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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51화 (251/373)

학사재생 251화

제 251화

“꺄악! 미친놈!”

높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은 노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대신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은 양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작은 소녀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허리 아래, 골반 주변으로 솟아난 검붉은 빛을 한 다섯 꼬리다.

“여우 꼬리? 이쪽도 본래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황준우가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올린다.

동시에 사색이 된 소녀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 지금 나로서는 이게 한계라고!”

“한계?”

“직접 보면 몰라? 너, 인간 주제에 천안(天眼)은 엄청나게 발달했잖아!”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보이는 소녀의 모습은 일종의 덧대어진 환상이다.

그 내부에 또 다른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함부로 끄집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체가 뭐지?”

황준우는 질문의 방향을 선회했다.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척 보아도 인간이 아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마기를 제외하고서라도, 솟아난 다섯 개의 꼬리는 인간의 것으로 봐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너야말로 정체가 뭐야?”

소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래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 같네.”

황준우의 주변으로 서늘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그에 몸을 흠칫하고 떤 소녀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니,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강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에 대답부터 하자. 다음은 없어.”

“에이 씨, 보면 몰라! 구미호잖아!”

“구미호?”

“그래, 구미호.”

차갑게 답한 소녀, 구미호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너무 화만 내지 말고 우리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때? 너와 내가 함께라면 제법 재미있는 풍경을 많이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붉은빛 기운을 흩뿌리던 수왕검이 허공을 날았고 구미호의 왼쪽 팔이 사라졌다.

“꺄아악-!”

제자리에 주저앉은 구미호가 비명을 내지른다.

핏발 선 두 눈에는 경악이 가득 담긴 채였다.

남은 한 팔로 전신을 감싼 채 몸을 떨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준우의 입가로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

“무슨 짓인 줄은 모르겠지만 불쾌해서 말이야. 장난 칠 기분이 아니거든.”

“크읍…… 크으읍. 아파. 아프다고.”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구미호가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황준우의 차가운 눈빛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칫. 진짜 냉혈한 아냐? 그렇게 안 봤는데.”

결국 혀를 찬 소녀가 담담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다.

사라졌던 한쪽 팔은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뭉쳐지며 다시금 만들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준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량과는 무슨 관계지?”

“장량? 그 애송이?”

구미호의 눈이 호선으로 휘었다.

이윽고 입가를 가리고는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트린다.

“너 장량을 아는구나? 만났어. 만났으면, 죽었겠네. 너 같은 녀석한테 걸려서 살아남을 성정이나 실력은 못 되니까 말이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마왕 하나가 튀어나온 것 같던데 그걸 봉인시킨 것도 네 짓이야?”

“휴…… 다시 말하지만 질문은 내가 먼저 한다. 자꾸 은근슬쩍 돌려 가려 하지 마. 다음번엔 네 안에 숨겨진 걸 강제로라도 끄집어내서 벤다.”

황준우의 강한 협박에 몸을 떤 구미호가 지친다는 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는데 못 죽이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눈가로 웃음을 지은 구미호는 무릎을 굽혀 안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뭐가 궁금한데?”

“일단 아무리 봐도 구미호가 아닌데.”

검극이 구미호의 뒤로 솟아난 다섯 개의 꼬리를 향했다.

동시에 구미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첫 질문부터 숙녀에게 실례네. 정말.”

“…….”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

“설명해.”

“……장량을 안다고 했지? 그 건방진 놈이 나를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였거든.”

웃음을 보인 구미호가 제 무릎에 고개를 나른하게 눕혔다.

“뭐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시키는 대로 사는 건 적성에 안 맞아서 말이야. 이별이란 언제나 상처를 남기는 법이잖아? 꼬리 몇 개쯤은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오미호가 됐다?”

“뭐, 네 사형 몫도 하나 있고.”

“아, 하면 지금 사형을 괴롭히고 있는 탁기가…….”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내가 한 건 아니야. 지가 억지로 뺏어 간 거지.”

“그렇군.”

황준우의 눈에 살의가 어렸다.

“아, 미리 하나 더 말해서 날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 아니다 너. 오히려 처리해 줄 사람이 없어지는 거라고?”

“사람은 무슨. 요괴 주제에.”

“왜 그래. 나도 한때는 사람이었어. 사랑하고. 웃고, 또 슬퍼하는 사람.”

달기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황궁에는 언제부터 있었지?”

“제법 오래됐지? 딱히 갈 곳도 없고, 이런 장소는 익숙해서 말이야.”

“익숙하다.”

턱 끝을 검지로 두드린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눈앞에 앉은 구미호의 실체가 보이는 듯했다.

“너 소(蘇)씨로군.”

“정답. 이름은 기(己).”

“달기(?己). 과연, 못해도 마왕급은 되겠구나. 구미호가 맞았어.”

“깔깔깔!”

웃음을 터트린 구미호, 달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지금 죽여봤자 사실 큰 의미는 없어. 알지? 한번 유계를 떠난 마왕은 마음만 먹으면 다시 인계로 돌아올 수 있다고? 특히 나 같이 매혹에 능한 마왕의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살고 싶어 발악을 하는군.”

“죽는 건 아프니까.”

달기의 말에 황준우의 눈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이 죽는 건 아무렇지 않나 보지?”

“남의 죽음이잖아.”

너무나도 태연히, 아무런 감정 없이 음성을 흘린 달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보다시피 난 마왕이야. 남의 고통, 슬픔, 아픔, 그 모든 것이 내게 있어 양분이고 즐거움이지.”

“살아서 도움이 될 존재는 못 되겠구나.”

“근데 죽이기도 쉽지 않은 존재지.”

“하나만 더 묻지.”

“열 개 더 물어도 돼. 어차피 억지로라도 들을 거잖아?”

“여기서 터트린 화약도 네가 한 짓이냐?”

“물론이야! 난 인간들이 불에 타서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었거든. 아쉬워. 네 덕분에 아무것도 못 보고 말았잖아. 왜 막은 거야?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고, 소리치고! 너무 즐겁지 않아? 상상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서 소름이 돋아. 깔깔깔!”

양팔로 제 몸을 감싸고 전율하듯 떠는 그녀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손끝에 건괘가 떠오른다.

“역시 마왕이란 족속은 보는 족족 소멸시켜버리는 게 좋겠군.”

“그럴 방법이 있다면 말이야?”

“당장은 없지만, 만들 수도 있겠지.”

건괘는 곧 거대한 밧줄이 되어 달기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리릭- 탁!

밧줄에 휘감기며 비명을 내지른 달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살살 다루라고! 소녀잖아!”

“헛소리하지 마시고. 넌 한동안 이 상태로 나랑 함께 다닌다. 곤륜의 도사들이 오면 곧바로 봉인해버릴 테니까 각오하고 있으라고.”

“헤에, 예상은 했지만 곤륜 놈들하고도 관련 있는 거야? 그러면 팔괘술도 위선자 도사 놈들한테 받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투자인데…… 너 이번 생을 물론 내생까지 쪽쪽 빨려 먹는 것 아닐까 몰라. 우후후.”

“…….”

황준우는 더 이상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밧줄을 제 손목에 묶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을 뿐이다.

그러자 맑은 백광을 내뿜던 밧줄의 빛이 사라졌다.

두 사람을 묶은 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형태만 감춘 것이다.

“우선 따라와.”

이후 말없이 손목을 잡아끈 황준우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적당히 날뛰라고 미친 인간 놈아! 꺄아악!”

끌려가듯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달기가 소리쳤다.

황준우가 달기를 이끌고 향한 곳은 장락궁에 있는 제갈휘의 방이었다.

“안녕.”

힘없이 웃음을 보이는 달기를 바라보고는 놀란 눈을 빛낸 제갈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제는 정녕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버리는군!”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달기는 제갈휘의 몸에 쌓여가던 탁기를 향해 손을 내뻗어 흡입하듯 제거해냈다. 그러자 사라졌던 것이 분명한 여섯 번째 꼬리가 피어났고 달기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반가워. 여섯째야. 네가 없어서 이 언니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아니?”

혼잣말을 내뱉은 달기의 눈에 다시 한 번 붉은 기운이 어린다.

몸에서는 살기가 피어났다.

황준우를 향해 내뻗는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양팔과 양다리가 또 한 번씩 잘려나간 달기는 바닥을 기며 눈물을 흘렸다.

“엉엉. 제발 살려줘. 너무 아프단 말이야.”

차가운 눈으로 그런 달기를 노려본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죽이고 싶지만 그래서는 원천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한 탓이었다.

‘하여간에 마왕이란 것들은 너무 짜증 나는군.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겠어.’

동탁과 달기.

벌써 둘이다.

현세에 존재하기에 충분히 많은 숫자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무엇보다 제갈량이 말했던 멸망의 새라는 존재 역시 이와 비슷한 경우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떻게든 단박에 소멸시킬 법을 찾아내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남은 일은 천조회에게 맡긴 황준우의 걸음이 황궁 바깥을 향했다.

이제 황궁 내에 남은 일은 정말로 주연하의 몫이다.

그녀가 어떠한 방향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믿는다.

이미 결정한 바였기에 더 이상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내가 할 일로 남은 건 하나인가.’

황준우는 북경의 건물 사이를 거닌다.

사실상 이번 황궁행에 있어 가장 큰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딱딱한 나무문을 두어 번쯤 두들기자 꽤나 초췌해진 낯익은 얼굴이 문을 열었다.

“누구……?”

황준우를 처음 본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게 묻는다. 붉어진 눈시울과 퀭한 눈 밑이 유달리 안쓰럽다. 아마 문을 연 것도 정신이 없는 상태로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확률이 높았다.

“이제 와 해봐야 이상한 말이긴 한데, 늦은 밤에 이렇게 함부로 문을 열면 안 됩니다. 부인.”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말에 여인, 서령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왼쪽 다리 뒤편에는 긴장한 표정의 마선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는 황준우를 올려다보고 있다.

“우선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남천맹주 황준우라고 합니다.”

“남천맹주?”

서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아무래도 무림을 모르는 듯했다.

‘아니, 세상 자체를 잘 몰랐을 수도 있겠지.’

나쁜 것은 아니다.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렇게 살았으면 더욱 좋았을 일이다. 사실 마필의 부인 서령에게 있어 밤이란 그리 위험한 시간만도 아닐 터였다.

이곳은 황궁 주변이었고, 남편은 자그마치 금의위 조장이다.

함부로 찾아올 곳도 아니며,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집안도 되지 못한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을 터였다.

하나 이제는 다르다.

마필은 죽었으니 말이다.

“음…… 만금장 소장주라고 하면 더 알기 쉬울까요?”

황준우가 품에서 황금마패를 꺼내 들었다.

누구나 알아보는 만금장의 증표다.

“아…… 만금장.”

여전히 무림과 동떨어진 이들에게 있어 역시 남천맹보다는 이쪽이 더 잘 먹히는 듯했다.

“한데 만금장 소장주님이 왜 이런 곳에?”

서령이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

“돌아가신 바깥 분과 친구 사이 정도로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이와……?”

“예. 서강이란 친구와 셋이 제법 친한 편이었거든요.”

황준우의 말에 서령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

이내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겠는지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으흐흑.”

“엄마, 울지 마.”

마선이 그런 서령의 바짓자락을 꼭 잡으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흘린다.

두 모녀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황준우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돌아가신 마필 조장은 언제나 정의로웠고, 당당했으며, 부끄러움이 없는 일생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으흑, 으흐흑.”

서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훌륭한 금의위였습니다.”

“으흐흐흑.”

서령이 무너진다.

“으아앙! 엄마, 울지마!”

그런 그녀의 팔을 옆에서 잡은 마선도 함께 울음을 토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보답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마음이 조금 정리되시면, 남천맹 혹은 만금장의 이름을 꼭 찾아주세요. 어디에서 부르시든 찾아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집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도 서령은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작았다.

하나 마음에 떨어진 짐의 무게가 내는 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긴다.

“흐음…….”

어둠의 안갯속에 모습을 감춘 채 그런 황준우의 뒤를 쫓던 달기는 의아한 시선으로 짧은 신음을 흘렸다.

길기만 하였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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