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60화
제 260화
“주공, 괜찮으십니까?”
황금빛 벽이 무너진 후 누구보다 빨리 다가온 홍산이 물었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또다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던 남천맹 무인들은, 무신의 신위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그 뒤를 쫓았다.
소림제일고수, 불존 무각대사와 십팔나한을 꺾었지만 눈앞으로는 무림맹과 세외까지, 아직 많은 적이 남아 있었다.
“우선은 항복권고다.”
황준우가 높이 들어 올린 수왕검 위로 거대한 황금빛 강기가 솟아나기 시작한다.
“거, 거기검!?”
몇 번의 전장에 나서며 강호에서 위명을 높인 경호의 청홍검을 떠올린 무인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아니, 저건…….”
하나 곧 그 시선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역시 크기였다.
경호의 거기검은 최대 크기일 때에도 삼 장(1장= 3M) 이내였다.
하나 황준우가 만들어낸 강기의 크기는 그 수준을 압도적으로 벗어났다.
오 장, 육 장, 팔 장, 순식간에 십 장 가까이 치솟은 강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보였다.
“무신.”
누군가 황준우의 존재를 눈치채고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굳이 보거나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천하에 누가 있어 이만한 강기의 검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무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무림맹 진영의 모두가 황준우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의 존재감에 전율하며 몸을 떤다.
갑작스럽게 최전선에 있던 무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사실조차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라.”
하늘 위에서부터 천둥과 같은 음성이 내리쳤다.
그 압도적인 위용과 목소리에 몇몇 무인이 망설임 없이 검을 놓고 등을 돌렸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에게도 맹주님이 계신다!”
누군가 외쳤지만 한번 압도당한 무림맹 무인들 사이에는 닿지 않았다.
작게 시작된 혼란이 점점 커져 간다.
“불가능해.”
“미쳤어! 우리가 무슨 수로 무신을 막는단 말이야!”
무기를 버리는 소리도, 비명을 내지르는 음성도 점점 많아져 갔다.
“빌어먹을!”
그 순간, 앞으로 나선 무인 몇몇이 달아나려는 무인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꿰뚫는다.
“현룡대(玄龍隊)는 무기를 버리거나, 달아나는 배신자를 처단한다.”
굳은 인상을 한 중년인의 말에 달아나려던 무림맹 무인들이 사색이 되었다.
“네놈들은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데!”
공황에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본인은 맹주님 직속부대 중 하나인 현룡대의 대주다다. 다시 말하건대 배신자들은…….”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던 중년인의 입에서 더 이상 음성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두터운 목 한가운데가 휑하다고 느껴 시선을 내리자 자신을 찾아온 죽음이 명확히 보였다.
‘대체…… 어떻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중년인, 현룡대주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시체가 된 현룡대주가 쓰러지고 달아나는 무림맹 무인들을 향해 검을 겨눴던 현령대원들 사이에서도 공황이 일었다.
하나 그 공황도 잠시였다.
투두두둑-!
아무런 소리도 없이, 심지어 빛살 하나 없이 무림맹 무인들 사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현룡대원들이 대나무 꺾이듯 우수수 쓰러져 내린다.
감히 그 흔적도 보지 못했지만, 누구의 손속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해산해.”
다시 한 번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제는 이십 장 이상 치솟은 거대한 검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고고고-!
“으아아!”
“도망쳐!”
빠르지는 않았다.
하나 대기를 가르고 떨어지는 소리가 공포 그 자체였다.
이제는 모두가 망설이기를 포기하고 무기를 버린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공을 익힌 무림인들답게 혼란 속에서도 그 걸음은 잽싸다.
그 모습을 다소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준우는 모두가 완전히 흩어져 나간 순간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검을 내리쳤다.
땅이 울릴 정도의 폭발이 일었고 달아나던 무림맹 무인들이 서로 엉켜 제자리에서 엎어졌다.
거대한 검이 떨어진 중심부에는 일천의 무인이 오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대한 길이 만들어졌다.
“달아나지 못했더라도 항복한 쪽은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 반항하면 그냥 죽여.”
마지막 명령을 남긴 황준우의 신영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맹주님 혼자 고생하시게 할 순 없지. 다들 가자!”
그 뒤를 따라 서문지언이 뛰쳐나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와아아-!”
위대한 무신을 따르는 일천 무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거대한 검이 지면에 맞닿은 순간,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던 남천맹 본대의 땅마저 크게 울렸다.
쿠구궁-!
“어이쿠.”
그 격렬한 흔들림을 견디지 못한 전왕이 신음을 내지르며 넘어졌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때에 놀란지라 오랜만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걸 느낀 전왕의 입가로 깊은 한숨이 연신 쏟아져 내렸다.
“후우, 후우…….”
황준우를 만나기 전, 전왕이 스스로가 가진 가능성을 몰랐던 것은 너무나도 작은 담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단점을 많이 보완하였지만 이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는 언제나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고 머리가 굳어지곤 했다.
“진정, 진정하자.”
이성을 찾아야지만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다행히 맹주님께서 잘해주고 계신다.’
땅이 울릴 정도로 거대한 검을 휘두른 것은 언뜻 불필요하게 보일지 모르나 아주 중요한 연출이다.
상대의 기세를 꺾고 단숨에 승기를 휘어잡는다.
대군을 상대로 오래도록 해야 할지도 모르는 전쟁 시간을 크게 압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정치를 모르시더라도 전쟁은 아시니 당연한 결과겠지.’
다행히도 황준우의 싸움은 굉장히 효율적인 편이다.
지금처런 긴박한 상황일수록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곧 돌아오시겠지.”
박동하던 심장을 가라앉히며,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전왕의 시선이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황준우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곧바로 손을 흔들기 위함이다.
‘어서, 어서 오셔야 할 텐데…….’
길지 않지만,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왕은 계속해서 발을 굴렀다.
“드디어 찾았네. 네가 전왕인가 하는 놈 맞지?”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온 때에는 또 한 번 심장이 철컹 내려앉았다.
“어, 어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뭐 중요하지는 않나.”
전왕의 귓가로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에는 등 뒤로 서늘한 감촉이 파고들었다.
붉게 부릅뜬 눈으로 등 뒤를 찔러온 검을 확인한 전왕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적……룡.”
검의 손잡이에 걸린 붉은 용두(龍頭) 장식을 사용하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수로……왕!”
그중 이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의 이름을 읊은 전왕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 얼굴을 확인한다.
흐릿한 시야 뒤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낸 독고문의 얼굴이 보였다.
“눈치가 빠르네. 맹주님이 주의 깊게 볼만하구먼.”
“어째…….”
“그런데 너무 질기다. 괜히 미안해지게.”
독고문이 검을 한 번 빼 들었다가 또 한 번 허리춤에 찔러 넣는다.
눈이 뒤집힌 전왕의 의식이 사라졌다.
다시금 검을 뽑아 들고, 그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독고문이 혀를 찼다.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나도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고 말이야. 흠.”
짧은 신음을 흘린 후, 유령각을 쓰다듬어 다시금 모습을 감춘 독고문이 목을 가다듬었다.
“적이다! 총군사께서 당하셨다! 어서 조취를!”
목소리가 크게 주변을 울린다.
“적이다! 총군사께서……!”
목소리는 발걸음을 따라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남천맹 진영 내로 울려 퍼졌다.
전쟁은 순식간에 끝을 향해 도달했다.
황준우가 신위를 선보인 이후, 맞서려 하는 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특히 애초에 무림맹과 크게 연관이 없던 세외의 무인들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무신의 위용이 그들의 상상을 압도적으로 벗어난 탓이다.
어떻게 태세를 바꿔 새로운 이익을 꿈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현재 강호 무림에 군림한 무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악만을 남긴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훗날 무림이차대전이라 불릴 정도의 큰 전쟁의 마지막 회전은 그렇게, 몇 없는 사상자만을 남겨둔 채 종결되어 가고 있었다.
‘진무영이 없어.’
혹시나 그가 기척을 감추고 숨었을까, 무림맹 진영 곳곳을 살핀 황준우의 얼굴에는 점점 짜증이 어렸다.
애초부터 모든 문제의 발단은 진무영이다.
그가 전쟁을 만들었고, 쓸데없는 피를 뿌리게 하였다.
또한 경호를 죽음의 경계선 인근까지 흘러가게 만들었다.
아니, 애초에 진무영이라는 인물 하나 탓에 고생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겠다.
그리 결심하였는데 상대는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이미 달아났던 건가?’
그런 시간이 일각 가량 더 흐를 무렵 황준우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곧장 직감이 위험을 선고한다.
“빌어먹을!”
거칠게 욕을 내뱉은 황준우의 걸음이 단숨에 남천맹 본진으로 돌아섰다.
경호가 죽을 정도로 당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어 눈이 멀었었다.
무조건 진무영이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 보았지 않던가?
진무영은 그 정도로 훤히 보이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눈치도 빠르고 영악하다.
단순히 스스로의 무력(武力) 혹은 권능을 믿는 마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난적이다.
제갈세가의 진법 혹은 황준우의 도착이라는 변수 모두가 그의 계산에 들어가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놈이 어디로 갔지?’
혼탁한 생각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전왕 혹은 사마정.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을 찾아 본진에 도착한 황준우는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뭐? 전왕이 당했다고?”
“예. 위험할 정도의 상태는 아닙니다만…….”
앞에 선 무인의 조심스러운 음성에 황준우의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내가 완전히 당했구나.’
진무영은 생각보다도 더 영악하고 무서운 인물이다.
분노에 눈이 멀어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를 간 황준우가 깊은숨을 몇 번이고 몰아 내쉬었다.
“전왕은 분명히 무사한 거지?”
그렇다면 어째서 진무영은 전왕을 죽이지 않았을까?
이만큼 다치게 할 수 있었다면, 분명히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한데 살려두었다.
생각은 깊게 이어지고, 황궁으로까지 이어졌다.
순간 짧은 깨달음이 황준우의 머릿속에 내리쳤다.
‘놈은 판을 혼란스럽게 하려 하고 있어!’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황준우의 발목을 잡기 위함이다.
시간을 벌려 하고 있다.
생각이 멎었다.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진무영이 원하는 게 그뿐이라면, 방법은 간단해.’
걸음이 재빨리 이어졌다.
병상에 누워 고른 숨을 내쉬는 전왕을 확인하고는 기운을 복 돋아주는 과정까지도 조금의 지체가 없었다.
직후 전왕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읽은 황준우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아직 멀리 못 갔군.’
주고치의 주변에도 한동안 머물렀던 익숙한 기운이다.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부턴 제대로 쫓아주마.’
황준우의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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