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50화
제 250화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던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물의 폭풍에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다.
“기적…….”
주연하가 말했듯, 그야말로 기적이다.
세상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싶은 순간 걸음을 멈춘 이들이 목격한 광경은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거대한 화염 기둥이 보란 듯이 생사의 경계에서 멈추었고, 이내 거대한 물 폭풍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다.
“저, 저기 사람이……!”
“하늘에 사람이 떠 있어!”
누군가 그러한 기적의 한복판에 유유히 서 있는 황준우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질을 했고, 뒤늦게 그를 따른 이들이 경악을 토했다.
“황준우…….”
꽤나 먼 거리였지만 명확하게 황준우를 인식한 주연하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무사했구나.”
입가로는 은은한 미소가 어린다.
“저자가 남천맹의 무신인가?”
풍혁기가 떨리는 음성을 흘렸다.
정황을 보니 거대한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은 황준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인 탓이다.
‘무신이라더니 정녕…….’
모두의 경악을 한 몸에 받은 상태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황준우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느낀 순간,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기적을 목격한 모두가 제 눈을 비볐다.
분명 사람을 보았는데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마치 헛것 혹은 유령을 보았다는 듯 말이다.
“꽤나 시선을 끌어버렸네.”
주연하의 뒤편,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황준우가 말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찾아 헤매던 주연하가 깜짝 놀라며 옅은 웃음을 보였다.
“놀랐지 않느냐.”
“너무 시선이 집중되는 건 바라지 않아서.”
웃음을 흘린 황준우의 뒤로 거대한 기척이 다가왔다.
“소장주.”
시선을 돌려 그를 부르는 이를 목격한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대표두.”
두 사내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본다.
이내는 황준우의 양팔이 여선위의 거대한 덩치를 뒤덮었다.
늘 입고 다니는 두터운 갑주를 두드리는 손길에는 안도가 깃들어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로.”
“걱정해주신 덕입니다.”
여선위가 웃음을 짓는다.
장량에게 당하여 생사의 경계를 넘은 후, 구해준 사람들로부터 황석후와 황준우가 그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뻤다.
황석후와 황준우.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두 부자가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동해를 한참이나 헤맸다.
이대(二代)에 걸쳐 충성을 다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마음에 충족감이 차올랐다.
믿었던 이들에게 전장에서 버려졌던 과거와는 달랐다.
끝까지 그를 믿어주고 생각해주는 이들이 있다.
별것 아닌 그 작은 사실이 여선위를 또 한 번 감동하게 한 것이다.
때문에 황석후를 만난 직후, 황준우를 보고 감사를 표하고자 북경까지 찾아왔다.
황준우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덕분에 황준우에게 제법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황궁에 큰 도움이 될 풍혁기의 목숨을 지옥의 간극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이로구나. 나를 기억하겠느냐?”
두 사람의 재회를 묵묵히 지켜보던 이들 중, 또 한 사람이 나섰다.
평온한 얼굴을 한 그는 황준우의 기억 속에서도 어렴풋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쉽게 잊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렴요. 영왕 전하 아니십니까?”
주윤호를 향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작게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에 여선위가 깜짝 놀랐다.
만약 이 자리에 황준우를 잘 아는 다른 인물, 경호 혹은 홍산이나 전왕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더욱 놀랐을 터였다.
황준우가 누군가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며 공대를 하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 대상이 영왕 주윤호라면 이해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황석후의 몇 없는 친우이자 주연하의 아버지.
아무리 제멋대로인 황준우라고 하여도 마냥 오만하게 대할 상대는 아니었다.
“후후. 해후의 반가움도 좋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이 많은 듯하니 조금만 미루자꾸나.”
아닌 게 아니라, 아직까지 사라진 황준우를 찾아 헤매며 혼돈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
약삭빠른 이들 중 몇몇은 사건이 지나간 직후부터 남은 또 다른 문제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무너져있는 주고치와, 당당히 선 주연하.
지독하게 이어지던 황위 다툼의 대세가 어디로 기울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 그들이 움직이기 전 상황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음……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웃음을 보인 시선이 주연하를 향한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황궁에서 황준우에게 바랐던 일은 모두 끝났다.
오히려 큰 구원을 얻었다.
만약 황준우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또한 그녀 역시 대충이지만 황준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무림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언제까지고 황궁에 발목이 잡혀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또 보자.”
짧은 말을 남긴 황준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풍혁기를 향했다.
그를 바라보는 가는 시선에는 경계가 가득하다.
의문이 많을 것이다.
천조회의 이름으로 그를 지원한 남천맹의 무신이 서강으로 해나간 일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뭐 그 부분까지 내가 설명해줄 필요는 없고.’
또 한 번 시선이 움직였다.
꽤나 먼 곳에서 묘한 시선으로 황준우를 보는 백균과 적호가 보인다.
황준우를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알 수 없는 기시감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인이란 기본적으로 대다수 감이 좋은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이번 일이 완전히 정리되고 나면 확신에 찬 짐작을 하게 될 수도 있을 터다.
‘그때 다시 대화를 나누면 되겠지.’
어쩐지 짧게 끝날 것만 같은 인연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면 전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주윤호를 바라본 황준우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내 친구에게도 소식을 전해주게.”
“꼭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황준우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연하에게 닿는다.
더 이상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주억일 뿐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라…….’
참으로 끝까지 굳건한 멋진 친구다.
‘아니, 멋있는 여자지. 아름답고.’
사실 할 말은 많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다.
하나 아직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꼭…….’
제자리에서 걸음을 뗀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저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를 따라 여선위 역시 사라진다.
잠시 아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흔적을 쫓던 주연하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번 만남으로…….’
대신하여 말하였듯, 스스로의 길을 간다.
정면을 위시한 주연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어서 소리쳤다.
“기적은 천의(天意)가 아직 황실에 남아 있다는 증거일지니! 분명 하늘의 신선이 우리를 도왔음이라.”
다소 거친 외침에 혼란스럽던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녕 신선이……?”
“하늘은 대명을 저버리지 않았는가!”
하룻밤 사이 뒤흔들렸던 황궁의 행태에 찾아온 커다란 화마는 하늘이 그들을 꾸짖는 천벌과 같았다. 하나 꾸짖음은 그저 목소리로 그치고 말았다. 기적이 찾아왔고, 모두가 살아남았다.
주연하의 말대로 천의가 아직 궁에 남아 있을 때야말로 기회다.
“다시금 올바른 황실의 기틀을 다져야 할 때다.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다 함께 힘을 내야 할 때다.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대명의 백성들이다.”
주연하의 마지막 한 마디가 모두에게 깊숙이 박혀 들었다.
아직 대명은 건재하다.
또한 그들 모두가 대명의 백성이었다.
곧장 궁을 떠날 듯 사라진 황준우의 신형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곳은 태화전이 위치해 있던, 불에 타버려 흔적도 남지 않은 벌판 위였다.
그 주변을 한참이나 가는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짧게 혀를 찬다.
“벌써 멀리도 도망쳤군.”
천조칠무의 오무가 완성되고 천조신공이 칠단공에 이른 덕일까?
주고치의 근처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그리 강력하지는 않으나, 기척을 감추는 실력만큼은 단연코 황준우가 보았던 인물들 중에서 제일이다.
“도망가는 솜씨도 보통이 아닌데. 아무래도 보패를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진 흔적을 더듬은 황준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도 쫓을 수 있겠어.’
칠단공에 이른 황준우의 시선은 이제 기의 흐름을 명확히 읽어 내고 있었다. 다른 흔적은 감쪽같이 숨겼지만 생물인 이상 머금고 있는 기운마저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라면 오히려 그 탓에 눈에 밟히기 시작한 또 다른 기운이다.
‘명확한 마기.’
그것도 쫓기듯 도주한 기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깊이가 느껴지는 마기다.
태화전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나왔던 마기도 엄청났지만,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천마 용중호 혹은 장량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나 마왕 동탁에 비하자면 또 그 양이 부족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보다 더 은밀하고, 깊다.
두터운 마기를 엷게 퍼트려 황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신비한 점을 뽑자면 장락궁에만큼은 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보이는 궁 주변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푸른빛 장막이 마기의 침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상태인 탓이다.
‘저건 사형이 한 거겠지?’
새삼 제갈휘의 몸속에 의아할 정도로 깊게 쌓여 있던 탁기가 이해가 되었다.
마기의 주인이 제갈휘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혹은 장락궁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갈휘가 희생을 자처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불쾌하네.”
싸늘한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시선이 좌측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수왕검이 화살처럼 날아 빈 허공을 꿰뚫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허공 한편에 자욱한 어둠의 안개가 핏물 번지듯 피어났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노인이다.
“크헉!”
제자리에서 무너지고는 눈에 붉은 핏발을 세우며 핏물을 쏟아내는 노인의 몸은 곧 죽을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그 앞으로 다가가 수왕검을 뽑아 든 황준우의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이건 뭐하자는 장난이지?”
“크흐으…… 자네는…….”
“계집이 사내 흉내를 내는 것도 일종의 술법인가? 아니면 환각?”
노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어진 황준우의 말에, 노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많이 다치지도 않았잖아.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서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빛살처럼 번쩍인 수왕검이 노인의 목을 쳐내렷다.
핏발선 눈을 한 노인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가 싶더니 이내 검은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진다.
“아파, 아프잖아! 넌 대체 뭐야? 정말 인간이야?”
직후 놀랍게도 목을 잃은 몸이 말을 건네온다.
황준우는 싸늘한 시선으로 다시 한 번 환영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기회야. 본래 모습을 보여. 아니면 사지를 다 잘라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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