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55화
제 255화
“조금 쉬는 게 어떻습니까?”
갑작스러운 홍산의 질문에, 핏발이 선 부릅뜬 눈으로 팔공산 아래를 바라보던 경호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최근 많이 날카로워지신 것 같습니다.”
잠시 고개를 돌려 걱정 가득한 시선을 마주한 경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주공께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더 걱정하지 않으실까요?”
“음…….”
“부대장 아니십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직접 매일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경호의 등을 홍산이 떠밀었다.
“조금이라도 들어가 눈을 붙이세요. 은공께서 쓰러진다면 저도 주공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끙…….”
걱정된다는 듯 다시 한 번 산 아래를 바라본 경호가 입맛을 다셨다. 무거운 발걸음은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부대원들을 못 믿겠다면 저라도 믿어주세요. 제가 이 자리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공께 괜한 심려를 끼치고 싶으신 겁니까?”
다소 엄하게 말한 홍산이 눈에 쌍심지를 치켜세운다.
결국 한숨을 내쉰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딱 반 시진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적어도 세 시진은 쉬다가 오세요.”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경호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이후로도 막사를 향하기 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엄하게 올라선 홍산의 시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 번도 넘게 뒤를 돌아보던 경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 보이지 않을 뿐 막사에 들어서는 직전까지도 몇 번이나 더 뒤를 돌아볼 것이다.
‘어쩌면 막사 안에서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머릿속에는 곧장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도강, 자네가 가서 부대장께서 주무시는지 확인해 보게. 만약 여전히 서서 불안에 떨고 있다면 내가 주공께 모두 아뢰겠다고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지나가던 남천맹의 무인 하나를 불러 세워 명령을 전달한 홍산의 시선이 그제야 완전히 산 아래를 향했다.
사실 굳이 홍산이 아니더라도 경호가 부대장으로 배정된 우군(右軍)에는 매시간마다 교대하며 감시를 소홀치 않게 하고 있다.
애초에 이 자리는 전장이고, 전쟁은 지속 중이다.
누구라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다만 경호의 경우는 너무 심했다.
‘제 몫을 다 하고 싶다는 것은 알겠지만…….’
경호는 아주 가끔 재능에 혹은 상황에 치여 살아야 하는 스스로가 짐 덩이 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물론 곧 웃음을 보이며 황준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투정일 뿐이라고 했지만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에 진심이 전혀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그가 황준우 없는 전쟁을 맞았다.
심지어 공격도 아닌 수비다.
뚫리게 되면 황준우가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해지고 다치게 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더욱더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훌륭한 부대장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무리라고 볼 수 있는 집착은 결코 좋게 봐줄 수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다가 경호 본인이 쓰러지기 직전 아닌가?
‘정작 본인 역시 주공께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 하시는 건지…….’
속내로 혀를 차고 있는 홍산에게로 지시를 받았던 장도강이 빠르게 뛰어온다.
“말씀 전했습니다.”
“과연…….”
만약 경호가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면 말을 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상대로의 결과인 셈이다.
“부탁인데 주무실 때까지 좀 부탁하겠네.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
“안심하십시오. 저도 부대장님이 조금 쉬었으면 하니까요.”
웃음을 흘린 장도강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다시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홍산 역시 마음을 완전히 놓고 산 아래를 바라본다.
‘약속은 약속이니…….’
말했듯, 그가 아니더라도 적의 근황을 살필 무인들은 많다.
하나 약속을 하였으니 경호가 오기 전까지는 그가 있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옳은 일인 것이다.
그러기를 한 시진.
떠났던 장도강이 다시 돌아왔다.
“완전히 잠드셨습니다. 코까지 드렁드렁 고시더군요.”
“수고했네.”
흡족한 표정을 한 장도강의 어깨를 두드려 준 홍산의 시선은 산 아래로 고정된 채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 옆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장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용하네요.”
“…….”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계속 쫓기는 판이었는데, 군사의 전략이 뛰어나긴 한가 봅니다.”
정확하게는 전술 혹은 정치의 개념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전방에서 싸우는 무인의 입장에서야 아무렴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이 상태로 맹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조용하게 보내준다면 참 좋을 텐데…….”
홍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도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입을 연다.
애초에 홍산은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특수한 경우에 한하지 않으면 거의 입을 열지 않아 누군가는 남천맹의 묵승이라며 놀림감으로 삼기도 할 정도였다. 때문에 부대장은 홍산이 아닌 경호가 되었다. 절대적인 무공 수치만 놓고 보자면 홍산이 한 수 앞설지 모르나, 사람이 따르는 인물상은 경호 측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남천맹 무인들이 홍산을 싫어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오히려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 가는 그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끼고 동경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제갈세가 녀석들은 왜 이렇게 늦는 걸까요. 한 손이 바쁜 마당에…….”
장도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두 자루 병기를 휘두르며 아군의 최전방에서 적과 맞서는 홍산의 모습이 그 누구보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 장도강 본인의 병기가 홍산과 같은 창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터였다.
“부장님께서는 보통 창술 연습을 어떻게 하십니까? 두 자루 다 동시에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죠.”
“거리 감각이 제일 중요하지.”
예상외로 돌아온 대답에 장도강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입가에는 미소가 실실 떠올랐다.
“적이 멀리 있다면 장창, 가까이 있다면 단창이란 거지요?”
질문을 한 이후 곧장 장도강의 머릿속에 한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홍산이 멀리 있는 적병을 향해 단창을 있는 힘껏 던지는 모습이었다.
“아, 혹시 단창 쪽이…….”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짧은 탄성을 흘리고는 또다시 입을 열고 떠들어댄다.
그러기를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홍산의 검미가 무겁게 꿈틀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말이 많지요?”
그 모습을 보고 홍산이 불쾌해하고 있다 여긴 장도강이 머쓱한 웃음을 지은 채 뒷머리를 긁적인다.
“당장 경종을 울리고 본대에 신호를 보내게.”
“어서……!”
홍산이 다급하게 외친 순간, 장도강의 몸이 굳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릅뜬 두 눈은 하늘로 떠오른다.
목이 사라진 굳은 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홍산의 옆으로 쓰러졌다.
이를 악문 홍산은 창을 빼 들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청홍색의 빛줄기가 단숨에 홍산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창대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균형이 무너진다.
바닥을 몇 번이고 구른 이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낯익은, 또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방금 전까지 홍산이 서 있던 곳에서 나타났다.
“무림맹주!”
남무림 전체를 통틀어 황준우 다음 가는 고수라는 서문지언을 꺾은 절대의 고수.
진무영을 바라본 홍산은 찢어진 손아귀에 힘을 주어 창대를 강하게 잡았다.
“감이 제법 좋은 편이군요.”
그런 홍산을 보며 웃음을 흘린 진무영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한 줄기 청홍빛 지풍이 날아든 것 또한 동시다.
“……!”
부릅뜬 두 눈으로 다시 한 번 공격을 막은 홍산의 몸이 무너졌다.
“쿠에엑-!”
핏물을 쏟는 시야가 흐릿하다.
고작 두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지독한 격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오, 이 거리에서까지 막아낼 줄이야.”
또 한 번 감탄을 토한 진무영의 손가락이 또 한 번 까딱였다.
막을 수 없다.
진무영도, 홍산도 모두 그리 생각했다.
“……!!”
한데 그저 발악을 하듯 휘두른 장창이 정확하게 청홍빛 강기를 막아냈다.
다만 이전과 같이 강기를 단숨에 쳐내지는 못했다.
“오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예상외의 일이라, 진무영의 입가로 짧은 감탄이 흘렀다.
동시에 강기를 막아서던 홍산의 장창이 부서진다.
“크아악-!”
버텨내던 홍산의 몸은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걸음을 떼어 단숨에 그 곁으로 도착한 진무영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마지막은 정말 놀랐습니다.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군요.”
“쿨럭, 쿨럭!”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핏물 섞인 기침만을 연신 내뱉은 홍산이 부릅뜬 두 눈으로 진무영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지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한 적의가 진무영의 전신을 뒤덮는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얼굴도 낯이 익군요. 그분과 제법 가까운 사이지요?”
“죽…… 여라.”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사실 전, 그분의 곁에 저 외에 다른 누군가 있는 게 정말 싫거든요.”
웃음을 흘린 진무영의 검지가 홍산의 정수리를 향했다.
더 이상은 팔을 휘둘러 볼 기력조차 없다.
진짜 죽음이 눈앞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산은 두 눈조차 감지 않았다.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듯 진무영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흐음…….”
짧은 신음을 흘린 진무영의 검지 끝에 푸른빛 강기가 맺혔다.
고오오-!
그 순간 십 장이 넘는 거리를 압도한 거대한 강기가 다가왔다.
“거기검.”
반갑다는 듯, 그 이름을 부른 진무영의 검지에 맺힌 강기가 단숨에 방향을 바꾸었다.
폭음이 일며 엄청난 먼지구름이 단숨에 두 사람을 뒤덮었다.
그 안으로 뛰어드는 이는 청홍검을 움켜쥔 채 굳은 얼굴을 한 경호다.
먼지구름 사이로 코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는 진무영과 경호의 시선이 오갔다. 짧은 틈, 망설임 없이 홍산을 품에 안은 경호가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홍 무사님!”
“쿨럭……, 어째서…… 이곳에.”
“모르겠습니다. 그냥 갑자기 주변 기의 흐름이 거칠게 느껴져서…….”
다급한 경호의 말에 홍산의 눈에 옅은 감탄이 어렸다.
‘과연…… 한 발 더 앞서가기 시작하신 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핏물이 가득 고인 목이 너무 메인다.
그런 홍산에게 내력을 흘리며 혀를 찬 경호가 정면을 노려보았다.
뒷짐을 쥔 채 여유로운 모습을 한 진무영이 보인다.
“소란을 크게 벌일 테니 곧 본대까지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죽지 말고 버티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홍 공자?”
“물론……입니다.”
주변으로 몰려드는 무인의 기척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홍산을 내려놓은 경호가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인사는 끝내셨습니까?”
“…….”
“부족하시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누셔도 좋습니다. 나름대로의 예우, 그리고 인정이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시끄럽다!”
거칠게 외친 경호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쇄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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