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56화
제 256화
직선으로 내뻗은 검극은 순식간에 진무영의 왼쪽 가슴에 맞닿았다.
“……!!”
분명 눈앞에 진무영이 있는데 사람의 살이 아닌 허공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린다.
‘위치가…….’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경호는 곧장 발악하듯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검을 돌렸다.
하나 여전히 어디에도 진무영의 모습은 없다.
“여깁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경호의 등 뒤로 소름이 짜르르 올라왔다.
눈앞에 방금 전까지 존재하고 있던 진무영의 신형이 흐릿하게 흩어진다.
검이 높은 방향으로 휘둘러졌지만 여전히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무엇도 없었다.
“거기검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조금 더 힘을 내보실 수는 없는 겁니까?”
이번엔 등 뒤.
침을 꿀꺽 삼킨 경호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달아나시려 해도 소용없답니다. 저, 제법 집착이 심한 편이거든요. 후후.”
“…….”
이를 악문 경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지루하군요. 고작 이 정도로 그분의 곁에 있으려 하다니, 욕심 아닙니까?”
“시끄럽다고!”
거칠게 일갈을 내뱉은 청홍검 위로 거대한 강기가 치솟았다.
콰아아-!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든 기운이 순식간에 주변 일대를 뒤덮는다.
‘이번에도 없어.’
다행인 점은 처음과 달리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이 정도에 당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을 한 경호의 검이 공중으로 높게 솟아올랐다.
처음으로 손끝에 감각이 살아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기의 충돌로 자욱한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린다.
그 정면, 마주한 검은 인영을 바라본 경호가 웃음을 흘렸다.
“기대하던 거기검 맛이 어떠냐.”
“음…….”
짧은 신음이 흐른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검지 끝으로 경호가 내뻗은 강기 덩어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진무영이 웃음을 보였다.
“생각보다는 영리하네요?”
“강기를 스스로 제어 못 하여 주변에 피해를 줄까 봐 일부러 거리를 벌린 것도 그렇고…….”
진무영의 눈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같은 방법에 두 번이나 당하지도 않고요.”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적당히 하시지.”
아랫입술을 깨문 경호의 읊조림에 어깨를 으쓱한 진무영의 검지가 가볍게 앞으로 향한다.
“뭐, 좋습니다. 일부러라도 따라와 준 거니까요.”
묵직하게 손아귀를 밀어내는 그 힘에 청홍검을 쥔 경호의 몸이 휘청이며 밀려난다.
아랫입술까지 깨물며 버티려 하였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력이 단숨에 그를 짓누른 탓이다.
‘이길 수 있을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경호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다.
“살아남을 수나 있으려나.”
“음……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군요.”
나지막한 혼잣말에 답변이 돌아온다.
“귀도 밝네.”
“칭찬으로 받죠.”
스르릉-!
짧게 답한 진무영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화려한 금빛 장식을 한 검에서 당장에라도 목을 벨 것 같은 예기가 흘러나왔다.
“그 검, 청홍검이죠?”
“…….”
“말씀 안 하셔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래 산붕도장에게 재미 삼아 선물했던 물건이니까요.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보다는 당신 같은 사람의 수준에 딱 어울리는 물건이니까요. 훗.”
입가로 명백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거친 콧김을 내뿜은 경호의 입에서도 그와 비슷한 웃음이 흘렀다.
“아아, 그거 꽤나 좋은 말인데. 무림맹주인 네가 어째서 도련님께 그런 공경을 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걸?”
“무슨 뜻입니까?”
웃음을 흘리는 진무영의 눈이 높게 솟아올랐다.
이전과는 엄연히 다른 표정 변화다.
경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너 같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변태 자식이 도련님과 비슷한 위치에라도 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엄두도 내지 말라고. 너 따위는 무슨 짓을 해도 감히 근처도 갈 수 없는 분이니까. 질적으로 수준이 다르지.”
“닥치세요.”
“꽤나 정곡인가 보네? 뭐지? 이해가 안 되네. 어째서 도련님께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죽여버릴 겁니다.”
“언제는 안 그럴 생각이었고? 무림맹주 당신, 진짜 목적이 뭐야? 어째서 도련님께…….”
“죽인다고 했습니다.”
섬뜩할 살기가 치솟은 순간, 침을 꿀꺽 삼킨 경호의 허리가 접히듯 꺾였다.
코끝을 예리하게 베어가는 빛줄기를 본 경호의 입가로 또 한 번 헛웃음이 흘렀다.
“미치겠네. 진짜 죽겠잖아.”
“예. 진짜 죽여 드리죠.”
허리를 꺾은 경호의 바로 위로 나타난 진무영의 검이 처형을 하듯 떨어진다.
재빠르게 솟아난 강기가 진무영의 검과 강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폭음과 함께 꺾여 있던 경호의 몸이 지면으로 파묻혔다.
“쿨럭-!”
창백한 안색으로 핏물 섞인 기침을 토하는 그를 내려다보는 진무영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흐른다.
“아무래도 다음이 마지막인 것 같죠?”
“웃…… 기지 마. 아직 장가도 못 가봤다고…….”
“그것참 아쉽네요. 저승에서라도 좋은 인연 찾길 바랍니다.”
진무영의 검이 다시 한 번 내리쳐지는 순간, 망설임 없이 바닥을 구른 경호가 몸을 일으켰다.
“소개라도 시켜주고 그런 말을 하든가!”
동시에 휘두른 청홍검 위로는 또 한 번 거대한 강기가 치솟아 올라 진무영의 몸을 삽시간에 뒤덮는다.
허공이 갈리고, 등 뒤로 또 한 번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군요. 근성만큼은 인정해야겠는걸요?”
“네가 말했지 않나? 한 번 당한 거에 두 번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다고.”
경호의 몸이 작게 선회하며 검이 원형을 그린다.
단순한 베기 동작이지만 그만큼 빠르다.
“물론이죠. 여전히 얼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안개처럼 흩어지는 진무영의 입이 말을 한다.
그 경악스러운 모습에 경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자아, 그만하죠.”
어깨를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이 뇌리를 타고 뜨겁게 번져나간다.
연신, 쉴 새 없이 몸을 파고들었다 빠져나가는 감촉에 머릿속이 이내 백지장처럼 하얗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끄아악-!”
입가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쉽게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제 기분을 매우 불쾌하게 만든 죗값은 받아야죠. 후후.”
푹, 푹, 푹.
“커어억!”
어깨, 허리, 종아리, 허벅지, 검을 쥔 손등까지 이어지는 고통에 경호는 전신을 떨었다.
더 이상 검이 몸속을 파고드는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나 뜨겁다.
“아하하!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바닥이나 기는 이 모습이 당신에게는 제일 어울리는군요. 한심해요. 보기 민망하다 못해 부끄러울 지경이군요. 하하하!”
다만 머릿속까지 울리는 웃음소리가 유달리도 불쾌할 따름이다.
‘시끄러워.’
흐릿해지는 시선 속, 죽음의 형상이 명백히 보이기 시작한다.
눈앞으로는 아주 오랜 추억이 아련한 듯 스쳐 지나간다.
무엇보다 가장 깊게, 또한 짙게 파고드는 추억은 역시 황준우와 함께 했던 나날이다.
고사리 같던 작은 손에 목검을 쥐여주던 날이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속내를 얼마나 끓였는지 모른다.
손에 잡힌 책이 그리도 싫었던지 공부하기 싫다며 집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모습을 보며 쩔쩔매던 날도 떠올랐다.
또한 남궁세가라는 대적을 맞아 당당한 황준우의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른 시절도 있었다.
‘정말…… 걱정투성이였는데.’
황준우가 태어난 이후 매일 안절부절못하고, 걱정만 가슴에 가득 안고, 그렇게 일생을 살아왔다.
나중에는 그 어린 꼬마 녀석이 장성해서 걱정만 많다며 잔소리까지 늘어놓을 정도였다.
‘건방지기는…….’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많아서인지 웃음이 더 나왔다.
‘그래도 너무 좋았어.’
분명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마치 친구 같았다.
경호 본인이 철들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황준우가 쓸데없이 성숙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이유가 참 많았지만 아무렴 좋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한 번 더 간절히 바랄 뿐이다.
‘도련님…… 보고 싶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경호의 시선이 암전(暗轉)되었다.
“어라, 죽었나요?”
두터운 허벅지 사이로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 든 진무영이 질문을 건넨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디 다시 한 번.”
반대쪽 허벅지를 찌른 이후 진무영의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전혀 움직이지를 않네요. 한데…….”
가슴 한편이 아직도 오르락내리락하며 박동하고 있다.
죽지 않았다.
“정말 근성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은걸요.”
비릿한 웃음을 흘린 진무영이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찮은 인생치고는, 제법 질긴 수명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끝내드리지요. 당신을 잃은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할지 떠올리니 벌써부터 너무나 흥분되는군요.”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는 진무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때였다.
“진무여엉!”
무거운 일갈과 함께 거친 기운이 진무영의 가슴 중앙을 두드렸다.
“쿨럭!”
핏물을 쏟은 진무영의 몸이 바닥을 구른다.
시선은 정면.
흉신악살과 같은 얼굴이 되어 뛰어오는 서문지언을 향했다.
“이런,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네요.”
입가로는 쓴웃음이 흘렀다.
동시에 그의 앞으로 둥글게 뭉친 강기의 포탄이 연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콰과광-!
폭음이 연속으로 일고, 창백한 안색이 된 진무영이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한다.
“노옴!”
거친 외침을 내뱉은 서문지언의 주먹에서 다시 한 번 쏘아진 강기의 포탄이 그 뒤를 쫓았지만 결국 닿지 않는다.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는 진무영을 죽일 듯 노려본 서문지언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기회를 잡았을 때 어떻게든 쫓아가 생명을 끊어 놓고 싶지만 작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경호 부대장!”
과장하여 말해 피로 만든 웅덩이 속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경호의 몸을 안아 든 서문지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출혈이 너무 심해.’
그야말로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다.
무엇보다 출혈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내력을 이용해 그런 경호의 몸에 호신 강기를 덧씌운 서문지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여기서 부대장이 죽으면 맹주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보란 말이오. 제발 버텨주시오. 제발.”
다급하게 본진을 향해 뛰어가며 내뱉는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어렸다.
남천맹의 날개라고 볼 수 있는 우군을 담당하던 부대장과 부장, 경호와 홍산이 당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 찾아온 무림맹주의 기습에 의한 불행이었다.
다행인 사실을 뽑자면, 두 사람 모두 목숨은 건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부장인 홍산은 다음 날 곧장 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부대 내의 의원들은 홍산의 상태를 보며, 다소 걱정했던 내상도 며칠 내에 모두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부대장인 경호 측이었다.
심한 출혈에 큰 상처를 입은 경호는 맹 내 최고의 의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큰 수술을 감행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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