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8화
제 248화
장락궁의 지붕 위.
떨어지는 빗물이 머리에 닿는 것을 느낀 순간 황준우가 입을 열었다.
“차갑네.”
홀로 지붕 위에 서 있기에 대답을 돌려주는 인물은 없었다.
하나 지붕 아래, 대지를 딛고 선 이들 대다수가 그와 같은 심경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근래 과격한 행보를 몇 번 보이기는 했지만 본래 주고치란 인물은 그리 독한 성정을 가진 편이 못 되었다. 온순하고, 학문을 즐기며, 인의(人義)를 알았다. 때문에 주연하가 뛰어난 위엄을 뽐내도 언제나 주고치의 곁에 사람이 머물렀던 것이다. 죽은 황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수록 더욱, 주고치의 인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런 그가 무너졌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조희연의 어깨를 부여잡은 그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빗물은 그의 눈물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정말로 제 손으로 황제를 죽인 건가?’
황준우는 명확한 진실을 몰랐다.
다만 추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만약을 떠올렸을 뿐임에도 작금 주고치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본래 따뜻한 성정을 가진 그가 제 손으로 황제, 아버지를 죽였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달프고 복잡하였겠는가? 매일 밤 악몽을 헤맸을 것이며 남모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을 터였다.
조희연의 손에 들린 일기장은 주고치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업보이며, 스스로를 위한 속죄이기도 할 터였다.
때문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스스로를 내던졌다.
업보가 세상에 나왔으니 스스로 행하던 속죄는 모두의 것으로 변하였다.
벌을 받아서라도 마음을 편히 놓고 싶음이라.
‘따지자면 악인은 될 수 없었겠지.’
주고치란 인물은 성세(盛世)에 자랐으면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 터였다.
때문에 혼란 속에서도 그를 신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이리도 많다.
아직까지 주고치를 믿고,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기운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졌다.
하나 한 번 무너진 주고치가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결국 그의 성정은 복잡한 난세(亂世)와는 맞지 않았다.
순하고 여린 마음으로는 혹독한 세상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주연하가 황녀로 책봉되고, 황제가 그녀를 신임하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째서 황제는 굳이 혼란을 만들어낸 거지?’
주고치를 전혀 몰랐을 때라면 모를까, 그에 대해 조사하고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은 의문이 생겨났다.
거듭 말해 주고치의 성정은 성세의 군주로 부족함이 없다. 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새로운 황권 후보를 만들어 황궁을 지금과 같이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체 왜…….’
죽은 황제는 꽤나 과격한 방식으로 권좌에 오른 인물이라 들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만으로는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황자는 어째서 변모한 거지?’
따뜻하고 유한 성정의 주고치가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
단순히 황제가 무서워서는 아닐 터였다.
다행히 이쪽은 추측이 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진무영 놈과 연관이 있는가?’
무슨 수단으로 주고치를 저렇게 무너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의 입김이 있었다.
“생각할수록 좋아할 수 없는 녀석이야.”
고개를 내저은 황준우가 혀를 찰 때였다.
황준우의 기감에 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보니 태화전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중이다. 황준우는 이미 이와 같은 기운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마기(魔氣)?”
내공이 관련된 마기와는 또 다른 종류다.
마술사 또는 유계의 마왕이 보이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기운.
장량의 최후로 더 이상은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기운이다.
“이거 어째…… 느낌이 좋지 않은데?”
얼굴을 굳힌 황준우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무너진 주고치를 바라보는 주연하의 눈빛은 담담했다.
쏟아지는 빗물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시선이다.
‘황제 폐하를 정말 많이 닮았구나.’
그 옆모습을 바라본 풍혁기가 짧은 신음을 삼켰다.
어찌 되었든 피를 조금이나마 나눈 남매의 고통이다. 그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왕조차도 담담히 지켜보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렸건만 주연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무섭군.’
황궁이 올바르지 않은 길을 향하는 것을 볼 수 없어 그녀의 곁에 섰지만, 심장 한편이 섬뜩해졌다. 언젠가 오늘을 후회할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란 그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근래 들어 많이도 겪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마마…….”
그런 주연하의 곁에 선 소호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흘린다.
이후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다.
“괜찮다.”
주연하가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기에 볼가를 향하던 손길은 멈추었지만 그로 인해 풍혁기는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빗물이 아니었던가?’
서늘할 정도의 차가운 분위기에 의식하지 못하였거늘, 자세히 보니 볼가로 흐르는 것이 단순한 빗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차갑기만 해 보이던 그녀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무겁게 전해져왔다.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심지어 쏟아지는 빗소리에 파묻히니 황궁제일고수라는 이름을 자랑하는 풍혁기조차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닮았지만 또 다른 것인가.’
동시에 풍혁기는 옅은 안도의 웃음을 짓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실 죽은 황제는 다소 잔인하였고, 말년에 와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명이라는 제국에 있어 훌륭한 군주였다. 힘이 있었으며 국가를 이끌 위엄이 있었고, 국정 운영에도 능숙함을 발휘했다. 단순히 무력만으로 국가를 통치하지 않으려 하였다는 것도 대단한 사실이었다.
하나 역시, 너무나 강경했다.
지금도 죽은 황제를 떠올리면 공포라는 단어를 먼저 되새기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새로운 황제는 다소 힘을 풀어줄 인물일 필요가 있다.
주연하가 어떠한 길을 걸을지는 모르나, 피를 나눈 이의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마모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죽은 황제와는 다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제 그만 끝을 내야겠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물 속, 다시 한 번 혼잣말을 내뱉으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주연하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무너져 내려 조희연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주고치의 시선이 점점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탁하게 풀린 그의 시선은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했다.
“나를…….”
쏴아아-!
짧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빗소리에 가려 주연하에게 닿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부탁이니 제발 나를…….”
주고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주연하의 귓가에 주고치의 목소리가 닿았다.
때문에 조금 더 가까이, 빠른 걸음으로 주고치의 앞에 다가간 주연하가 귀를 기울였다.
“전하.”
주고치를 부른다.
고개를 들어 눈물을 쏟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부탁이니 제발 나를 용서해주게. 그리고…… 죽여다오.”
천둥이 주고치의 목소리를 묻었다.
하나 주연하의 귀에는 분명히 그 의지가 전해졌다.
“하아…….”
한숨을 내쉰 주연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번쩍이는 은빛 날이 밤하늘에도 유난한 빛을 내뿜는다.
주변에 모여들어 정황을 지켜보던 이들 사이로 소란이 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설마 아무런 근거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갑작스럽게 주고치가 무너졌지만,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어디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아직 주연하에게는 주고치의 목을 칠 권리가 없다.
하나 한 번 뽑힌 검은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고맙다.”
꽤나 슬퍼 보이는 웃음을 보인 주고치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숙인다.
번쩍이는 은빛 날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툭-! 퉁!
검이 바닥을 때리는 순간 짙고 검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눈을 감고, 고통을 떠올리던 주고치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감히!”
“아무리 황녀 마마라고는 하나……!”
주변에서 분노의 감정이 마구잡이로 치솟았다.
주고치가 죽지는 않았다.
하나 쓰고 있던 감투와 함께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우습게 볼 일은 아니었다.
그 역시 주연하가 함부로 내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탓이다.
“이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소란 속에서도 주연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주고치의 귓가에 선명히 닿았다.
고개를 들어 주연하를 마주한 주고치의 눈빛이 크게 떨린다.
“어째서……?”
“…….”
“나는……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 지금이 힘들다면 다시 부탁하니 필요에 의한 일이 끝난 이후에라도 내 목을 직접…….”
“아닙니다.”
주연하가 고개를 내젓는다.
“속죄의 방법이 죽음에만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하나…….”
“하늘에 계신 폐하께서 과연 전하의 죽음을 바라리라 생각하십니까? 정녕 생을 포기하는 것만이 속죄라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
그 말에 문득 어깨에 얹어지던 죽은 황제의 손길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흐릿하게나마 웃음 짓고 있던 눈빛이 생생했다.
죽은 황제 역시 아버지였으며, 주고치는 아들이었다.
“크흑…… 크흐흑!”
결국 참지 못한 주고치의 구슬픈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으로 고개 숙인 이후에 울음은 오열이 되었다.
“으아아!”
쏟아져 나오는 슬픔이 주연하를 넘어 주변에 모인 모두에게 전해졌다.
“으허엉!”
제 머리를 딱딱한 바닥에 찧는 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동시에 진실을 아는 이, 모르는 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는 주연하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아…….”
입가로는 저도 모르게 짙은 신음이 흘렀다.
속내 한편이 너무나 답답하여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을 무렵.
콰아앙-!
거대한 화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무슨 판단을 더 하기도 전 빗물조차 무시한 엄청난 폭발이 그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에 거대한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솟아나는 검은 기운을 쫓아 움직인 황준우는 태화전의 지하로 숨어든 모충기와 조문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지?’
그들이 마주하고 선, 검고 거대한 산을 본 순간에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섣부르게 그 용도가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하나 마음 한편의 경종은 크게 울렸다.
아주 위험하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하나 생각보다 두 사람의 행동이 빨랐다.
검은 산의 어딘가에 불이 붙고, 거대한 화염이 눈앞으로 솟구쳤다.
“크하하!”
“푸하하!”
죽어가는 와중에 전해진 광소가 귓가에 닿았다 싶은 순간 황준우의 눈앞으로도 붉고 검은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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