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4화
제 274화
신선 중의 신선, 최상급 신선에 해당하는 서왕모가 직접 기르는 반도는 선계의 보물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물건이다.
당연히 얻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반도가 나무에서 피기까지는 최소 삼천 년에서 길게는 구천 년까지도 걸리니 아무에게나 나누어줄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긴 역사 속에서도 서왕모에게 반도를 얻은 인간의 수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반도를 얻은 인물들 대다수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졌다.
“눈치가 빠르구나.”
자신이 말할 기회를 잃은 것이 섭섭한지 입술을 내민 신아가 퉁퉁거렸다.
“지난 시간 곤륜을 통해 선계와의 접촉을 요구했습니다.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으나 결국 반도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요. 다만, 공자께서 직접 가지러 가야 합니다.”
“그렇군요. 공짜는 아니겠죠?”
황준우의 질문에 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선다.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을 게다. 멸망을 막아서면서, 이미 네가 가지고 있는 인과의 수치가 말도 안 되게 높아진 덕이다.”
“아, 그렇군. 그 일도 일종의 인과에 연관된 대가가 되는 건가.”
황준우는 신아로부터 받은 보패, 늠군의 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여의 형식이고, 그를 갚아내기 위해서 곤륜을 위한 일을 해줘야 하는 대가가 있다.
멸망을 막은 행위가 그 대가에 들어간 것이다.
“맞습니다. 규모가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멸망시가 움직였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고, 나름대로 최후의 보루마저 떠올렸단 차였으니까요.”
“최후의 보루?”
“에…… 역시 비밀입니다.”
“그러시겠죠.”
이제는 제법 적응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장 황준우에게 필요하다면 백교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백교의 행동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늠군의 관 하니까 말인데. 이제 이거 슬슬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시선을 신아에게 돌린 황준우가 품에서 늘 챙겨 다니던 늠군의 관을 꺼내 들었다.
잠시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신아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되었다. 그냥 계속 네가 쓰도록 해라.”
“말했듯 내가 쌓은 인과의 수치가 적지 않다. 반도를 얻고 나서, 늠군의 관까지 소유권을 완전히 양도받는다 한들 부족함이 없을 정도지.”
“아하, 근데 만약 그렇다고 해도 필요 없는 물건에 굳이 그 대가를 쓸 필요는 없지 않아?”
“예끼, 이놈!”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신아가 눈에 불을 켠다.
“파의 일족은 천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술법에 능하였던 일족이다. 그들의 왕이었던 늠군이 머리 위에 얹고 있던 관이다. 이미 너도 몇 번 느껴 보았겠지만 단순히 술법의 성장을 돕는 정도의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가지고 다니면 다 효용이 있을 터이니, 헛소리 말고 받아두어라.”
“음…….”
“저도 지선 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사실 늠군의 관에 값어치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니까요. 다소 대가를 치르더라도 받아두시지요.”
백교까지 나서서 황준우를 말린다.
“확실히…… 아직 그 끝을 못 보기는 했죠.”
몇 번이고 황준우가 위험할 때마다 나서서 새로운 힘을 보여주었던 늠군의 관이다.
그만큼이나 훌륭한 물건이란 것은 확실하였기에 더 이상은 황준우도 망설이지 않았다.
“좋았어. 그럼 이 물건. 확실히 내가 받는 거다.”
“곤륜의 이름으로 만금장의 자손 황준우에게 양도하도록 하마.”
황준우의 질문에, 진중한 표정이 된 신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황준우는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급물살을 탄 듯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를 쫓아, 아직까지도 몸속 가득 남아 있는 묘한 기운을 느낀 황준우가 감탄을 토했다.
자연지기나 어떠한 기운과는 성질이 달랐다.
어떠한 의도를 통해 늘릴 수도 없고, 줄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게 그 인과의 수치란 건가?”
“우주를 삼키더니 인과마저 느끼는 게냐. 무서운 놈.”
신아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른다.
애초에 인관이라는 것은 세계의 기록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느끼고, 잴 영역이 아닌데 황준우는 단 한 번의 거래를 겪는 순간 그를 완전히 잡아냈다.
‘상위 신선들이나 간신히 해낼 법한 일을 육체의 탈을 벗지도 않은 채로 해내다니…….’
겉으로 표현한 것보다, 더 놀란 감정을 속으로 갈무리한 신아가 고개를 돌려 버린다. 더 이상 그녀가 나서서 할 말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직접 가서 반도만 받아오면 아버지에게 언령을 받아오고, 수명을 유지 아니 오히려 늘리는 것도 간단하게 해결된단 말이지.”
“맞습니다.”
백교의 동의에 황준우가 몸을 일으킨다.
“그럼 지체할 것 있나? 바로 준비하죠.”
“그편이 편하시다면야…….”
백교 역시 함께 몸을 일으켰다.
“짐은 가볍게만 싸도 되겠죠.”
“네, 제법 거리가 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돈을 챙겨 오가는 길에 사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네요. 어차피 곤륜에는 꼭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으니까.”
결정을 내린 황준우가 팔목을 흔든다.
그 끝에 묶여 꼬리를 축 늘어트린 달기가 안쓰러운 표정을 짓지만 이 방에 있는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덕분에 일찍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황석후가 미소를 떠올리며 말한다.
“당연하죠. 제가 허락 못 합니다. 자, 그러면 준비하러 가죠. 어머니도 뵙고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자꾸나.”
두 부자가 함께 몸을 일으켜 방문을 향해 다가간다.
“우린 따로 크게 준비할 것 없으니 기다리겠습니다. 이따가 말씀만 해주세요.”
백교가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렇게 돼서, 아버지께 드릴 반도 하나 구하러 가요. 가는 김에 어머니 것도 얻어내 볼게요. 두 분 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
새하얀 서시의 손을 잡은 황준우가 미소를 보인다.
“그래. 우리 아들이니까 잘 해내겠지.”
“당연하죠. 언제 제가 못 하는 일 본 적 있나요?”
“후후, 그래. 그래. 자랑스럽다. 내 아들. 한번 안아 봐도 될까?”
양팔을 벌린 어머니의 품에 안긴 황준우가 그 따뜻함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가능만 하다면 영원히 그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잘 다녀올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작은 목소리에 서시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서시는 황준우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때문에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말한 대로 황준우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짧은 인사가 지나갔다.
곤륜을 오가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렇다고 말로 못 할 만큼 긴 여정은 아니다.
황준우를 비롯한 백교, 제갈량, 신아 모두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음은 서연이인가.”
어디에 있을지는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었다.
“역시 오늘도 연무장이로군.”
경호, 홍산과 함께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검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이 어린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실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무게감이 배어 있다.
강호, 그리고 많은 실전을 거치며 무인의 삶이라는 것을 조금은 깨달은 탓일 터였다.
‘내 동생이지만 타고난 무골은 무골이야.’
단순히 무공을 잘할 뿐만이 아니라 검이라는 것에 건네주는 쉽지 않은 감정을 갈무리하고 잘 담아냈다.
그만한 배짱과 기개, 그릇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대단한 여걸이 되겠지.”
검후라 불리는 미래도 머지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황준우가 남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경호가 빠르게 따라붙고 있네.’
회복시간을 가진 탓에 한동안 무공이 퇴보하는 것만 같던 경호 역시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홍산보다도 더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듯했다.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란 건가.’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하는 모습이다.
홍산 역시 세 사람 중 가장 쳐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디 가서 수재(殊才)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 동생과 동료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 사람 다 정말 흐뭇하다니까.”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몸을 가볍게 풀었다.
이후 걸음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다들 준비해!”
황준우의 외침에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집중되었다.
“딱 오십 초만 버텨내면 홍산이랑 경호는 봉급 인상. 서연이는…….”
“개인 수련 더 시켜줘!”
황준우가 고민하는 사이, 황서연이 먼저 외친다.
“뭐, 그러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홍산과 경호도 동시에 외쳤다.
“저도 봉급 말고 수련이나 더 시켜주시죠.”
“아가씨랑 같은 대가를 원합니다!”
“그래, 뭐, 버텨낸다면 말이지.”
피식 웃은 황준우가 세 사람의 앞에 서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혹시라도 검을 뽑게만 해도 같은 상을 주지.”
“얕보지 마.”
황서연이 검을 세우며 눈을 빛낸다.
남은 두 사람 역시 말은 없었지만 투기(鬪氣)를 불태우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선공은 양보해주지.”
황준우가 손을 까딱한 순간, 머리 위로 황서연의 검이 먼저 떨어졌다.
망설임 없는 검격이다.
‘제 오빠를 상대로 말이지.’
물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결과는 황준우의 승리.
오십 초는커녕, 삼십 초식이 오가기도 전에 세 사람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힘 조절이 조금 부족했나.”
가볍게 볼을 긁적이는 황준우를 향해 바닥에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휴식을 취하던 황서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치사해! 천하제일고수가 전력을 다하냐!”
“…….”
전력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물론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뭐, 어쨌든. 억울하면 나 어디 좀 다녀올 동안 더 열심히 수련해두라고.”
“어디 가?”
황서연이 가장 먼저 의문을 표한다.
“멀리 가십니까?”
뒤이어 숨을 거르고 있던 경호도 몸을 일으키며 질문해왔다.
가장 지쳐있던 홍산은 창대를 지팡이 삼아 힘겹게 일어나며 눈빛을 보내왔다.
“잠시, 곤륜에 좀 다녀오려고.”
“아…….”
세 사람이 닮은 듯한 짧은 신음을 흘리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오래 걸리겠네.”
황서연이 말한다.
“응. 왜 또 따라오겠다고 하려고?”
“아니.”
생각 외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다.
“오, 조금 섭섭한데. 경호랑 홍산은?”
두 사람 역시, 입가로 쓴웃음을 그린 채 고개를 젓는다.
“저도 도련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무리인 것 정도는 안다고요.”
“애초부터 분위기부터가 평소와 다르신걸요.”
“내가?”
대답은 황서연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셋이다.
“과연…….”
“빨리 아니, 느긋이 다녀와도 돼.”
“그때까지 도련님께 부족하지 않은 호위무사가 되기 위해 많이 강해지겠습니다.”
“저 역시…….”
세 사람이 의견을 합일하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를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로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하네.’
참, 다들 많이도 성장했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제 주제를 안다는 사실은 강호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주곤 한다. 이제야 정말로 황준우가 세 사람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럼, 기대하면서 진짜 느긋이 다녀온다.”
“기다리겠습니다. 도련님.”
“다녀오십시오.”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세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