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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69화 (269/373)

학사재생 269화

제 269화

황궁이 안정되었으며, 진무영이 죽고 무림맹이 해산되며 남천맹의 이름 아래 강호가 주도되고 있다. 다소 급작스러운 변화였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중원 내외로 황준우라는 무신을 겪은 탓이다.

시간이 더 흐른 뒤라면 모르겠지만, 당장은 중원 무림과 세외 무림 모두 황준우와 적대할 생각은 없을 터였다. 강호무림에 있어 압도적인 힘이란 그 어떠한 부와 권력보다 위협적이었으니 말이다.

황준우가 굳이 남천맹 본단에 자리를 잡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름 하나만으로 천하를 아우르고 있다.

지배하지 않고 군림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 만큼 황준우 역시 제법 마음이 풀려 있었다.

‘한데 오늘은 기분이 묘하네.’

찾아온 손님들의 기척이 낯설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가 굉장히 익숙했다.

‘세 사람이라…….’

백교와 신아, 제갈량.

어울리지 않는 듯, 굉장히 납득이 가는 조합이다.

그중 오랜만에 보는 스승인 백교에 대한 반가움은 굉장히 컸다.

하나 단순히 가볍게만 생각하기에는 느낌이 묘했다.

“뭐, 만나보면 알겠지.”

“아니, 다녀온다고. 이따 보자.”

경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 황준우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황준우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바람이 지나간 흔적만이 남았을 뿐이다.

“오오, 저기 오는군요.”

백교가 입가를 가리고 있던 하얀 부채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 순간 황준우의 모습이 그들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그를 보자마자 의문을 터트린 이는 다름 아닌 신아였다.

“저 여우는 또 뭐야?”

다음은 제갈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황준우의 팔목 한편에 묶여 힘없이 축 늘어진 달기를 본 탓이다.

“도사? 아니 신선이잖아!”

굉장히 지친 표정을 짓고 있던 달기가 신아를 알아보고는 함께 소리친다.

“시끄러워.”

황준우가 가볍게 손목을 몇 번 떨치자 경악한 표정의 달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직전 들려 올리기를 몇 번 반복한다.

“꺄아아악-!”

엄청난 비명을 내지르며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달기의 모습을 보는 신아의 표정에 황당함이 어렸다.

“저거 분명 마왕인데?”

“달기, 맞는 것 같죠?”

제갈량이 백교를 향해 동의를 구했다.

“예. 뭐…… 꼬리가 몇 개 없어져서 비참한 꼴이긴 합니다만…….”

“굳이 꼬리 탓만은 아닌 것 같은데.”

“살려줘어어-!”

신아의 말대로, 허공과 지면 사이를 무한 반복하는 달기의 모습은 어딜 보아도 안쓰럽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이제 좀 조용하겠네.”

그렇게 한참을 허공에서 비명을 토하던 달기를 단숨에 지면에 내던진 황준우가 가볍게 말한다.

“우욱, 욱…….”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채 노랗게 뜬 안색으로 괴로워하는 달기를 바라보는 신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살다 살다 마왕을 가지고 노는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죽이는 것이 만사형통이 아니니까, 귀찮은 일이지.”

얼굴 전체에 번거로움을 여실히 드러낸 황준우가 신아를 지나쳐 제갈량을 향한다.

“조금 갑작스럽긴 한데, 다들 나 찾아온 것…… 맞죠?”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곳은 백교였다.

“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주 잘 컸죠. 스승님은…… 여전하시네요?”

“후후.”

두 사제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부채를 펼친 백교의 눈에서 광망이 터져 나왔다.

“논어, 학이편, 일장!”

부채를 길게 뻗은 이후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힘이 실린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곧 학문이고 배움이라! 집에서 효도하고 웃어른께 공손하며 신의를 지킬 줄 알고 차별이 없을 때에야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씀 또한 이와 같은 이치와 닿아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

백교가 눈을 반짝 빛내며 부채를 접었다.

“과연. 훌륭하십니다. 깨달음의 깊이가 어린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시로군요.”

입가에 번진 미소는 밝을 정도로 환하다.

“후후, 과찬이십니다.”

코를 슥 비빈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생각도 못 했던 두 사제의 촌극에 자연스레 신아와 제갈량의 표정에는 더 큰 황당함이 떠올랐다.

“자자, 그러면 두 번째로…….”

입을 여는 백교의 몸에서 은은히 열기가 흘러나온다.

맞받아치려는 황준우의 눈에도 의지가 가득했다.

“잠깐!”

놔두었다가는 한참이나 이어질 것 같은 학문강론에 앞으로 나선 신아가 팔을 길게 벌렸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이야기 하러 온 건 아니잖아!”

“아, 그랬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백교의 눈에서 열기가 사그라든다.

그때가 되어서야 황준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알 수 없는 기세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음…… 다소 흥분했네.”

“다소?”

황준우의 말에 제갈량이 반문을 보낸다.

다만 본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한데 본론이 따로 있나 보네요? 전 사실 이 녀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 했었는데.”

황준우의 시선이 지쳐 쓰러져 잔경련만을 보이고 있는 달기를 향했다.

“오히려 이쪽은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일이라고 해야겠지.”

신아가 고개를 내젓는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일부러 몸을 숨기려고 제 꼬리까지 자른 것 같은데.”

“일부러? 설마 애초에 날 속인 건가?”

황준우의 시선이 쓰러진 달기를 향했다.

어째서인지 잔경련이 더욱 심해진 듯 보였다.

“자자, 뭐. 어쨌든 잡아놓은 마왕 따위야 아무렴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훌륭한 일을 해냈군요.”

신아가 고개를 주억이고 제갈량의 눈에도 흐뭇함이 어린다.

“뭐…… 백 선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제갈량의 말에 머쓱한 웃음을 흘린 백교가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린다.

그 속에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장난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신아가 목을 가다듬을 때였다.

“아, 그 부분은 잠시만요. 사실 정말 중요한 분이 아직 안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요.”

백교가 손을 들어 신아를 만류했다.

“중요한 분? 이 어린 녀석에게 본론이 있던 게 아니었느냐?”

“말씀대로, 어리니까요.”

백교가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그리고 때마침, 만금장 내에서 하나의 기척이 더 빠져나왔다.

느긋한 걸음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석후다.

“과연…….”

신아와 제갈량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황준우의 부름에 웃음을 보인 황석후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때가 왔다고는 생각했지만, 조금 이르구나.”

분명 얼마 전, 황석후는 황준우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아마 이쪽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황으로 분위기를 파악한 황준우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금방이라도 말해 줄 듯하면서도, 고심이 깊어 보이던 황석후였다.

황준우는 여태껏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천하는 안녕을 찾았고, 시간은 여유롭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하나 이제는 더 이상 황석후도 미뤄둘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된 게 분명했다.

“우선, 다들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만금장 내부의 접객당에 들어선 후, 뜨거운 찻잔만 몇 번이고 비워졌다.

모두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두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관심이 쏠린 측은 분명했다.

‘아버지.’

진중한 얼굴을 한 그의 표정에 깊은 고심이 어려 있었다.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던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깊은 한숨이 입 바깥으로 몇 번이고 쏟아진다.

“후우…… 세 분이 찾아오셨다면 사실 이미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까지 이르렀다고 봐야겠지요. 특히…….”

황석후의 시선이 세 사람 중, 중심에 앉은 백교를 향한다.

그 역시 답지 않은 난감한 표정이 얼굴에 어려 있다.

짧은 시간 그런 백교와 시선을 나누던 황석후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신 것만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장성하였다 하여도 부모의 마음속에서는 어린아이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고심을 이해 못 할 일이 아닙니다. 대인.”

“고맙습니다. 백 선생. 하나 아시겠지만…… 결국 결정은 준우 본인이 내려야 할 일입니다.”

옆에 앉은 두 부자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본다.

“전 준우를 믿습니다.”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까지, 말없이 기다리고만 있던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시선은 황석후를 떠나 마주 앉은 세 사람을 향한다.

눈에는 흥미가 가득 깃든 채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세계에는 비밀이 많다.

그리고 황준우는 그중 일부를 엿보았다.

하나 아직 남은 비밀이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눈앞, 세 사람은 그 비밀의 문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면 모를까.

재생에서부터 이어진 유계, 마왕, 우주에 이은 멸망의 새까지, 무엇 하나 모른 척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멸망.’

자칫하면 황준우가 만들어낸 모든 안녕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위험한 단어다. 자연스럽게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해 보죠.”

백교가 부채를 들어 올려 허공에 긋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빈 공간에 선명한 선이 남는다.

선은 곧 곡선이 되고, 어떠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둥글고, 뭉툭하고, 아무런 기준이 없어 보이는 형태에, 네 쌍의 날개가 그려진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여섯 쌍의 다리다.

그것으로 끝.

부채를 내려놓은 백교가 웃음을 짓는다.

“혹시 무엇인 줄 아십니까?”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괴상한 모습을 한 생명체.

그를 바라보는 황준우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단어는 역시 요괴였다.

하나 본능이 그를 부정한다.

‘이게 요괴라고?’

분명 건성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허망한 그림인데 기이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 생동감은 신령(神靈)하다는 느낌까지 전해 준다.

“아…….”

허공에서부터 붉은빛이 흘러나온 순간에는 짧은 감탄마저 흘러나왔다.

‘영물? 아니 그보다 더…….’

대체 무엇일까.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령스러운 생물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생각은 곧장 입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눈은 마치 화등잔만 하게 크게 뜨인다.

“멸망의 새!”

백교와 신아를 지나쳐 제갈량을 향한 시선이 묻는다.

단순한 형태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신령함과 존귀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멸망이라기보다는, 창조를 가져올 것 같은, 따뜻한 빛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 또 한편으로는 무서울 정도의 깊은 어둠이 느껴진다.

진무영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왔던 우주의 일부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무게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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