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9화
제 249화
갑작스럽게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세상을 뒤덮을 듯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눈앞이 붉고 검다는 생각 외에 영문을 표할 겨를도 없었다.
“으아, 으아아아!”
“부, 불이다!”
뒤늦게야 커다란 비명과 함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눈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손길에 제자리에서 쓰러져 오줌을 지리는 이들도 나타났다.
순식간에 관료, 병사,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빠른 행동이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자, 잠깐만!”
“아악, 내 다리!”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또 다른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다들 진정해라!
그 순간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인파의 중심으로 뛰어든 주연하가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저 화마(火魔)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진정하고 주변의 동료와 부상자들을 먼저 수습하라!”
주연하의 다급한 말에, 그제야 눈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화염 기둥이 움직임을 멈춘 것을 인지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치솟은 불기둥이 이글거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면서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어, 어째서?”
“기적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에 자연스레 경악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제자리에 무릎 꿇은 채 원시천존과 부처를 찾으며 고개를 조아리곤 했다. 하늘의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공경심마저 느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 언제까지고 지켜만 보고 있을 상황 또한 아니었다.
“움직여라! 기적은 영원하지 않다!”
주연하의 우렁찬 한마디는 잠시 환상에라도 빠져든 듯했던 모두의 머릿속에 이성을 되돌려 놓았다.
“부상자를 먼저 추려라!”
“침착하게 줄지어 물러난다!”
갑작스럽게 닥친 충격적인 상황에 다소 중구난방이던 상황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주연하의 일갈이 충격에 빠진 모두의 정신을 되돌린 것이다.
당황스럽던 상황은 그렇게 일차적으로 정리되고 있는 듯했다.
하나 아직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직도 물러나는 이들의 등 뒤에는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은 채 기세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적이 끝나는 순간, 달아나는 모두가 한 줌 잿더미가 되어 흙으로 녹아내릴 터였다.
‘최대한 빨리, 하나 조급해서는 아니 된다.’
다행히 장소는 황궁이었다.
또한 모인 이들은 대다수가 정예 병사들이다. 충격이 가신 순간부터 행동, 걸음 모두가 빨랐다.
그래도 혹시 모를 혼란을 걱정한 주연하의 시선은 연신 주변을 훑는다. 이런 상황일수록 작은 문제가 곧 커다랗게 번져 버리곤 하니 말이다.
실제로 물러나는 병사들 사이, 사이에서 작은 문제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하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주연하만이 작금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왕 주윤호를 따르는 이들을 비롯하여 풍혁기, 여선휘 등 사람을 이끌어본 경험과 재능이 많은 이들이 소란을 수습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시작은…… 태화전으로부터인가.”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거대한 화마를 마주한 주연하의 눈 끝이 떨렸다.
모두에게는 기적이라고 설파하였지만 속생각은 달랐다.
‘네가 그곳에 있는 거냐? 황준우.’
눈앞으로 흐릿한 형태로 웃음 짓고 있는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디…… 무사해야 한다.”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겼다.
높이 치솟은 화마의 중심.
몸의 주변으로 바람의 기운을 흐르게 하여 다가오는 불길을 밀어낸 황준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이상할 만큼 불하고 인연이 많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연(惡緣)이다.
공통점을 뽑자면 둘 중 쉬운 측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열화궁주 오태악의 불은 끈질겼으며, 이번 화약의 폭발은 위력적이었다. 찰나의 순간 펼친 풍막의 변형 형태가 아니었다면 황준우조차 손 쓸 틈새 없이 한 줌 재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것 때문에 더 난감해졌지.’
풍막을 이용해 바람의 기운을 흘려 화마를 밀어낸다.
순식간에 생각해 낸 발상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 장소가 황궁이었으며, 바깥쪽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다 죽일 뻔했어.’
지금도 화마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는 무수히 많은 기운들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이라 한들 그 숫자가 적지 않다.
아무리 한때 일만 무인과 대적하였던 황준우라 하여도 그들 모두의 죽음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주연하를 비롯하여 여선휘, 풍혁기, 백균, 적호 등도 있었다.
누구 하나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들이다.
때문에 다급하게 온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지기를 있는 힘껏 모았다.
다행인 점은 바깥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기(水氣)는 충분히 많았고, 기운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운을 이용해 계속해서 번져나가는 화마를 묶어두는 일이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역시 팔괘술이었다.
‘수벽(水壁)의 술.’
꾸준한 노력으로 팔괘술이 제법 늘었지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술법을 펼치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다. 하나 상황은 그를 황준우에게 강요했고, 결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할 뻔한 상황에서 아슬아슬한 간격으로나마 수벽의 술을 완성하여 모두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계는 위험하지만, 결국 사람을 성장시킨단 말이지.’
꾸준하지만 다소 더딘 성장을 보였던 팔괘술도 이로써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무공으로 치자면 소성(小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터였다.
‘칠무 중 오무(五武)가 채워졌어.’
천조칠무.
하늘마저 한 손에 쥐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만들었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던 무공의 다섯 번째 조각이 맞춰졌다.
고민 끝에 익힌 술법이 결국 정답이었던 셈이다.
자연스럽게 막혀있던 천조신공의 벽도 뚫렸다.
‘칠단공에 들어섰어.’
그로 인해 황준우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자연지기의 총 양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미 자연지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져 쓰는 만큼 곧장 채울 수 있는 경지에 닿은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이 총량의 증가가 곧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증가와 같았다.
이 상태면 몇 자루의 검을 든 채로 어검술을 펼치며, 동시에 또 다른 손으로 팔괘술을 해낼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진짜 될 것 같은데?’
본래라면 사람들이 모두 물러날 때까지 최대한 수벽의 술을 펼친 채 버티려고 하던 황준우의 생각이 바뀌었다. 다급하고 당황스러운 사태에 이어 성장을 맞이한 터라 실감하지 못하였는데,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다.
“우선 여유를 조금 더 둬볼까.”
몸 주변을 두른 풍막과, 수벽의 술에 사용하던 자연지기의 일부를 조금씩 되돌리기 시작한 황준우의 시선이 점점 가늘어졌다.
‘역시 여유가 넘치네.’
힘을 꽤나 물리고 있음에도 수벽의 술은 여전히 굳건하였다.
오히려 과한 자연지기에 흔들리던 형태가 더 단단하게 굳어지는 느낌도 있었다.
‘술법에도 과한 힘은 좋지 않다는 건가?’
때로는 과한 것이 덜한 것만 못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체감한 황준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꽤나 많은 자연지기를 한 번에 되돌린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스르릉-!
시선을 따라 허공으로 솟아오른 수왕검이 울음을 토했다.
기다렸다는 듯한 울음에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참느라 꽤나 힘들었나 보구나.”
수왕검이 답변을 하듯 화답한다.
‘그러고 보니 수왕검에서 느껴지는 의지도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처음 잡았을 때는 그저 예리하기만 하던 날 역시 이제 와서 언뜻 보면 그저 뭉툭하게도 보였다. 하나 이렇게 마음먹고 뽑아 들면 부족함 없는 아니, 오히려 일전에 비하여 훨씬 더 예리한 날을 뽐낸다.
이쯤 되면 단순히 잘 만들어진 검이라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정황상 주인, 황준우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고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만금장에 돌아가면 오랜만에 만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수왕검에 이어, 서강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하여 예비로 챙긴 두 번째 검이 뽑혀져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명검은 아니었다.
동네 대장간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철검이다.
그래서인지 의사 표현과 같은 떨림은 없었다.
하나 검의 의지는 분명히 느껴졌다.
놀랍게도 검은 설레하고 있었다.
수왕검과 마찬가지로 때를 기다렸다는 듯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을 사용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검에도 생명이 있구나.’
그를 이제야 느낀 황준우는 깜짝 놀랐다.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아마 한 번 정도가 한계일 거야. 괜찮겠어?”
무명검(無名劍)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나 느껴지는 의지만큼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 순간, 자신을 선택한 검주(劍主)의 힘을 머금고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고자 한다.
짧은 순간이나마 검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겪어 보고자 외친다.
“좋아.”
그 완곡한 의지를 전달받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시선은 수왕검과 무명검.
두 자루 검을 동시에 머금는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또 다른 팔괘술을 시전한다.
감괘를 짚어내고 수왕검에 새기는 행동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물을 머금은 수왕검의 날이 날카로운 이빨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수룡이 아니야.”
그를 잠시 제지한 황준우의 손이 또 한 번 움직였다.
“손괘(巽卦).”
바람을 머금은 팔괘를 든 황준우의 손이 이번엔 무명검을 지정했다.
쩌어엉-!
팔괘와 맞닿은 순간 커다란 공명을 토한 무명검은 이번에야말로 정녕 울림을 쏟아냈다.
고오오-!
마치 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은 소리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두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가자. 이번에는 물과 바람의 춤이다.”
황준우의 시선이 두 자루 검을 머금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 올린 한 손은 허공을 빠르게 원형으로 휘감는다.
그 움직임을 따라 푸른빛을 띤 수왕검과, 회백색의 무명검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서로를 쫓아 수직으로 연결된다.
그 움직임의 시작은 작았으나, 결코 미약하지만은 않았다.
고오오-!
무명검의 울음과 함께 수왕검으로부터 피어오른 물이 하나의 기둥으로 솟아났다. 이내 그 움직임은 거칠어지고, 거대해져 간다.
콰아아아-!
순식간에 화마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거대하게 회전하는 물의 폭풍이다.
촤아악-!
물의 바람이 화마를 찢고 덮어내며 세상을 회백색과 푸른 빛으로 뒤덮는다.
쿠오오-!
거칠게 힘을 불려가던 화마가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시선으로 화마의 붕괴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지금.”
작은 한 마디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화마를 가두고 있던 수벽의 술이 흩어졌다.
다시금 되돌아온 그 힘은 수왕검과 무명검의 회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푸른, 또한 회백색의 광명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촤아악-!
화마가 찢어지며 비를 쏟아내고 있는 어두운 풍경이 펼쳐졌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물줄기는 한 마리 용과 같은 형태가 되어 하늘을 뚫고 올라가 빛이 되어 다시금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다.
쏴아아아-!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와, 머리를 때리는 차가운 감촉을 다시금 마주한 황준우는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솟아오른 검은 두 자루였지만 쏟아지는 빗줄기를 따라 되돌아온 것은 수왕검뿐이다.
최선을 다하여 검으로서의 생명을 불태운 후 회백색 또는 은빛 가루가 되어 흩어진 무명검의 흔적은 빗물에 섞여 쏟아져 내렸다.
“후우…….”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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