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259화 (259/373)

학사재생 259화

제 259화

“진무영.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본래라면 당연히 작금의 전장, 무림맹 진영의 어딘가에 있어야만 한다.

한데 불안하다.

“…….”

입을 닫은 사마정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사마정의 눈매가 찌푸려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없소.”

“정말입니까?”

“전장 어디에도 무림맹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소.”

전왕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림맹주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어디로?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간 진무영의 속내를 쉽게 짐작하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언제나 그는 황준우와의 직접적 만남을 주의해왔다.

‘그만큼이나 맹주님을 두려워한다는 뜻이겠지.’

하나 그의 모든 행보가 황준우에게로 귀결되고 있었다.

‘맹주님을 자극하고 있다.’

두려워하면서도 자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 속내의 끝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제는 진무영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는 짐작이 되었다.

“만금장.”

짧은 전왕의 읊조림에 사마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림맹주가 설마……?”

만약의 가정일 뿐이다.

하나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가정이었다.

“내가 먼저 만금장으로 가겠소.”

사마정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소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의 사태에 먼 거리에서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사마정인 탓이다.

“어서 맹주님께 소식을 전해야 할 텐데…….”

전왕은 마음속 가득 차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헛소리하고 있군.”

인상을 찌푸린 황준우가 혀를 찼다.

그 냉철한 반응에 무각대사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진다.

“맹주. 그간 쌓아온 업이 두렵지도 않으신 겁니까?”

“무서우면? 어디 숨어서 숨죽이고 몸이라도 덜덜 떨고 있어야 하나?”

“아미타불. 어찌 혼자만을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하늘 아래, 강호 전체가 동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씩이라도 서로에게 양보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훨씬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그쪽 스님 말대로라면 무림맹이 먼저 전쟁을 선포할 때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한 건 뭐하자는 건데? 정말 천하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한 몸 바쳐 전쟁을 막았어야지.”

“아미타불. 무림맹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입니다. 우리 소림 역시 그를 막고 싶었으나…….”

황준우가 거친 기합을 내뱉었다.

그뿐임에도 불구하고 앞길을 막고 대화를 이끌던 무각대사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 말한다며 나 역시 똑같은 사람이라고 해두지.”

“맹주!”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을 듯하군. 진무영에게 했듯 나에게도 상식을 버려라.”

황준우의 걸음이 성큼성큼 앞을 향했다.

염주를 쥔 무각대사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다.

‘나의 무공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불가(不可).

머릿속에 곧장 떠오른 말이다.

눈앞의 무신은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고금의 괴물이다.

‘신물(神物)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염주 알을 굴리는 무각대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뜻 크기만 커 보이는 거대한 염주 알은 소림 내 아니, 불가(佛家) 전체를 따져보아도 손에 꼽히는 엄청난 보물이다. 아마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황준우라고 하여도 쉽게 벗어나기 힘들 터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께서도 단 다섯 알을 이용하여 무신을 막으셨지 않은가?’

염주에 꿰인 거대한 염주 알은 총 열여섯.

하나 본래는 스물하나였다.

그중 다섯은 전생의 황준우를 막고자 사용되었다.

나머지 열여섯은 바로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을 터였다.

“원공 영감과의 정을 봐서 한 번 더 말하겠어. 비켜.”

“아미타불. 맹주가 쌓은 살생의 업이 이미 유계까지 닿아 마왕의 길을 만들고 있거늘…… 어찌 고집만을 부린단 말씀이십니까.”

“그런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네.”

동탁 또한 무각대사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본래 황준우에게 배정되었으나, 재생을 함으로써 미뤄진 운명.

“아미타불. 저 또한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시지요. 맹주께서는 이미 한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업을 쌓으셨습니다.”

나아가던 황준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무각대사의 눈에는 언뜻 희망이 떠오른다.

“아쉽게도, 난 천재거든.”

그런 그를 향해 황준우가 냉소를 보인다.

“맹주?”

“감당할 수 없는 업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 괴상한 운명이니, 멸망이니 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모두 부숴주지.”

“맹주!”

“진짜 마지막 권고다. 내 인내심의 끝이야. 비켜.”

“아미타불.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고 하신다면야!”

거칠게 숨을 내뱉은 무각대사의 염주가 황준우의 머리를 노리고 크게 휘둘러졌다.

거대한 황금빛 고리가 황준우의 눈앞으로 번쩍인다.

“이거…….”

원공이 보여 주었던 괴상한 힘이다.

그 정체를 파악한 황준우는 단숨에 수왕검을 빼 들었다.

검과 염주가 부딪치며 폭음이 일었다.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난 황준우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떠올랐다.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함이 상상 이상이었다.

어지간한 보패에서 느끼지 못했던 수준의 힘이다.

여섯 꼬리 달린 마왕 달기의 손속에 비해서도 오히려 한 수 앞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염주 대체 뭐야?”

“흐앗-!”

대답 대신 그간 참아왔던 기합을 터트린 무각대사의 염주가 또 한 번 황준우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또 한 번 폭음이 일었다.

이번만큼은 제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염주를 막아선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대답하지 않으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아미타불!”

거칠게 화답한 무각대사의 염주가 더욱 강렬한 황금빛을 낸 것은 그때였다.

투두둑-!

알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열여섯의 염주 알이 허공으로 떠올라 황준우의 머리 주변을 휘감는다.

“……!!”

눈을 부릅뜬 황준우가 뒤로 물러나려 하였으나 환한 황금빛을 내뿜는 염주가 그를 막아섰다.

“아미타불.”

뒤로 물러서 합장(合掌)을 한 무각대사의 눈이 빛을 내뿜었다.

“긴고아(緊?兒)!”

“그토록 궁금해하시던 신물의 이름이요!”

“미친……!”

머리 주변으로 둘러진 염주 알이 만든 황금빛 테의 정체를 알게 된 황준우가 욕설을 흘렸다.

“스승님께서는 깊은 깨달음을 통해 긴고아를 이용하여 부처님과 소통해 당신의 육신을 묶고 새 삶을 부여하였소. 하나 불민한 제자에게는 그럴 힘과 지혜가 없으니, 지금의 당신을 직접 봉인하려 하오.”

“그렇군. 그게 긴고아였어.”

백두산 위.

마지막 봉인의 순간 온몸을 옭아매던 황금빛 테두리를 떠올린 황준우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된 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 짧은 틈새 무각대사의 입은 연신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자 황준우의 머리 주변을 감싸던 염주 알은 하나로 얽히고설켜 더욱 단단한 테의 형태가 되어 조여오기 시작한다.

무각대사가 긴고아를 완전히 조이기 위한 긴고주(緊?呪)를 외기 시작한 것이다.

‘굉장하군.’

그 강렬한 힘에 황준우는 내심 감탄을 흘렸다.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나 작금이라면 전생 원공대사가 보여 주었던 최후의 일격도 두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한데 직접 머리를 조여오기 시작하는 긴고아의 힘은 전생에 마주했던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아차 하는 순간 무각대사의 뜻대로 봉인이 될지도 모를 정도의 위험이다.

새삼스레 손오공이라는 대요괴가 어째서 긴고아에 의해 사로잡혔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상단전부터 강제로 봉인하려 하는가?’

상단전이 묶이면 긴고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과연 영악한 봉인 도구가 아닌가?

“맹주님!”

“대체 저게 무슨!”

당황한 남천맹 무사들이 둘 사이로 뛰어들려 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솟아난 황금 벽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이 역시 긴고아의 공능임이 분명했다.

무인들의 무공이 연신 황금빛 벽을 두드리지만 무너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는 황준우와 무각대사.

아니 긴고아와 황준우 단둘만의 싸움이 된 것이다.

과연 무각대사의 말대로 신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위력이었다.

[도와줄까?]

내심 흐르는 헛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황준우에게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기.’

[네가 이렇게 봉인되면 나도 저 땡중한테 끌려다녀야 하잖아. 그건 싫은데…… 어때. 부탁만 하면 내가 당장 저 고약한 주문을 못 외우게 혼내줄게. 이 밧줄만 풀어주라. 응?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걸 다시 잡는 건 일도 아니잖아.]

“시끄러.”

짧게 답한 황준우가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른 수왕검이 조여 오는 긴고아의 정면에 맞선다.

파지직-!

밀려들던 긴고아가 허공에 멈추고 강렬한 빛을 토한다.

“아미타불!”

무각대사가 거친 목소리를 토하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수왕검을 정면에 내세운 후 한 걸음,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황준우의 입가로는 웃음이 떠올랐다.

무각대사의 두 눈에는 경악이 비춘다.

“굉장한 압박감에 처음에는 엄청 놀랐지만 말이야. 이거, 불완전하지?”

“아미타불.”

무각대사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일전에 원공 영감이 일부를 사용한 탓인 것 같은데. 아쉽게 됐어. 얼마 전이었다면 이런 불완전한 물건으로도 봉인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주변을 둘러싼 찬란한 황금빛.

그 긴 테두리의 벌어진 틈새로부터 거대한 자연지기를 폭풍처럼 빨아들인 황준우가 손을 내뻗어 다시금 수왕검을 쥔다.

“아쉽게도 이런 걸로 지금의 나를 막을 순 없을 것 같네.”

짧은 말과 함께 황준우가 수왕검을 휘두르자 그 주변으로 거친 돌풍이 몰아친다.

황금빛이 폭발하듯 비산한다. 황준우의 주변을 감싸오던 긴고아는 다시 평범한 염주 알이 되어 허공으로 치솟는다.

“이, 이럴 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을 토한 무각대사더러 보라는 듯, 허공으로 떠오른 황준우의 검이 빛살처럼 휘둘러진다.

천하의 대요괴를 가두었던 절세의 신물.

긴고아를 이루는 염주 알이 절반으로 갈라져 마치 돌조각처럼 허망하게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기, 긴고아가…….”

“말했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모두 부숴버리겠다고.”

허탈하게 주저앉는 무각대사 앞으로 내려서,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소림이 자랑하던 신물, 긴고아가 파괴되었다.

자연스레 남천맹 무인들의 앞길을 막던 황금빛 벽도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무각대사 앞에 선 황준우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의 위선은 언제나 날 괴롭게 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라는 단어를 용인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내 삶이 정말 소중하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생과는 엄연히 달라. 지금 내 싸움은 한 명의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야. 나한테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은 게 원공 영감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절망하여 눈을 질끈 감은 무각대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려다본 황준우가 말을 끊고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어차피 지금 그의 귀에는 무엇도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고지식하고 딱딱한 무각대사의 머릿속에는, 막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그저 절망적으로 차오르고 있을 테니 말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