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52화
제 252화
황준우가 황궁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무림맹과 남천맹의 선봉대가 와양현 인근 평야에서 첫 회전을 치렀다.
결과는 전반적으로 안휘의 지리와 환경에 익숙한 남천맹의 승리.
치열한 전투는 아니었다.
양측 모두 정예라고 볼 수 있는 고수들은 없었으며, 서로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한 맛보기 전투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며칠 뒤, 남천맹의 본대가 먼저 평야에 도착하여 한 번 더 회전을 벌였다.
부맹주 서문지언이 이끈 남천맹의 본대는 순식간에 무림맹을 압도했으며, 그 상태로 안휘성 바깥까지 무림맹의 세력을 몰아낼 듯 보였다.
하나 뒤이어 예상보다 빠르게 합류한 무림맹 본대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다.
전력으로는 여전히 남천맹의 우세였으나 오래도록 전통을 지켜온 무림맹의 저력 역시 우습게 볼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 사천당문이 남천맹 본단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남천맹 본단 역시 비어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늙은이까지 포함한 전력을 다한 사천당문의 공격은 작은 위협이 되었으나 큰 피해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는 남천맹 입장에서 뒤를 마냥 안심하고 놔둘 수만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림맹은 남천맹이 조금은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여전히 남천맹은 강공 태세를 유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남천맹의 군사 전왕은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남궁세가와 황보세가의 전력을 호북 방향으로 배치해놓았다.
병력의 배치는 적절했고, 이동 중인 남만의 두 제왕 오독궁과 야수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림이차대전 발발 이후 가장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 사망자만 합쳐서 오천 명 이상.
승자를 누구라고 뽑을 것도 없었다.
남만의 전사들과 남천맹, 양측 모두 처참한 피해를 입은 채 한 걸음씩 물러난 대전투였다.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날 때쯤, 무림맹 본대로 말을 탄 초원의 전사들이 합류했다.
순식간에 열세라고 보았던 무림맹의 덩치가 크게 부풀었다.
그 숫자만 보자면 남천맹을 압도할 정도다.
그러자 전왕은 엄연한 외부의 적, 세외를 끌어들인 무림맹의 행태를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천맹은 사기를 높였고 무림맹의 무인들 사이에서는 혼란이 일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또는 상황을 지켜보던 문파와 무인들 몇몇이 더 남천맹에 합류했다.
전장은 더욱 팽팽해져 갔다.
본대 간의 회전은 조금 주춤해졌다.
남측에서 올라온 남만 전사와 남천맹 분대의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가 끔찍한 수준이었다.
당장 누구 하나 압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전력 차에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입장에서야 회전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남천맹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점도 적지 않았다.
외부의 적들이 중원으로 들어왔고, 분명하게 무림맹의 편에 섰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은 굳이 안휘 인근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문파와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중원 무림 전체가 불쾌감을 표현하였으며, 몇몇은 먼 길을 떠나 직접 남천맹에게로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제갈세가가 조용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들은 분명한 참전 의사를 표현하였으나 아직 병력이 움직인 기록은 없었다.
하나 제갈세가가 합류할 경우, 그들이 발휘하는 진법이 전쟁이라는 큰 판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만은 분명했다. 직접 그 위력을 경험해 봤던 서문세가는 더욱 그들의 합류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팽팽한 전력은 다시금 남천맹에게로 기울게 되어 있다.
때를 기다리며 숨죽이는 시간이 흐르고 있을 무렵, 남천맹에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남측에서 오독궁과 야수궁을 맞아 분전하던 남궁세가와 황보세가가 대패(大敗)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갑작스럽게 새로이 합류한 사막의 전사들, 혈사단이 합류한 탓이었다.
망설이던 서문지언은 결국 본대를 물리는 방향을 택했다.
본단과 분대에 꽤나 많은 병력이 있었지만 오독궁과 야수궁, 혈사단이라는 세외삼대단체와 맞설 정도는 되지 못했다. 남무림 그 자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거대한 성장을 이룩한 남천맹이었지만, 한계는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천맹이 물러서고, 무림맹이 뒤를 쫓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개전 이후 수세에 몰린 경험이 더 많던 무림맹의 입장에서야 드디어 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기세의 정점은 그러한 무림맹 본대에 오른 깃발로부터 시작되었다.
맹주기(盟主旗).
맹주령을 발동한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무림맹주 진무영이 본대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팽팽하던 전장에 망설임 없이 불시위를 놓았다.
“짓밟으세요.”
바얀테무르가 이끄는 초원의 전사들이 최전방에서 회전을 일으켰다.
그 뒤를 무림맹 본대가 빠르게 쫓는다.
물러서던 남천맹은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침착하게 반응하며 굳건하게 수세를 지키는 듯했다.
“길은 제가 엽니다.”
무림맹주 진무영이 직접 나서 검을 휘두르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검에서부터 흘러나온 강기가 파도가 되어 무인들로 만들어진 방벽(防壁)을 모래성처럼 무너트렸다.
“와아아-!”
“우오오-!”
바얀테무르가 소리를 질렀고, 초원의 전사들이 화답을 했다.
기세는 순식간에 하늘까지 치솟았다.
“제 스승 종아리에 숨어 고개 숙여 인사하던 놈이 많이도 컸구나! 진무영. 어설픈 장난치지 말고 수준에 맞게 어울리자꾸나!”
현재 전장의 남천맹 제일고수이자, 부맹주인 서문지언이 그를 수습하기 위하여 최전선으로 나섰다.
서문지언은 현재 강호에서 무신 황준우 다음 가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죽어가던 남천맹의 기세에 불이 타올랐다.
하나 뒤이어진 결과는 참혹했다.
초수(初手)에는 언뜻 대등한 듯 보였다.
싸움이 이어지면서는 진무영이 다소 밀리는 듯도 해 보였다.
하나 놀랍게도 먼저 피를 흘린 측은 서문지언이었다.
한번 기세를 놓치면 밀린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공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리해서 자연지기를 운용한 탓에 내상이 번진 탓이다.
‘이 상태로 더 나아가다가는 죽는다.’
결국 입가로 흐르는 핏줄기를 훔친 서문지언이 한 걸음 물러났다.
진무영의 검이 그 뒤를 쫓았으나 서문지언 역시 남겨두었던 한 수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폭발이 일었고 서문지언은 더욱 큰 핏물을 쏟은 뒤에야 진무영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진무영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다소 침착했다.
누가 보아도 승패는 명백하다.
남천맹 무인들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깃들었다.
무림맹 무인들은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전투가 진무영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던 터였다.
“맹주님이 승리하셨다! 가서 적들의 목을 베자! 우오오-!”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이번에도 역시 바얀테무르였다.
뒤를 따른 초원전사들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전장을 뒤흔든다.
그들은 전장에 익숙했다.
사기와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았다.
그를 증빙이라도 하듯 힘겹게라도 의지를 불태우던 남천맹 무인들의 어깨가 힘없이 꺾였다.
반면 다소 놀란 와중에도 승리에 가까워진 무림맹 무인들의 팔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전쟁의 승패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입술을 깨문 서문지언은 후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무림맹주 진무영이 도착한 이후 첫 회전.
남천맹은 대패하였다.
첫 회전 이후 속절없이 무너질 것 같던 남천맹은 예상외의 수를 두었다.
“병력을 나누었다고요?”
“예. 본대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물러서는 중입니다. 이후 우리 측의 공격이 시작되면 맹주께서 자리하시지 않는 곳을 노리고 별동대를 운영하여 피해를 입히고 달아나고 있습니다.”
“남천맹 측에 훌륭한 군사가 있는 것 같군요.”
오칠의 말에 진무영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얀테무르와 초원전사들이 보여주었듯 전장에서 사기(士氣)란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후퇴하는 과정에서 마냥 당하기만 해서는 그 사기가 한도 끝도 떨어진다.
물러나는 패잔병들의 어깨가 유달리 무거워 보이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해서 남천맹은 후퇴를 택하면서도 별동대 운영으로 지속적으로 무림맹의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말이 없어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무림인이라는 특수한 기동력을 가진 병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성과가 발생할 때마다 전 부대에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칠의 말에 진무영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전략가이자 정치가로군요. 누군지 얼굴이 보고 싶은데요? 혹시 이름아 알려졌나요?”
“전왕이라고 하던데, 아직 크게 알려진 것 없는 무명(無名)인 듯합니다. 딱히 남천맹 내에서도 많이 거론되지 않는 듯하고…….”
“전왕. 재야의 인재라. 우리 무신께서 언제 그런 인물까지 섭외하셨을까요.”
진무영이 난감한 듯 고개를 젓고, 오칠이 쓴웃음을 지었다.
계획을 꾸민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적의 입장에서야 달갑지 않은 적이다.
첫 회전 이후 단숨에 몰아붙여 남천맹을 끝장내려던 그들의 입장에서야 더욱 아쉬운 상황이었다.
“흩어졌으니 일망타진은 포기해야겠고, 따로따로 잡자니 또 그사이 저 멀리 도망가겠죠.”
진무영은 상대 진영에 숨은 전략가를 얕보지 않았다.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린다.
“몸 상태는 조금 어떠십니까?”
그런 진무영을 보며 오칠이 걱정스러운 음색을 흘렸다.
“확실히 조금 무리한 기색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거뜬합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시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오칠이 아닌, 옆에 선 담소청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첫 전투에서 기세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말에 말리지 못했지만 서문지언과 싸우러 나섰을 때 당시 진무영의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였다.
황준우가 입힌 피해는 그만큼이나 컸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무존이라고도 불리는 서문지언과 맞붙었다.
“그래도 제가 이겼지 않습니까?”
“아마 입은 내상은 비슷할 겁니다.”
“더 심각할지도 몰라요.”
담소청과, 오칠 두 사람이 고개를 내저으며 진무영을 타박했다.
실제로 전장에서 피를 흘린 것은 서문지언이었지만, 막사로 돌아온 이후 피를 쏟은 측은 진무영이었다.
“아무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이 녀석은 꺼내지 않았으니까요.”
진무영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두드렸다.
“의천검(依天劍). 그래도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의천검은 오칠이 알기로, 현존하는 최고의 보패라 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야말로 제왕에게 어울리는 일대의 검.
하나 그 검이 얼마 전 무너졌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를 해낼 수 있는 괴물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도 못 했기에 더욱 경악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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