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67화
제 267화
만금장은 건재하다.
불도 모두 꺼졌으며, 이렇다 할 정도로 분위기가 처져 있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사로잡았다.”
황석후는 황준우와 진무영이 떠난 직후 곧바로 소향원을 향해 뛰어가, 날뛰는 두 사람을 제압했다.
오칠과 담소청.
둘 모두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고수였지만 만금장이 가진 저력은 진무영의 생각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소향원 안쪽에도 충분한 방비 병력이 있었으며, 사대호위 중 청소오가 적매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터였다.
“무림맹주는…….”
“죽었습니다.”
황준우의 말에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인다.
“그렇겠지. 그런 위험한 기운 가까이에 있었으니…….”
이후 황준우를 바라보는 황석후의 입술이 달싹이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드디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눈빛에 의지가 어렸다.
“네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
“이번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기별을 넣을 테니 멀리 가지 말고 집에 잠시 있어 줄 수 있겠느냐?”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던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는…….”
“다행히 소란을 직접 마주하지는 않은 것 같더구나. 피곤한지 잠을 자고 있으니 조금 이따 일어나면 기별을 넣으라고 하겠다.”
모든 사건이 끝났다.
서시의 안위까지 확인하며, 확실하게 현실을 깨달은 황준우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그런 황준우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석후가 어깨를 두드려준다.
“무거운 짐을 맡겨 정말 미안하구나.”
“에이, 뭐. 아직까지 정정하시잖아요. 제 걱정이라고 해봐야…….”
황준우의 눈이 황석후의 머리 위로 희끗희끗하게 비치는 흰머리를 향한다.
자신이 나이가 드는 만큼, 아버지도 늙어간다.
이번 사건으로 언령을 제법 사용하였을 테니 그 속도는 더욱 가속화될 터였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물론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황석후가 부담을 느끼거나, 만류할 것이 분명할 터이니 말이다.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만 살아주세요. 그게 제 소원입니다. 아버지.”
단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전할 뿐이다.
“물론이다.”
황석후가 자신만만한 미소로 답했다.
황석후를 만나 가족들과 만금장 전체의 안위를 확인한 황준우의 걸음이 향한 곳은 오칠과 담소청이 갇힌 임시 감옥이었다.
꽤나 많은 상처를 입고, 좋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어떠한 해방감을 느끼는 듯 평온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이다.
“궁왕 그리고…… 의선.”
담소청을 보는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의선이라는 별호는 유명하다.
또한 그의 이름도 강호 전체에 잘 알려져 있다.
하나 실제 담소청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인물은 적다.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납득이 갈 사연 하나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검선을 포함해서, 죽을 사람 몇몇을 살렸었다지?”
아마 대부분이 전생의 황준우에게 당해 큰 내상 혹은 외상을 입었던 인물들이다.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강호의 이름 높은 인물 몇몇이 몇 번의 전장을 거치다 보면 다시 눈앞에 나타나고는 한다.
그 모든 사연이 의선의 손을 거쳐 벌어졌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쉽게 잊기 힘든 이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연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담소청이 황준우를 보며 웃음을 흘린다.
“맹주께서는……?”
오칠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건넨다.
“죽었어.”
“역시 그렇겠지요.”
이미 예지하고 있던 상황을 확신하게 된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다. 이윽고는 고개를 주억이고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무신께서 진노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을 치시려면 그리하시고, 벌을 주려 하신다면 또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담소청의 담담한 말에 화답하듯 오칠이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황준우의 눈이 붉어졌다.
“……어이가 없군.”
“음…….”
“늙은 영감들이 고집스럽게 살다 보니 제 생각밖에 못 하게 되었나 봐.”
입가로는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죽이라고? 벌을 달라고? 그렇게 해서 제 마음 편해지면 전부 끝이라고 생각한 건가?”
황준우의 차가운 음성에 두 사람의 몸이 흠칫 떨린다.
“모든 걸 초탈한 듯, 잊어버린 듯 헛짓거리하지 마. 당신들 때문에, 진무영 그 개자식 탓에 필요 없는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그리고 그중에는 내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친구의 목숨도 함께 흘렀다고.”
“본래 큰일에는 희생이…….”
“큰일! 대체 무슨 큰일이 있었는데? 진무영 그 빌어먹을 변태 놈이 하고자 한 일에 대의(大意)가 대체 어디에 있었냐는 말이다.”
“말이 과하시오! 맹주께서는 하나 된 무림의 평화를 꿈꾸셨소!”
죽은 것만 같던 오칠의 얼굴에 붉은 열기가 떠오른다.
“역시 겉으로만 초탈한 척했었던 거군.”
그런 오칠을 보며 이죽거린 황준우가 오칠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궁왕. 네 말대로 진무영 그놈이 하나 된 무림의 평화를 꿈꿨다고 하자. 그런 녀석이 황궁까지 흔들면서 세외 세력을 끌어들이고 판을 이렇게 키워? 그렇게 해서 놈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는지…… 정말 알고나 있나?”
안도한 집안의 모습에 다소 가라앉았던 황준우의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진무영은 큰 적이었다.
새 삶을 산 이후 황준우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대의를 가지고 있었단다.
코웃음이 나올 일이다.
“무신께서야말로 아무것도 모르시오. 세외의 적은 언제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려웠을 뿐이지요. 무림맹주께서는 그런 곤란한 자들을 중원 안쪽으로 깊이 끌어들였습니다. 뿌리까지 통째로 들어다가 말이지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오칠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분명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그분은 진정 무림의 안녕과 일통을 원하셨소.”
오칠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식이 담겨 있다.
황준우조차도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다르다.
분명 조금 다르다.
무림일통, 그로 인한 천하의 안녕.
목표의 하나로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진짜 그것만을 원했다면 진무영의 마지막 선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오칠도 진무영의 끝을 몰랐을 뿐이다.
잡고 있던 멱살을 놓자, 바닥에 나뒹군 오칠이 신음을 흘렸다.
“의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적어도 천하일통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믿었을 따름입니다.”
담소청은 오칠과 조금 다른 말을 했다.
하나 눈빛에 회한이나 후회는 묻어나지 않는다.
“멍청한 영감들.”
황준우는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렸다.
오칠과 담소청.
두 사람 역시 결국 이용당했을 뿐이다.
알고 있다.
복수는 두 사람이 아닌 진무영에게 해야 할 일이다.
하나 진무영은 이미 죽었다.
최후의 순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이승을 떠났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황준우의 성에 차지 않았다. 조금 더 괴로워야 했다.
아니, 아주 많이 더 괴로워야만 했다.
가능만 하다면, 놈이 유계로 흘러가 마왕이 되기를 바랄 정도였다.
하나 그는 황준우가 어찌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죽은 자를 되돌릴 수도 없다.
결국 황준우가 할 수 있는 작은 복수는 진무영에 대한 것을 지워내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가진 선의(善意)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놈이 선택한 최후의 수는 나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고 있나?”
“…….”
오칠의 몸이 떨린다.
담소청 역시 시선을 회피한다.
‘이 둘…….’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다소 뜨겁게 달아올랐던 황준우의 뇌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설마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믿었다고?”
“맹주의 의지는 강철과 같았고…….”
오칠이 붉어진 눈으로 황준우를 향해 말했다.
“멍청하군. 답답할 정도로.”
“늙은이들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담소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어.”
“무신께서 그만큼 압도적이셨던 탓이겠지요.”
“…….”
아랫입술을 깨문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애초에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맹주께서는…… 평생 무신 한 분만을 동경했습니다.”
오칠의 뒷말이 이어진다.
“고독한 절대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던 겁니다. 조금쯤…… 죽은 맹주의 마음을…… 꺽!”
다시 황준우가 등을 돌려 오칠의 목을 강하게 움켜쥔다.
“나한테 진무영에 대한 자비를 바라지 마. 다소 과한 게 아니야. 결국 그놈은 자신의 외로움을 빌미로 선배, 스승, 동문 모든 사람에게 상처만을 남겼지. 놈의 시체는 들짐승들의 먹이로 버려두었다. 쌓은 업이 있는 만큼 갈기갈기 찢겨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겠지.”
“아아…….”
오칠의 붉은 눈가로 눈물이 흐른다.
움켜쥔 숨통이 졸라오는 탓은 아니었다.
가슴이,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황준우가 사마정의 죽음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리라.
“결국 당신들도 놈과 다를 바가 없어.”
목을 놓은 황준우가 등을 돌려 감옥 밖으로 향한다.
더 이상 뒤를 따르는 말은 없었다.
대신하여 흐느끼는 울음소리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사마정.”
황석후의 배려로 소향원 내에 고이 모셔진, 죽은 친우의 시신에 차가운 한기를 흘리는 황준우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의 죽음을 인지한 이후 곧장 한기로 얼려 놓은 덕에, 마지막 지었던 평온한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 사실이 그나마 황준우의 마음을 크게 위로해주었다.
“가는 길이라도 행복했던 거냐.”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미안하다, 마음이 좁은 친구라 네가 고생이 더 많았겠지.”
조금 더 일찍 해주고 싶었던 말을 너무 많이 남겼다.
그것이 황준우의 한이다.
“심지어 모자란 친구라 실수도 많았었지.”
한은 또다시 사마정이라는 이름의 잔재를 가슴 한편에 쌓기 시작한다.
“고맙다. 끝까지. 너무 고마웠어.”
차가운 손을 꼭 움켜쥔 황준우의 손끝이 떨린다.
“내가 너를 평생 기억할게.”
손끝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진다.
찍찍찍-!
어느덧 주변으로 나타난 붉은 눈의 쥐들이 어딘지 모르게 구슬픈 울음소리를 함께 울렸다.
너무나 소중했지만 소홀했던, 고마운 친구를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남천맹 무인들이 모두 안휘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후 주요 간부들은 만금장을 향했다. 사마정의 죽음과, 만금장의 급습 사건을 전해 들은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감정으로 머리가 복잡할 터였다.
황준우는 그간 다소 힘들어 보이던 서시를 위로했다.
직접적으로 눈에 맞닿은 사건은 없었지만 집안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화재까지 일어났을 정도였으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야 불 보듯 뻔했다.
다행히 황석후는 그런 사건을 겪은 이후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고, 서시 역시 생각보다는 마음이 강한 편이었다.
만금장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남천맹 간부들이 모두 소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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