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2화
제 272화
1. 곤륜으로
‘드디어 이곳에 섰구나.’
봉천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허리 숙인 궁인(宮人)들을 내려다보는 주연하의 마음에 거대한 물결이 인다.
“황제(皇帝).”
참으로 무거운 단어를 제 입에 담아본 입가에는 쓴웃음이 번졌다.
‘온건히 내 손으로 일구었다 할 수 있겠는가?’
고개가 내저어진다.
수많은 우연과, 도움이 겹쳐진 결과다.
어쩌면, 본래 이 자리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위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외면할 수는 없지.”
우연이든, 운명이든 좋았다.
결국 주연하는 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간절히 원했던 바였다.
이제 그녀는 머리에 금관(金冠)을 쓰고 몸에 용포를 둘렀다.
드넓은 대륙의 두 번째 여황제로서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훌륭한 황제가 되겠다.’
결심을 마음에 새긴 주연하가 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때였다.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 감각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 전신의 감각이 둔해졌다.
세상은 회백색으로 물든 듯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런 주연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소 검푸른 눈동자를 한 장발의 사내다.
굳어진 세상에서도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예쁘네. 무조(武照) 녀석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데. 어떻게 생각해. 묘?”
“…….”
아니,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감정 하나 없는 표정을 한 탓에 알 수 없었지만 차가운 안색의 여인 역시 굳어진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누구?’
주연하는 의문을 표하려 하였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연스레 심장 한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 한 발자국.
완성된 자리 위에 오를 일만 남은 시점에 벌어진 기이한 일이다.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분명 상상한 적 한 번 없는 재해(災害)였다.
“자, 우선 자기소개부터 할까. 내 이름은 영정(?政), 뒤에 녀석은 청묘(淸猫)야. 너는 주연하, 맞지?”
“…….”
“응? 왜 대답이 없어?”
영정의 눈매가 찌푸려질 때였다.
“정. 지금 기운의 흐름을 막아두셨습니다만.”
한숨을 내쉰 청묘가 입을 연다.
“아아, 맞다. 맞다. 이 아이는 빼먹는다는 게 깜빡했네. 내 실수.”
시원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을 지은 영정이 검지와 중지를 부딪친 순간이었다.
“후아……!”
주연하의 입에서 거친 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오한으로 떨리는 몸에서는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는 않았다.
지면에 발을 강하게 디디며 흩날린 용포 사이에서 검과 함께 강기가 솟아난다.
영정의 목을 노리는 기운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해 보였다.
하나 베지 못한다.
힘줄 하나 돋아나지 않은, 다소 여려 보이는 하얀 피부의 얇은 목에 닿은 강기가 괴이한 울음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져버린다.
자연스레 주연하의 눈에는 경악이 어렸다.
“금강불괴(金剛不壞) 처음 보나? 신기하지? 하긴, 쉽게 볼 수 없겠지. 나처럼 잘 난 놈이 아니면 누가 해내겠어? 우후후.”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웃음을 터트린 영정이 주연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차 한 순간에는 그녀의 목덜미에 영정의 팔이 길게 둘러진 채였다.
“자자, 무리해서 싸우려 하지 말자고. 미리 말하지만 넌 절대 날 못 죽여.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 난 너무 잘났거든.”
긴 머리를 반대편 손으로 가볍게 흩날린 영정이 진한 웃음을 보인다.
“……정. 목적을 잊으신 듯합니다.”
그런 그를 한심한 눈동자로 바라본 청묘가 굳어 있는 다른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마 일각도 못 버틸 텐데요.”
“아차차. 맞아. 다 죽일 생각은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 짧게 대화하자. 주연하.”
푸른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온다.
순간 독한 시선을 보내던 주연하의 몸이 굳어졌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진다.
“내가 제법 재미있게 지켜보던 미친 녀석이 하나 있거든. 진무영이라고, 혹시 알아?”
“활협단주…….”
주연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을 열어 음성을 흘린다.
“아아, 그런 이름으로도 활동했었지. 하지만 그건 좀 예전이고. 어쨌든 녀석이 마지막에 황궁으로 왔거든. 그리고 무슨 전쟁을 벌이는 것 같던데, 죽어버렸어. 혹시 뭐 아는 것 있나?”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모르나 본데.”
영정의 시선이 청묘를 향한다.
“애초에 그녀와 그의 접점이 너무 얕습니다.”
“그런가. 곤란한데…….”
검지로 윗머리를 살짝 긁은 영정이 기억났다는 듯 박수를 쳤다.
“황준우. 너 그 녀석이랑 제법 친하지?”
“…….”
여전히 입은 열리지 않는다.
대신하여 주연하의 몸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오, 내 술법에 반항하는 거야? 이거 봐. 청묘! 무조 녀석도 견디지 못했는데 이 녀석 굉장하잖아!”
놀랐다는 듯 감탄을 토한 영정이 뒤로 물러나며 박수를 쳤다.
“정. 거듭 말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에이, 아무렴 어때. 그냥 여기 있는 녀석들 다 죽이자. 나 그보다 이쪽이 더 호기심이 생긴다고.”
“정…… 그래놓고 뒤처리는 또 제게 맡길 생각 아니십니까?”
“어, 그야, 뭐…… 그러려고 키운 거잖아?”
굳어 있던 청묘의 눈이 날카롭게 솟았다.
이후 짙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떨고 있는 주연하의 손목을 잽싸게 훔쳐 품에 끌어안는다.
“데려가죠.”
“어차피 굳이 여기서 끝을 봐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아, 확실히. 데려가면 또 달리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고…….”
눈을 반짝 빛낸 영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결정을 내린 영정의 손이 허공을 몇 번 두드린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반은 흑색, 반은 청색으로 이루어진 문이 솟아올랐다.
“자, 그러면 집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문을 활짝 연 영정이 상쾌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손짓한다.
“가자, 묘.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오겠네.”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간 영정의 부름에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청묘가 문득 품에 안긴 주연하를 바라본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어. 네 희생은 숭고하게 기록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편해지는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해.”
검은 동공이 점점 연해지는 그녀를 향해 짧은 말을 남긴 청묘 역시 붉고 푸른 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굳어져 있던 세상이 다시금 생기를 되찾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우에엑-!”
바닥을 적시는 땀방울을 쏟아내며 거친 호흡을 내뱉던 이들은 금관을 쓰고 있던 곧, 새 황제가 되었을 여인이 사라진 사실을 깨닫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폐,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금의위!”
역사에 기록되었어야 할 대륙의 두 번째 여 황제는, 그렇게 종적을 감추었다.
황석후의 결정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던 백교는 얼굴을 굳히고 입을 닫았다.
며칠, 조용한 나날이 흘러갔다.
그사이 황준우는 황석후와 대면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황석후가 그간 입을 닫고 있던 가문에 관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만금장의 역사는 짧지 않다.”
“증조할아버지 대에서 시작이었던가요?”
“네게는 그렇게 되겠지.”
어느 상가(商家)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만금장 역시 그 시작은 조촐하였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시작이 낭인 집단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오래도록 낭인 생활을 하던 황준우의 증조할아버지, 황치우와 그를 따르는 동료들이 안정적 생활을 바라며 강소에 자리를 잡아 만금표국을 세웠다.
다소 거친 낭인들의 모임에서부터 출발했지만 강력한 통솔력을 가진 황치우와, 그를 잘 따르는 동료들 덕분에 만금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소성 전체에 이름을 알렸다.
“뭐, 당연하지만 우리 가문에도 비전무공이 있기는 하단다. 너와 서연이에게는 달리 필요 없을 듯하여 보이지도 않았다만…….”
“아, 그거라면 이미 봤어요. 황금일천공 맞죠?”
“이미 봤구나. 하긴 찾고자 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니.”
황석후의 집무실 한편에는 무공서적을 보관한 책장이 있다. 자주 열어보지 않아 먼지가 쌓였지만, 무공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황준우는 그를 펼쳐본 적이 있었다.
“제법 괜찮던데요.”
“하나 너와 서연이의 그릇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음…… 확실히.”
황금일천공은 사내를 위한 무공이다.
그렇다 보니 황서연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또한 황준우에게는 천조신공이 있었다.
결국 황석후는 애석하게도 가문의 무공을 자랑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황금일천공은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공이란다. 기왕이면 손주의 그릇이 너무 크지 않게 태어나 물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황석후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천조신공은 천재를 위한 무공이다.
황준우 스스로 만들어 놓고도 그 끝을 보지 못할 정도가 아닌가? 때문에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선자기공은 여아에게 더 특화되어 있다.
사내에, 범재라면 황금일천공이 더 훌륭한 보탬이 되어줄 터였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애초부터 우리 집안사람들 대다수가 조금 비정상적인 거지, 일반적으로는 범재(凡才)로 태어난다고요.”
“아, 그게 나름의 비밀이 있단다.”
“우리 집안이 상가로서 크기 시작한 시점 말이다. 네게는 할아버지, 그러니까 내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게 있어 증조할아버지께서 백 선생을 만난 데서부터 발단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선생님 나이를 제대로 묻지 않았네요.”
“내가 알기로는 아주 오래 전, 천하의 태동(胎動) 당시부터 살아오셨다고 들었다.”
“……얼마 전이었으면 상상도 안 갔을 이야기지만 왠지 납득이 되네요.”
“아마 조만간 백 선생 본인꼐서 진명(眞名)을 알려주실 게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증조 할아버지가 스승님을 만난 시점까지요.”
“아아, 맞다. 요즘 나이가 들긴 하나봐. 이렇게 깜빡 한다니까. 하하.”
“…….”
황준우는 말 없이 황석후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근래 황석후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졌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단순히 세월의 흐름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근래 들어 더욱 지쳐 보이는 모습이 분명 언령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왜 고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석후의 말대로 가능하다면 언령을 황준우 본인이 물려 받고 싶었다.
더 이상 황석후가 고생을 하는 것은 원치 않는 탓이다.
“어쨌든, 한참 번창하고 있는 만금표국에 백 선생이 찾아오셨다. 영혼이 가장 맑은 이의 흐름을 쫓아왔다고 하셨다던데…….”
“그 무슨 사기꾼 같은 말씀을…….”
“푸하하. 그렇지.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도 당장 내쫓으려 하셨는데, 알다시피 실제 정체가 범상치 않은 분 아니더냐.”
“그렇죠.”
황치우는 백교의 실제 모습을 보고, 세계의 비밀 중 일부를 엿듣는다.
이후 백교는 몇 가지 대가를 이야기하며 가문에 축복을 내린다.
“그 축복이란 게…… 가문의 번성에 큰 힘이 되었다는 거죠?”
“옳다.”
“점점 스승님의 진짜 정체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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