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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53화 (253/373)

학사재생 253화

제 253화

“궁왕께서 하는 걱정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무신과 같은 존재가 더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야…….”

인간 외의 존재라니, 오칠의 입가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보패만 하여도 본디 상상도 할 수 없던 물건이 아닙니까.”

“그렇기야 합니다만…….”

진무영의 말에 오칠이 말끝을 흐렸다.

실제로 보패가 발견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강호인들 중 대다수는 보패의 존재를 알지조차 못했다.

진무영의 말마따나 인간 외의 존재를 마냥 머릿속에서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없었던 무림일차대전에서도 죽은 이후 살아 돌아오는 마인들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보패의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요.”

“음…….”

오칠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진무영의 말을 들을수록 정말 인간 외의 무언가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물론, 그런 존재를 만날 일이 흔하기야 하겠습니까. 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진무영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입가로는 실 같은 핏줄기가 흐른다.

“맹주!”

담소청이 다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괜찮습니다. 확실히 아직은 상태가 좋지 않군요. 한동안은 회복에 최선을 다해야겠어요. 그분을 이런 몸가짐으로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회복하는 동안, 궁왕께서 뒷일을 맡아주십시오.”

미소를 흘리며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훔친 진무영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궁도 정리가 되었겠지요. 무신과 황녀 마마 두 분을 감당하기에 황자 전하는 너무 여리시니까 말이지요.”

“음…….”

“우선 기세는 잡아두었으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 계속 몰아붙이세요.”

오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무림맹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진무영은 현재로써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남천맹의 서문지언 역시 발이 묶였을 테지만 상대는 영악하게도 부대를 나누어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남천맹 측의 생각이야 불 보듯 뻔했다.

‘무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역사가 짧은 남천맹이라는 집단이 순식간에 남무림 제일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기반에는 무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와 위엄이 어려 있었다.

굳이 무신이 전장에 나서지 않아도, 그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남천맹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심지어 무신은 최전선에 서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

다소 허황된 위명이 아닌 진짜 무의 신.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초고수가 전장의 최전선에 선다.

의천검이라는 보패마저 일신의 무력으로 깨트린 괴물을 눈앞에서 맞이한 적의 심경은 어떨까? 눈앞에서 아군이 자랑하던 전력이 너무나 허망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직시하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홀로 넓은 전장을 지배하고 승리로 이끈다.

그야말로 무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궁왕께서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잘 압니다. 그래도 힘내주세요. 조금 더 있으면 수로왕과 수적들도 합류할 겁니다.”

진무영의 말에 오칠의 눈이 빛났다.

수로왕과 수로채의 합류는 지금의 전력에 있어 큰 보탬이다.

힘의 크기 자체가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탓이다.

‘그때가 되면 굳이 나누어진 부대를 따로 쫓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지요.’

적의 별동대의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구성을 딴딴하게 굳히고 남쪽으로 향한다.

진무영의 목적대로다.

“남으로, 더 남쪽으로 가는 겁니다.”

진무영의 나지막한 말이 오칠의 가슴에 와 닿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에 피가 흘렀다.

남천맹은 조금씩 더 남쪽으로 후퇴하였지만 쉽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별동대의 급습은 사기 선전 외에도 무림맹의 발목을 묶는 데에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오칠의 마음이 조급해질 때쯤, 독고문이 뒤늦게 수적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그 수가 물경 이만.

단순히 수적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대군이 합류한 것이다.

오칠은 첫 생각대로 방진을 단단히 굳히고 우직한 진군을 지시했다.

그 상태로 진군하여 남천맹 본단을 친다.

그때쯤 되면 아무리 남천맹이라고 하여도 숨어 싸우는 것만을 택할 수 없으리라 여긴 탓이다.

실제로 오칠의 전략은 유용했다.

수적들이 더해진 무림맹의 군세는 거대하여, 별동대 정도로 쉽게 흠집을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남은 것은 꾸준함과 인내심뿐이다.

둘 모두 오칠에게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문제는 그 뒤로 합류한 야수궁, 오독궁, 혈사단이 도착한 이후였다.

더욱 힘이 되는 군세를 얻었다.

오칠은 당연히 더 빠른 진군을 해낼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한데 결과는 조금 달랐다.

처음 도착했을 당시부터, 세 세력은 어딘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분명 함께 승전을 하고 왔음에도 서로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로 성향이 다른 집단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여겼다.

한데 그 정도가 오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묵묵히 진군하던 어느 날 야수궁과 혈사단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이밀고 피를 쏟았다.

오독궁은 그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보냈다.

싸움은 더욱 커졌고 진영 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다급하게 오칠이 뛰어가 수습하려 하였지만 이미 세 세력 간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버린 상태였다. 오히려 그들은 오칠과 무림맹을 의심하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무림맹은 분명이 전장에서 승리한 이후 남기의 비옥한 땅을 우리 오독궁에게 약속했소. 한데 어째서 저런 허접쓰레기들을 끌어들여 땅을 나누려 한단 말이오?”

남만의 두 지존 중 하나, 오독궁주 혈사악의 말에 오칠은 진땀을 흘렸다.

“약속은 지킬 겁니다. 다만 궁주께서 생각하셔야 할 것은 남기의 땅은 생각 외로 굉장히 넓다는 점입니다. 과한 욕심은 탈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궁주께서는 조금만 신중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짧은 신음을 흘리며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인 혈사악이었지만 끝까지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오독궁주는 양반에 속했다.

야수궁주 괴정과 혈사단주 철련은 오칠을 아주 대놓고 의심하였다.

“애초부터 우리를 쓰고 버릴 패로 이용하는 것 아니오? 난 무림맹주의 말을 믿을 수 없소.”

괴정이 거친 콧김을 흘렸다.

“우리는 북쪽과 남쪽 어디든 좋다. 땅만 가질 수 있다면 말이지.”

철련은 아주 위협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후 세 세력은 공통으로 당장 전장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다.

뿐만이 아니라 간간히 무림맹의 행동에 훼방을 놓았다.

셋 중 어느 한쪽을 택하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전해오곤 했다.

결국 무림맹은 꾸준하게 이어가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팔공산을 눈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진무영이라는 이름하에 다소 의심스러워도 큰 흔들림 없이 동맹에 임한 세 세력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연유가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간자가 있다?’

아니면 세 사람을 쥐고 흔들 법한 조건으로 미끼를 하는 낚시꾼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문득 오칠의 시선이 팔공산을 향했다.

지금 그 안에는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 남천맹 부대가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남천맹…… 전왕?’

떠오른 이름에 갑작스럽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 모든 광경이 그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이란 말인가?

무신만 하여도 버거운데 세 치 혀로 사람을 농락하는 책사라고?

심지어 전왕은 지금과 같은, 부대를 나누는 전략을 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략과 전술 양측 모두 능한 군사라니, 그 또한 괴물이로군.’

오칠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단순한 예측만은 아니었다.

이미 전왕은 부대 분할, 별동대 운영에 이어 선전을 통한 사기진작으로 스스로가 뛰어난 정치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능성을 무작정 덮어둘 수만은 없었다.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무신이라는 시대(時代)의 괴물은 결국 본인의 일생이 끝나는 순간 영광의 종말을 맞이한다.

하나 뛰어난 정치가가 이룬 업적은 대대로 남아 오랜 시간 부흥을 이끈다.

이제 막 발호한 남천맹이라는 세력에 거대한 잠재력까지 더해진 것이다.

‘나는 오로지 맹주께서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 남천맹에게도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가 와도 오칠은 망설임 없이 진무영을 택할 터였다.

황준우와 전왕.

둘은 함께함으로써 완벽하다.

‘하나라도 틀어지면 위기가 찾아오겠지.’

진무영은 혼자이기에 둘에 비해 다소 부족할지 모르지만 홀로 무와 정치라는 양면을 갖추고 있다.

물론 진무영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위험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오칠은 믿었다.

‘맹주는 무너지지 않는다.’

천하에서 그 누구보다 무섭고 강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남천맹과 싸우는 이 길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또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설령 우리가 패배하더라도…….’

강호에는 희망이 있다.

오칠이 꿈꾸던 미래는 어찌 되든 실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부대 내에 간자가 있다. 팔황(八荒=세외)의 군주들 근처에 숨어 있을 테니 잘 찾아봐야 한다.”

직속 수하들을 불러 명을 내린 오칠의 눈이 깊어졌다.

누가 이기든 희망이 남아 있다면 져줄 생각은 없었다.

‘나도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전왕.’

일생의 적수를 만난 것처럼, 그 이름을 떠올린 오칠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꾸준하게 진군해오던 무림맹의 걸음이 다소 더뎌졌다.

부대 내부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무림맹의 군대는 거대하고 다채롭다는 점이 강점이자 약점이지요.”

안휘성 전체가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보는 전왕의 눈은 여느 때 없이 차가웠다.

“대단하오. 덕분에 맹주께서 올 때까지 팔공산을 사수할 수 있겠구려.”

마주 앉은 서문지언이 감탄을 흘리며 말했다.

진무영과의 일전 이후 큰 내상을 입은 그의 몸 상태는 아직까지도 좋지 않았다.

전장에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전왕과 같은 책사의 존재는 큰 힘이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아마 팔공산은 결국 내어줘야 할 겁니다.”

지도를 바라볼 때의 차가운 눈빛을 감추고 쑥스러운 듯 웃음을 흘린 전왕이 볼을 긁적였다.

“작은 분열로도 적의 걸음을 조금 늦추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상이 더 심화되지 않을까요?”

지도를 놓고 한자리에 모인 또 다른 인물, 경호가 물었다.

거친 전장을 헤친 얼굴에는 전에 없던 의지가 배어 있는 채였다.

황준우의 곁에서 다소 유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가 전장에서 보이는 활약은 동료라 할 수 있는 홍산에 비해서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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