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1화
제 241화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때는 그저 관상용이기만 한 한 떨기 꽃과 같지만, 움직일 때에는 노도처럼 빈틈이 없으며 거칠다.
황궁 내에 퍼진 주연하에 대한 인식이다.
실제로 그녀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또한 막힘이 없어 보였다.
“대영반이 살아 있다.”
짧은 전언에 상궁, 소호와 금화대주 자곡의 두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가 곧 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사실은 어디에도 새어나가서 안 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겠지.”
소호와 자곡이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누군가의 시선을 최대한 가리는 것이다. 소란을 벌여라. 다소 거칠어도 좋다. 최대한 많이 움직여 적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야 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
주연하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입가로 은은한 미소를 그린 주연하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홀로 문화전으로 간다.”
“마마?”
“함께 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경악을 토했다.
문화전은 현재 태자 주고치의 본진이나 다름없다.
따지자면 적진(敵陣)이다.
얼마 전과 같은 과격한 암살 사태가 있었던 만큼 홀로 향할 만한 곳은 결코 아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큰일은 없을 터이니, 두 사람은 내가 맡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하나 마마…….”
검지로 입술을 가린 주연하가 진한 웃음을 보였다.
“알지 않느냐. 소호. 듬직한 나의 친구가 인근에 있다. 누가 감히 나를 해할 수 있단 말이냐?”
“하나 그분은…….”
“어설픈 구속으로 그 친구를 묶어 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마마.”
“대영반의 복귀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를 절단한 주연하가 방문을 나섰다.
“하아…… 마마.”
한숨을 내쉰 소호가 걱정된 시선을 비춘다.
자곡 역시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결국 남은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주고치에게 소식을 전하라 이른 주연하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쓴웃음을 흘렸다.
의문 혹은 경악 또는 분노와 공포, 살의까지, 감정은 여럿이었지만 무엇 하나 곱지는 않다.
마치 수만 개의 검이 그녀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곳을 찾아오는 길이니, 소호가 그토록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변명으로 내세운 황준우가 떠올랐다.
‘정말로 곁에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황준우는 그녀의 곁에 없다.
그리고 소호의 생각과 다르게 황준우는 신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목을 베어버리는 검은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막아서지 못한다.
때문에 소호에게 한 말은 변명이다.
알면서도 이 자리에 왔다.
‘이 싸움은 나의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끝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애초에 황궁이라는 전장에 있어 죽음이 두려워 물러선다면 무엇도 취하지 못할 따름이다.
“들이시라고 합니다.”
주고치를 따르는 상궁의 말에 호위무사들이 경계의 눈빛을 한 채 주연하의 주변을 둘러쌌다.
“병장기를 모두 꺼내놓으시지요.”
차갑게 명령하는 그들의 손길이 주연하의 옷고름을 잡아채려 한다.
“무엄하구나.”
주연하는 망설임 없이 그 손길을 쳐내고 검을 묶고 있던 허리끈을 풀었다.
“내게는 검, 그 외에 무엇도 없다.”
“그것을 어찌 믿으란 말이시오?”
손등을 맞은 이후 살기등등한 기세를 내뿜는 무인의 눈에서 불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믿지 못한다고 하니, 너는 나를 막겠다는 말이냐?”
“전하의 심처에 들이는 일이오. 아무리 황녀라 한들…….”
말이 끝나기도 전 주연하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비늘처럼 돋아났다.
“막아보거라.”
“…….”
정면으로 그 기운을 마주한 무인의 입이 굳게 닫혔다.
“내 이곳을 무사히 나가지는 못할지언정, 결코 곱게 지는 꽃과 같지는 않을 터이니 어디 한번 막아보아라.”
“으음…….”
신음이 흐른다.
“그냥 들이라고 하십니다.”
그사이, 소란을 지켜본 후 빠르게 내궁으로 들어섰던 상궁이 다시 한 번 뛰쳐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설이던 무인은 기다렸다는 듯 길을 비킨다. 주변에 모습을 감추거나 드러낸 채, 긴장의 끈을 당기고 있던 다른 이들 역시 저도 모르게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렸다는 듯, 도도한 걸음으로 문화전 내를 향하는 주연하가 식은땀을 흘리는 무인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내 이름은 주연하다.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무인이 눈을 질끈 감는다.
“따라오시지요.”
이후, 불쾌한 시선을 한 상궁이 그런 주연하를 안내하였다.
“들여라.”
주고치가 업무와 명상을 주로 보는 방문 앞.
상궁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기도 전 주고치의 단호한 음성이 무겁게 떨어졌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고 방 안 한편에 앉아 명상을 취하던 주고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두 눈가 사이는 깊게 패인 채다.
“겁도 없이 호랑이 굴까지 걸어 들어온 게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제정신만 차리면 별 탈이 없다는 말도 있지요.”
“우습지도 않은 말장난을 할 생각이라면 목이나 길게 빼놓아 보거라. 명예롭게 내 직접 내리쳐줄 터이니.”
“정녕 그러실 생각이었다면 이곳까지 들이시지도 않았겠지요.”
“착각하고 있구나. 언제든 취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성급히 얻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주고치가 나른함을 표방한 시선으로 주연하를 노려본다.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살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여유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렴.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
“하면 그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으신 듯하니 제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겠군요.”
“짜증나는군. 이곳까지 찾아온 본론을 말하여라.”
“정녕 제가 폐하의 흉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연하의 말은 직설적이었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또렷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혼탁하게 물든 주고치의 검은 눈동자를 꿰뚫는다.
“하…….”
거친 숨을 토한 주고치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또한 묻어버리려는 듯, 큰 떨림을 보이던 두 눈의 격동은 가라앉을 줄 모르고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 이윽고 주고치의 몸 주변에 어린 것은 커다란 분노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짙은 살의다.
붉은 핏발이 선 흉흉한 눈동자를 비춘 주고치의 입에서는 작은, 하나 무거운 분노가 새어 나왔다.
“감히…… 네년의 그 눈빛은 무슨 의미냐?”
“진실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진실!”
탁상을 박차며 일어난 주고치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벽면에 걸린 장식용 검을 향해 다가간다.
비록 장식용이지만 그 날이 예사롭지 않다.
검을 뽑아 든 주고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당당히 마주 앉은 주연하의 앞에 섰다.
망설임 없이 휘둘러진 검이 주연하의 새하얀 목 끝 앞에 선다.
“진실은 네년이 폐하를, 아바마마를 죽인 흉수란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아니. 진실이다.”
눈동자뿐만이 아니다.
손이, 검 끝이 떨린다.
아무런 말 없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본 주연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고치는 그 움직임을 쫓아 검을 높였다.
두 사람의 신장 차이를 보자면 분명 주고치가 더 우위를 가지고 있다.
하나 어째서인지 검극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높아만진다.
이윽고 주연하의 이마 위, 가장 높은 곳까지 검을 가져간 주고치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익-!”
“전하.”
“시끄럽다!”
“말씀하신 여유를 잊은 듯하십니다.”
“네년이 감히!”
참지 못한 주고치의 검이 거칠게 휘둘러진다.
하나 베는 것은 결국 목이 아니다.
머리를 꿰뚫지도 못한다.
그저 몇 가닥.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낸 주고치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 헉…….”
두 눈가에 핏발을 가득 세운 채 거친 숨을 토하는 주고치를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본 주연하가 입술을 떼었다.
“전하. 진실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펼쳐진 검지는 하늘을 향한다.
“모두의 귀를 막았다고 하여도 저 하늘조차 가릴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우아아악-!”
소리를 내지른 주고치가 곧장 주연하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네깟 년이, 네깟 년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인단 말이냐! 하늘은 정녕 존재하는 것이냐? 땅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느냐? 아니, 아니다. 세상은 오로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이, 내가, 바로 그 정점에 있다. 난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씩씩거리는 콧김을 몇 번이고 내뱉은 주고치가 주연하의 옷깃을 놓았다.
“썩 꺼져라. 조금이라도 더 네 얼굴을 보았다가는 모래성처럼 남은 여유마저 녹아 없어져 버릴지 모르니.”
고개를 끄덕인 주연하가 등을 돌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않은 주고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명상을 취하는 방석으로 향한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고, 곧장이라도 떠날 것 같던 주연하가 시선을 돌려 그 뒷모습을 한 번 더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몇 번이고 더 달싹였지만 입 밖으로 어떠한 음성이 터져 나오지는 못했다.
결국, 고개를 돌린 주연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금 정면을 마주했다.
주연하가 문화전을 향하여 주고치를 만나고 있을 무렵,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길목 사이에서도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네가 전한 소식이 사실이냐? 정말, 대영반이 살아 있다고?”
“사실입니다.”
떨리는 음색은 다소 가늘고 높다. 여인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믿을 만한 소식인 것이냐?”
의문을 표하는 음색은 다소 두텁다.
“확실합니다.”
짧은 대답이지만,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질문을 하는 인물 측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대영반이 궁으로 돌아온다라…… 쯧.”
혀를 찬 두터운 음색의 주인이 다시금 질문을 건넸다.
“정확한 일시와 시기는?”
“그것까지는 아직…….”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야 한다.”
“…….”
“사활을 걸고서라도, 꼭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가 보거라.”
여인이 고개를 주억이고는 멀어진다.
궁녀 복장을 한 그 뒷모습을 차갑게 노려보던 두터운 음색의 주인 역시 어둠을 벗어나 햇빛 아래로 향했다.
짜증과 분노를 가득 담은 이는 금의위 부장 조문영이었다.
“일이 점점 더 꼬이고 있군. 무호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가.”
혼잣말을 거칠게 내뱉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둘러본 조문영이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는 근래 들어 갑작스럽게 생긴 습관이었다. 그날 이후, 어느 순간부터 뜬금없이 목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고 사라진다.
분명 살아 숨 쉬고 있거늘 언제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을 선사했다.
매일 매일의 삶이 가혹했다.
언제나와 같던 여유로운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라져갔다.
감정은 점점 더 예민해져만 가고 있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놈은 지하에 있지 않은가.”
스스로를 달래는 주문을 외운 조문영이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아직은 살아 있다.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또 한 번 섬뜩함을 느낀 조문영의 눈에는 독기가 어렸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또한 정말로 허망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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