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3화
제 243화
“하남, 하남이라. 소림 측 반응은 어떻습니까?”
“십팔나한이 산문을 떠났다고 합니다.”
소림의 수많은 무승(武僧)들 중 고작 열여덟을 내보냈다.
전쟁이라는 큰 틀에서 보자면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하나 결코 얕볼 수는 없었다.
십팔나한은 소림의 최정예 병력이라 볼 수 있는 백팔나한의 일부다.
당연하지만 소림 최정예라 불리는 백팔나한이 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우선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절예 중 무엇 하나라도 소성(小成)을 이룩하는 것이 최소 요건이다. 소림의 무공을 상징하는 만큼, 기본적인 기준조차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하나 단순히 무공만으로는 백팔나한에 들 수 없다.
나한의 이름은 그야말로 소림의 무(武)를 대표하는 상징과 같다.
그런 이름을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만으로 붙여줄 수는 없다.
협동심, 서로에 대한 믿음, 불심(佛心), 덕(德), 소림에 대한 깊은 마음까지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뒤에야 백팔나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십팔나한이라는 이름은 그중에서도 일부, 백팔나한 중 최고로 선별되는 열여덟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칠십이절예 중 최소 두 개의 무공을 소성해야 하며, 한 개의 무공을 대성(大成)하였으며 굳건한 마음으로 누구보다 소림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
덕분에 서로를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십팔나한이 펼치는 나한진(羅漢陣)은 무림 최고의 무공진(武功陣)으로 이름이 드높다.
무림대전 당시, 백팔나한 중에서는 사망자가 상당수 발생했다.
그만큼이나 마왕 동탁이 이끄는 천마신교의 군단은 강력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 십팔나한 중 죽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십팔나한의 강함은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었다.
그런 그들이 소림을 떠났다.
매화검존이 갑작스럽게 잠적한 이후, 무림맹주 위에 새로 이름을 올린 진무영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림사치고는 꽤나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제 앞뜰이 피로 물드는 건 싫다는 뜻이겠지요.”
결국 의도했던 전장을 얻지는 못했지만, 기대 이상의 병력을 얻었다.
하나 오칠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문이지만 나한들보다 앞서 불존이 산문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불존?”
진무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만큼은 정말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달리 묵승이라 불리는 무각대사는 그 입만큼이나 엉덩이 또한 무거웠다. 한번 소림사에 들어간 이상 최소 몇 년, 길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움직였다.
그의 무공이 천하를 아우를 정도로 높다는 사실만을 따지자면 엄청난 원군의 참전이다.
하나 진무영의 심기는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불존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입니다. 어떻게든 그의 위치와, 상태를 확보해두세요.”
“그리하지요.”
오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전사들 측은 어떻습니까?”
“오천이 더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겠지요.”
“황자 측도 입장이 있을 테니까요.”
“됐습니다. 이제 그가 해주어야 할 일은 황궁에서 최대한 오래 버텨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가 제위에 오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칠이 기대감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실제로 현재 궁의 분위기는 주고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진무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황궁에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이미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설령 그런 여러 가지 사유를 넘어 제위를 찾는다고 하여도 이미 망가진 정신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요.”
진무영의 평가는 신랄했다.
그를 보고 있는 오칠의 입장에서는 심장 한편이 섬뜩해지는 일이었다.
‘황자를 수렁으로 밀어 넣은 건 맹주 본인이지 않습니까.’
목 아래로 차오른 말을, 힘겹게 집어삼킨다.
눈앞의 진무영이라는 사내는 결코 선한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악한 것 또한 아니었다.
단지 진무영에게는,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대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무영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맹주는 천재다.’
단순히 무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게는 사람을 다루는 법에서부터, 넓게는 대국을 아우르는 시선, 그를 활용하는 능력까지, 진무영은 그야말로 천하를 운영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다소 무감정한 면은 오히려 중도를 지키기에 좋은 법이다.’
섬뜩하지만, 그만큼 정확하다.
때문에 진무영이 군림하는 무림을 보고 싶었다.
다소 강압적일 수 있으나 절대적인 평화가 유지되리라.
체제가 완성되고 난다면 누군가 아픈 일도, 눈물을 쏟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진무영이라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큰일을 위한 작은 이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지.’
오칠의 관심은 더 이상 주고치에게 남지 않았다.
이미 사용이 다 끝난 패다.
생각 이상의 역할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못해내도 단지 그뿐이었다.
지금은 그보다는 앞을 봐야 할 때였다.
“신의 측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오칠과 닮은 눈동자로 짧은 흔들림을 보였던 담소청이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움직였던 당가가 하남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전장을 선정하여 준비를 시작했다고 전했습니다.”
무림맹, 북방 초원의 전사들, 당가까지.
황준우가 예상했던 범위 내의 이들이 모두 움직였다.
진무영으로서는 다루지 않을 이유가 없던 인물들이다.
꽤나 대병력이 남천맹이라는 공통된 적을 향해 움직였다.
여기에 진무영 본인이 참전할 수 있다면, 황준우가 없는 남천맹을 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만금장이 없었다면 말이지요.’
오래전부터, 진무영은 만금장을 주시했다.
천하제일상가.
단순히 그뿐일까?
승선모임의 초대를 받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소주의 거목은 무거웠다. 진무영의 본능적인 감각이 함부로 밀쳐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경고를 보내왔었다.
한때는 그 이유가 황준우의 존재 탓인 줄로만 알았다.
하나 또 한 번 마음을 정리한 이후, 생각이 뒤바뀌었다.
‘만금장 자체가 위험하다.’
어쩌면 남천맹만큼이나.
그래서는 안 된다. 어지간한 위협을 가하고자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전력(全力)을 쏟았다.
처음으로 인생에 있어 스스로를 위한 목표를 지향하였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남만(南蠻) 측은 어찌 되었습니까?”
“오독궁주(五毒宮主)와 야수궁주(野獸宮主) 역시 거래를 수락했습니다.”
신의의 말에 진무영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오독궁과 야수궁!
세외 남만무림을 지배하는 두 세력이 진무영과 손을 잡았다. 척박한 환경을 해치며 살아남은 그들의 무공은 다소 거칠지만 그 위력만큼은 정종의 무공을 훨씬 압도했다.
“아마 지금쯤 병력이 출발했을 겁니다.”
제법 뒤늦은 합류가 되겠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진무영이 준비한 수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혈사단(血砂團) 역시 사천을 지났다고 합니다.”
남측이 아닌 서쪽, 거친 용권풍이 몰아치는 사막의 무법자들이 중원으로 들어왔다.
일반적인 낭인을 고용하는 것에 비하여 몇 배나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혈사단은 사막무림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포달랍궁과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치르는 도적 집단이었다. 같은 불교 문파인 소림과 다르게 포달랍궁의 무승들은 자비를 모른다. 몇 배는 거칠고 막힘이 없다. 소림의 무승들 중 가장 거친 측에 속하는 나한들이, 포달랍궁의 일반 승려에 비견될 정도라고 하니 그 흉흉함이 어떨지는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포달랍궁의 무승들과 싸워 자그마치 십 년이 넘게 살아남았다.
결국 대세를 뒤엎거나,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어지간한 도적 집단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전력(戰力)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무림맹, 사천당가, 초원의 기마전사들에 이어 세외무림의 오독궁, 야수궁, 혈사단이 합류했다.
언뜻 그려지는 숫자만 삼만을 우습게 넘는다.
‘그리고 적룡채.
수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때를 기다리며 준비해왔다. 엄청난 숫자가 움직이는 만큼 부족할 수 있는 물자와 식량의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된 셈이다.
‘결국 녹림이 빠진 건 아쉽지만…….’
약삭빠른 산왕(山王)이 몸을 먼저 숨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해볼 만하다.
아니, 승리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황준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이라면 말이다.
하나 그 기간을 따진다면 결코 여유롭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내 몸인데…… 아직 내력은 오 할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군요.”
“최대한 기운을 북돋아내려 했으나, 워낙 그릇이 크신 탓에…….”
담소청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소 아쉬울 수 있는 힘이나 움직이는 데 있어 부족함은 없다.
진무영은 웃음을 보이며 걸음을 앞으로 떼었다.
“더 회복하는 것은 움직이면서 해내도 충분합니다. 포문(砲門)을 열었으니 멈춰 있을 때가 아니지요.”
“맹주.”
“갑시다. 신의, 궁왕. 무림이차대전을 열어봅시다.”
무림이차대전!
고작 일 년도 전에 몰아쳤던 혈풍을 뒤덮을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읊은 진무영의 걸음이 무겁게 나아갔다.
“준비는 모두 끝났구나. 이제 남은 것은 내일 밤뿐이다.”
두터운 철문에 몸을 기댄 주연하의 말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내일이라면…….”
“보름달이 뜰 예정이다.”
“음, 확실히 시간 감각이 전혀 없어지는군.”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손등에 얹고 있던 적안서를 바라보았다.
작은 울음을 흘린 적안서가 떠나간다.
“풍 영감한테는 전해질 거야.”
거사를 앞둔 것치고는 너무나 담담하기만 한 목소리에 주연하의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나를 믿고 있느냐?”
“아무렴.”
“실망시킬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지.”
얼마 전, 스스로가 소호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린 주연하가 몸을 떨었다.
“푸하하!”
입가로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응?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아니. 아니다.”
“흐음…….”
“다만…….”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주연하가 속삭이듯 음성을 흘렸다.
“지금 막 네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한 말이다.
하나 조용한, 늦은 밤은 그런 주연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듯했다.
“못 보여줄 것도 없는데. 나갈까?”
“되었다.”
피식 웃은 주연하가 몸을 일으켰다.
아마 고개를 짧게만 끄덕여도 당장 눈앞에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황준우라면 늘 그래왔으니 말이다.
“아직은 조금만 더 참자꾸나.”
“흠…….”
“황준우.”
“나는 네가 참으로 좋다.”
“…….”
짧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만 가보겠다. 할 일이 많으니.”
저벅, 저벅.
멀어지는 주연하의 걸음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 같던 황준우의 입술 역시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도.”
“…….”
잠시, 나아가던 주연하의 걸음이 멈춘다.
“네가 좋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벅, 저벅.
주연하는 또다시 멀어진다.
어느덧, 두 사람의 입가로 닮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