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2화
제 242화
문화전을 벗어난 주연하는 곧장 장락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과시하듯 이곳저곳,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건재함을 자랑하듯 뽐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궁의 시선을 모으는 효과를 발휘했다.
일거수일투족.
움직임을 더할수록 따라붙는 시선이 늘어난다.
주연하는 그를 느끼면서도, 즐기기라도 하듯 여유롭게 걸어 장락궁으로 돌아와 곧장 소호를 불렀다.
“저는…… 연유를 모르겠어요.”
주연하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소호가 먼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뗀다.
맑은 눈동자에 빛을 담은 주연하가 은은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차를 한잔 준비해줄 수 있겠느냐?”
여전히 얼굴에 의문을 가득 담은 소호가 입술을 삐죽이고는 머리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다만 이유는 꼭 알려주셔야 합니다.”
“후후.”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린 주연하가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를 듣고 있다 보니 다소 불만이 가득해 보이던 소호의 표정도 삽시간에 풀어졌다.
‘어찌 되었든 마마의 기분이 근래 들어 최고로 좋지 않은가?’
소호의 입장에서야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이 황궁이란 곳이 살얼음판 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불안할 뿐이다.
고민이 가득한 와중에도 차를 달이는 시간에는 오차가 없으며 손길은 막힘이 없다.
“용정차(龍井茶)예요.”
화려한 받침대 위에 차를 반쯤 채운 잔을 놓고 상 위에 올린 소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감겨 있던 주연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소호가 끓인 차는 언제나 향이 좋구나.”
찻잔을 들어 입술 끝에 가져다 댄 후 짧게 숨을 들이쉰 주연하가 말했다.
“아닐 말입니까. 누구 솜씨인데요.”
“후후.”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찻잔을 내려놓기까지 여유롭게 움직이는 주연하를 보고 있던 소호가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의문이 많지만, 또 묻는다고 이야기해주지는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속으로 억누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답답함이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나 그 인내심도 주연하가 찻잔을 한 번 더 들어 올리는 순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정말이지. 마마. 너무 궁금해 죽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갑작스럽게 서신을 전달받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어째서 금화대주를 주시하라 하신 거예요? 설마 금화대주가…….”
말을 내뱉는 소호의 두 눈에 불안감이 어렸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황궁이라는 척박한 환경이 그녀에게 의심을 부여했다.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 환경에, 무엇하나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설령 금화대주가 배신을 했다 한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황궁이란 장소에서는 그리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무얼 그렇게 놀라는 게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 않느냐?”
“예. 예. 제가 직접 봤어요. 금화대주는 마마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금화대를 직접 움직여 동창을 감시하게 했는 걸요.”
“갑작스럽긴 하지만, 동창 입장에서는 그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겠구나.”
동시에 주연하가 움직이기까지 했다.
주고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야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분명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해 더욱 주연하를 주시할 테고 말이다.
“지금 이대로만 잘해줘도…… 아마 대영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어려울 듯 보이던데요.”
소호가 나지막이 깔리는 목소리로 입을 닫았다.
갑작스러운 주연하 진영의 변화에 황자파의 시선이 날카롭게 쏟아지고 있다.
소호가 무얼 하기도 전, 주연하의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사실상 제가 할 일도 없는 상황이었고…… 왜 금화대주를 속이신 건가요?”
“그뿐이더냐?”
소호의 질문에 주연하가 되물어왔다.
“금화대주가 한 일이 그뿐이냐는 말이다.”
추궁과 같은 질문에 소호의 얼굴에 곤혹이 어렸다.
“네. 그 외로는 딱히 별다른 일은…… 아, 향아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키셨어요.”
향아는 장락궁에서 일을 하는 소호의 밑으로 배속된 궁녀 중 한 명의 이름이다.
주연하의 눈에서 안광이 터져 나왔다.
“심부름?”
“예. 한데 대단한 건 아니었고…… 금화대의 옷 세탁을 맡기신 것이라…….”
“세탁이라. 후후.”
웃음을 흘린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마마?”
“금화대주는 이만 되었다. 이제부터는 향아를 주시하도록 해보아라.”
“꼬리를 물고 쫓아가다 보면 종착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저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배움을 뽑자면 그 무엇에도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면 마마께서는 정녕 금화대주를…….”
“아직까지는 믿고 있다. 믿고 싶구나.”
이제는 제법 식은 차를 제법 크게 삼킨 주연하가 웃음을 보였다.
“마마…….”
“그리 안타까운 눈빛으로 볼 필요는 없다. 만천하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질지도 모르는 이가 고작 이 정도 일에 무너져서야 말이 되겠느냐.”
“마마…….”
눈시울을 붉힌 소호가 눈가 끝을 찍어낸다.
“무엇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모든 믿음을 져버린 것 또한 아니지 않느냐.”
“거짓말. 무엇에도 확신을 안 가진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단 하나, 내 마음만은 제외한다는 말을 빼먹었구나.”
마지막 남은 차를 마신 주연하가 활짝 핀 웃음을 보인다.
“이 작은 손은 천하의 그 무엇 하나 함부로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내 마음 하나는 뜻대로 다룰 수 있지 않겠느냐. 때문에 내 마음이 향하는 곳, 원하는 바, 의지(意志)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역시 모르겠습니다.”
검지 끝으로 눈물을 찍은 소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호, 내 마음이 너를 믿고 있다. 아버지와 나의 친구 역시 믿고 있다. 내 의지가 그렇게 말하는구나. 하니 나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믿는다. 설령 이 마음이 말하는 믿음이 잘못되었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웃음을 보이는 주연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때나마 드리웠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거두고 강인하게 본래의 자리를 찾았다.
소호가 알던 그대로, 누구보다 고귀했던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마마.”
또다시 목소리가 젖어 든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소호를 위로하는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하다.
언제까지고 그에 기대 응석을 부리고 싶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마음을 다잡은 소호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좋아요. 그 믿음, 배신하지 않고 힘내서 마마를 돕겠습니다. 정말 전력을 다할 거예요.”
“고맙구나. 하면 눈물이 조금 멈추거든 금화대주를 불러다오.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것이 있구나.”
“말씀하세요, 마마.”
주연하가 입을 열었고, 소호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에 의지가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이보게, 담소청. 왜 아직까지 눈을 뜨시지 않는 겐가?”
정신을 맑게 해주는 향을 피운 방 안.
걱정 가득한 음성을 내뱉는 궁왕, 오칠의 질문에 마주앉은 노인은 길게 늘어진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하나같이 침상에 누워 있는 사내, 진무영을 향해 있는 채였다.
“자네는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찌 아직까지도 이리 조급하기만 한가. 느긋하게 기다리게.”
“하나 자네가 말한 시간에서 벌써 일각이나 더 흐르지 않았나.”
“반 시진 정도는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 않나. 허허, 거 참. 이 친구. 걱정 말게. 그리 쉽게 가실 분이 아니야. 알지 않나? 이분은…….”
“신의(神醫).”
목소리는 다소 거친 오칠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부드럽고 나지막하다.
진무영이 눈을 떴다.
힘겹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무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천하 전체를 뒤져도…… 신의만 한 의사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커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무렴 의심 많은 친우보다는 역시 맹주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긴 수염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듣기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린 담소청이 오칠을 노려본다.
오칠은 다소 기분이 좋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달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담소청의 말대로 진무영은 다시 눈을 떴다. 겉으로 보이는 이상도 크게 없었다.
“음…… 목이 타는군요.”
“그러실 줄 알고 미리 물도 받아왔습니다. 피를 꽤나 쏟으셔서 한동안은 갈증이 지속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부축하는 오칠의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킨 진무영이 단숨에 물 한 동이를 비운다.
“으음…….”
짧은 신음을 흘리며 입가로 흐르는 물을 훔친 진무영의 눈에 점점 더 생기가 진해졌다.
“더 안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양동이 중 또 하나를 들어 올린 담소청의 물음에 진무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갈증은 본래 제 삶의 일부와 같은지라,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나…….”
“걱정 마세요. 직접 챙겨 주신 물은 모두 마시겠습니다.”
“끙…….”
“그보다,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진무영의 시선이 오칠을 향했다.
“말씀하신 것보다 남천맹이 더 빨리 병력을 꾸려 북진했습니다.”
“하면 전장이 이동되었겠군요.”
현재 무림맹 본단은 산서성에 위치해 있었다.
초기 설립 당시, 그 어떤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적 지역을 결정하여 자리 잡은 위치다. 제법 북쪽으로 치우쳐진 위치 탓에 남천맹이 자리 잡은 안휘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미리 준비하여 움직였지만 남천맹의 대응도 어수룩하지 않았다.
맹주인 황준우가 자리를 비운 점을 생각한다면 굉장한 일이었다.
“목표했던 안휘가 아닌, 하남 지역에서 첫 회전이 벌어질 듯합니다그려.”
진무영이 쓰러져있는 동안 계획을 진행시킨 당사자인 만큼 오칠은 입 안에 쓴맛이 감도는 감정을 느꼈다.
“흐음…… 무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네요.”
진무영이 알고 있는 서문지언은 위대한 무인이자, 뛰어난 통치자였다.
하나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의 행동력은 없다.
일견 과감한 듯 보이는 행동에는 대다수 깊은 고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과연, 거대하게 쌓은 모래성 정도일 리가 없겠지요. 내가 너무 당신만을 주시했나 보군요. 후후.’
황준우를 따르는 사람들, 주변에 진무영의 생각보다 더 뛰어난 인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따지자면 그만한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재 또한 몰려드는 법이다.
결국 기대 이상이지만 생각의 범주 바깥은 아니다.
‘눈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겠지요.’
진무영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지독하게 차오르는 마음속 갈증을 달래기 위해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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