. 굳이 휘를 찾아갈 것도 없다는 뜻이다. 혹시 도와줄 수 있겠느냐?”
“계획?”
어느 쪽이든, 무작정 풍혁기가 돌아오는 것보다는 더 나은 그림일 듯하다.
“한번 들어보자고.”
“내 계획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주연하의 눈에 격동이 휘몰아쳤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고귀한 여인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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