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5화
제 245화
“제기랄!”
욕을 내뱉으며 앞으로 뛰쳐나간 모충기가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검은 강기가 빛나는 양손으로 다급하게 원을 그렸다. 놀랍게도 그 수가 더해갈수록 거세게 몰아치던 여선위의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어, 이내는 완전히 사그라진다.
“현원신공(玄圓神功)은 여전하군.”
웃음을 보인 여선위의 신영이 순식간에 모충기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코앞으로 다가온 주먹을, 다시 한 번 원을 그리며 흩어버린 모충기가 혀를 찼다.
여선위와 모충기가 대립하는 사이, 단숨에 자곡을 제압한 풍혁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되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가는 풍혁기의 무공은 병사들과, 동창의 고수들, 심지어 같은 금의위 무인까지 압도적으로 제압해 나아간다.
‘빌어먹을 금의위 놈들.’
조문영의 뜻에 따라, 상대를 알고 이 자리에 왔음에도 움직임이 굼뜨다. 검을 내뻗는 모습에도 망설임이 훤히 보였다. 압도적인 무공에 휩쓸리자 망설임을 참지 못하고 진영을 이탈하는 이들도 눈에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호신(護身) 하나만큼은 훌륭한 무공이로군. 하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
모충기의 외침을 기다렸다는 듯, 여선위의 주변으로 동창과 금의위 고수들의 무공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떨치기 위하여 여선위의 손에서 기운이 터져 나온 순간에는 모충기의 현원신공이 바르게 힘을 흩어버린다.
정황을 지켜보기만 할 듯 침묵하고 있던 조문영의 검기 역시 풍혁기를 노리며 허공을 날았다.
초승달 모양으로 쏘아진 검기는 마구잡이로 날뛰던 풍혁기를 단숨에 저지했다.
“음…….”
쓴 신음을 흘리며 턱 끝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훔친 풍혁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문영을 향했다.
“아쉽군요. 기회를 잘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뻗었던 검을 회수한 조문영이 안타까움의 웃음을 보였다.
“조문영.”
풍혁기의 시선이 짧은 시간 흔들린다.
무호로부터 암습을 당한 이후, 한동안 풍혁기는 자괴감에 빠졌다.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리라 믿었던 그렇게 이끌어왔던 전우(戰友)가 바로 금의위다. 누구보다 믿었고, 결코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 믿는 이의 검에 등을 찔렸다.
아직까지도 등에서부터 흘러 올라오던 그 차가운 감각을 잊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심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으킨 풍신공이 아니었다면 분명 즉사였다.
무호의 검 끝이 힘겹게나마 심장을 비켜나가게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실상 여선위에게 발견되는 시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입가로는 자연스레 쓴웃음이 흘렀다.
“삶에 미련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정말 억울했겠지. 무호는…….”
“죽었습니다.”
“역시 그런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풍혁기의 음성에 조문영의 눈썹 끝이 떨렸다.
“서강 놈하고는 무슨 관계요?”
“서강? 그리 불리던가? 하하!”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풍혁기의 두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대답을 듣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보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조문영의 몸에서도 강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오랜 시간 몸을 웅크린 채 쌓은 내력은 이미 풍혁기를 넘어섰다.
무공 역시 결코 노쇠해진 풍혁기의 밑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연기처럼 흩어져, 눈앞으로 다가오는 풍혁기를 본 순간에는 생각에 확신이 깃들었다.
“부디 대답을 할 목은 남겨 두실 수 있길 바랍니다!”
조문영의 검에서 다시 한 번 검기가 쏘아졌다.
코앞에서 빠른 보법으로 공격을 피한 풍혁기의 손에서 바람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손속에는 미련이 없다.
이미 오랜 고심 끝에 금의위의 썩은 뿌리를 크게 도려내고자 마음먹고 이 순간만을 위해 참아왔던 차였다. 가장 오래도록 함께 금의위라는 이름을 등에 업은 조문영은 이미 풍혁기의 마음속에서 분명한 적(敵)이 된 것이다.
문제는 조문영의 생각대로, 그의 무공이 어느 순간 풍혁기를 앞섰다는 사실이었다.
거친 손길이 허공을 때렸다.
동시에 거리를 벌린 조문영의 검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였다.
‘세 발.’
쏘아진 검기의 숫자를 보고, 흐름을 따라 피한 풍혁기는 침을 삼켰다.
‘뒷걸음질이 이리 빠르다고?’
특이할 정도로 조문영은 오래 전부터 원거리에서의 전투를 지향했다. 검을 다루지만, 검술보다는 기의 운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탓일 터였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때 그가 부여받은 특성이 발출(發出)인 이유도 한 몫 거들었다.
덕분에 조문영이 검기를 발출하는 솜씨 하나만큼은 오래전부터 금의위 아니, 천하제일이라 보아도 무방했었다.
문제는 그러한 성향을 보조할 만한 무공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무림인들의 경신술이란 어지간한 말보다도 빨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검을 내뻗는다. 그 속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문영 역시 등을 보이고 달아나야만 한다. 이후에야 다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무림인으로서 굉장한 약점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실제 조문영은 기를 다루는 솜씨에 비하여 낮은 실력으로 평가될 때가 많았다.
한데 직전의 조문영은 마치 앞으로 걷듯 경신술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공격까지 가해왔다.
‘놀지는 않았단 거겠지.’
이 상태라면 굳이 감출 것도 없이, 풍혁기가 불리했다.
거리를 좁혀 단숨에 승부를 취하기에는 조문영이 너무 빠르다. 문제는 이곳이 적진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리고 풍혁기의 몸 상태가 분명 예전 같지 않다는 부분이었다. 계속해서 싸우게 된다면 체력적인 면에서 지쳐 쓰러지게 될 터였다.
‘다소 무리를 해야 할지도.’
결심을 한 풍혁기의 눈이 빛났다.
손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 순간에는 두터운 바람의 장벽이 솟아난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풍신공은 특성상 일반적인 무공과 궤를 달리한다.
더 자유롭고, 예리할 수는 있지만 방어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장벽을 세운 것은 그저 잠깐의 찰나를 벌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만들 뿐이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뛰어넘는다.’
아무리 뒷걸음질이 빨라도 결국 앞으로 뛰는 사람보다 더 빠를 수는 없는 법이다.
조문영의 걸음이 유난히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쏟아져 나오는 검기를 피하며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니 일부라도 막고 더 거리를 좁힌다.
생각은 좋았다.
“하앗-!”
바람의 막이 갈라지고, 단숨에 허공으로 날아올라 쏘아지는 검기를 피하며 허공을 세 번이나 박찼을 때까지도 완벽하다 믿었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보인 조문영의 검에서 보랏빛 강기가 길게 솟아 허공을 은하수처럼 수놓는 순간에야 풍혁기는 자신의 자만을 깨달았다.
‘벽을 넘었구나!’
본래부터 조문영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강기를 보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을 터였다.
‘심상지기…….’
발출이라는 특성을 극도로 연마하여, 얇고 넓은 강기의 막을 흩뿌린다. 허공에 떠오른 풍혁기의 입장에서야 그야말로 강기의 호수를 발밑에 둔 것과 다름이 없게 된 셈이다.
이 상태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면 풍혁기의 몸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이것 참…… 정말 나이가 발목을 잡는구먼.’
젊을 때의 풍혁기였다면 여기서 바람을 한 번 더 타 강기의 호수를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을 터였다. 하나 지금의 풍혁기에게는 더 이상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을 만한 여유가 남지 않았다.
쓴웃음과 함께 허탈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실과 같은 은빛 강기가 허공에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폭발이 일었다.
그 순간 일어난 강한 바람에 힘을 더하여 몸을 비튼 풍혁기의 몸이 지면을 밟았다.
또 한 번 사선(死線)에서 살아 돌아온 풍혁기가 한숨을 내쉰다.
시선은 어느덧 병사들이 나열한 성벽 위에 서 굳은 표정으로 손을 내뻗고 있는 여인에게로 닿는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분명 지친 모습인 듯도 했지만,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 황녀 마마!”
풍혁기는 저도 모르게 얕은 감탄을 흘렸다.
기회를 놓친 조문영의 미간은 크게 찌푸려졌다.
“홀로 이곳까지 온 겁니까?”
조문영이 혀를 찼다.
단순히 풍혁기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탓만은 아니었다.
주연하의 죽음도 예정은 되어 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쿨럭.”
창백한 안색의 주연하가 핏물을 쏟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녀는 조화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비교적 위력적인 면에서 약한 발출의 특성을 띤 강기라고는 하나 심상지기와 정면으로 부딪치고서 멀쩡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성벽 위에 남은 병사들 역시 피를 쏟는 주연하를 보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받은 명령에 주연하에 관련된 것은 없었다.
“황녀 마마를 보호하라!”
결국 조문영이 다급히 외쳤다.
“멈춰라!”
그 목소리를 주연하의 묵직한 음성이 짓눌렀다.
조문영의 명령에 따라 걸음을 내딛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혀를 찬 조문영의 입가로는 냉소(冷笑)가 흘렀다.
“헛된 생각하지 마시지요. 대영반과 위휘봉선, 둘 중 누구도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조문영은 여기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지친 풍혁기를 지나쳐 여선위를 가리켰다.
모충기의 현원신공은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공이었다. 패도적인 여선위조차 그를 압도하지 못해내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오히려 주변에서 이어진 동창 고수들과, 금의위, 병사들, 심지어 주연하가 믿고 있던 금화대주 자곡의 합공에 여선위의 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풍혁기와 여선위 두 고수의 실력은 대단하지만 이미 성패는 갈렸다고 볼 수 있는 상황.
홀로 도착한 주연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때문에 이 자리의 모두가 귓가로 들려오는 묵직한 걸음 소리를 외면했다.
더 이상 황궁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주고치의 밑에 모여들어 이 자리에 섰다.
남아 있는 이들이라고 하여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누가 혼자라고 하였느냐?”
하나 주연하는 그를 부정한다.
몸을 떨치며 다시금 굳건히 두 다리로 선 주연하의 시선이 몰려든 병사들 너머를 향했다.
저 멀리서 또 다른 깃발을 든 병사들이 황성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시선을 크게 돌려 다가오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솟은 기수를 본 이후에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영왕……! 번왕을 이곳까지 불러들이다니 반역이라도 할 셈인가? 주연하!”
으득, 이를 간 조문영의 시선이 주연하를 향한다.
“네놈이야말로 제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조문영. 감히 황족을 능멸하다니, 삼족멸문지화를 당하고 싶은 게냐!?”
차가운 달빛 아래 싸늘한 목소리로 크게 호령한 주연하의 손이 길게 내저어진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음성에는 부상자의 것이라 볼 수 없는 큰 힘이 실려 있었다.
“다들 무기를 버려라! 거짓에 속지 말고, 헛된 탐욕에 지지 말지어다. 모두의 눈을 가린다 하여도 저 하늘이……!”
팔을 길게 뻗은 검지가 달이 뜬 밤하늘을 가리킨다.
“오늘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줄 것이니, 거듭 말해 무기를 버려라!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서로가 아니지 않느냐!”
하늘을 칭하며 울부짖은 덕일까?
타다다당-!
병장기가 바닥을 때리며 천둥소리를 자아냈다.
“아아…….”
탄식을 흘린 조문영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한참 여선위를 몰아치던 모충기도 당황하여 몸을 떨었다.
그런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주연하가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명심하라.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은 욕심으로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에게 고난을 전파할 간신, 악인들이니 오늘 밤, 하늘의 정의가 그들을 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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