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5화
제 275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황석후와 얼굴을 보는 것으로 작별 인사는 끝이 났다.
‘전왕 녀석도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마정의 죽음 이후, 짧은 방황을 끝낸 전왕은 현재 합비의 남천맹 본단으로 복귀해 외각과 내각 개편 등 행정업무에 힘을 쏟고 있었다. 어찌나 바쁜지 하루에 채 두 시진을 잠들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보름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황준우에게 진행 상황에 관한 서신을 보내왔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흑백쌍노와 함께 서문지언 등이 힘을 내주고 있어 큰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기반이 더욱더 단단하게 다져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비 온 후 땅이 더 굳어진다는 정설대로였다.
‘역시 믿을 수 있는 유능한 부하들이 많으면 좋다니까.’
만약 전왕, 흑백쌍노, 서문지언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면 그러한 행정적인 면을 비롯하여 정치적인 일까지 황준우 홀로 다 처리해야 했을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뽑히고 고개가 내저어지는 일이다.
아마 그쯤 되는 상황이었으면 애초에 남천맹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 준비 끝.”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며 가볍게 짐을 모두 챙긴 황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곤륜이라…….”
다시 생각해도 제법 먼 길이다.
“별일은 없겠지.”
방문 밖으로 나서 평화롭고 고요한 만금장의 공기를 폐부 한껏 머금은 황준우가 다시금 바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잠겨 있던 주연하의 의식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음악 소리?’
여러 가지 악기 소리가 뒤섞였지만, 불협화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감미롭고 따뜻하다. 상당한 실력의 연주가들이 모인 것이 분명했다.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은 꽤나 부드럽다.
따뜻하면서도 너무 후덥지근하지도 않았다.
몸을 누인 곳 역시 상당히 편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괴이할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발의 사내, 영정을 만났고 의식이 사라졌었다.
그러던 중 황준우라는 이름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닿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에 불이 번쩍 들어왔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상대의 목소리를 거절했다. 그 이후, 엄청난 격통이 찾아왔고,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자는 물러난 건가?’
이곳은 황궁의 침실인가?
잠시 의문을 떠올렸지만 주연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
매일 같이 머물던 침소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다.
황궁 못지않은 안락한 환경이지만 이곳은 분명 다른 장소다.
‘그 사내가 나를…….’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의식은 더욱더 또렷해져 갔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움직임 역시 보일 필요 없었다.
사내, 영정은 주연하에게 있어 분명한 적이다.
적을 상대할 방법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데굴데굴데굴.”
갑작스럽게 귓가에 파고드는 입김에 비명을 내지른 주연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언제나처럼 소매에 숨겨두었던 검을 찾았으나 헐렁이는 옷자락 속에는 무엇도 없다.
대신하여 날카로운 강기를 머금은 손날이 침대 옆, 미소를 짓고 있는 영정의 목에 닿았다.
“이미 한 번 겪어봐서 알잖아. 그런 걸론 내 몸에 흠집 하나 낼 수 없다고.”
“네놈…….”
“너무 날카롭게 굴지 마. 생각 외로 우린 호의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벼운 동작으로 주연하의 손길을 밀어낸 영정이 드넓은 침대의 빈자리에 걸터앉는다.
그 짧은 시간, 주연하의 시선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
분위기는 한눈에 보아도 화려했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세상의 온갖 금은보화와 보물들로 장식되어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음악은…… 바깥인가.’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문 바깥에서부터 잔잔한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꽤나 가깝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확인하니 생각보다 먼 거리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짐작도 못 했던 일이다.
‘연주자들이 모두 무공을 익혔나?’
기이한 일투성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주연하가 이마를 짚었다.
“크윽…….”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건지, 감상하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영정이 갑작스럽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얼굴을 다소 찌푸려도 예쁘네.”
“이곳은 어디냐?”
주연하의 경계 섞인 음성이 영정을 향했다.
“어디긴? 내 집이지.”
딱히 감출 생각은 없는지 영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한다.
“정확한 위치를 묻는 것이다.”
“위치라고 해봐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걸.”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 검지로 볼을 긁적이던 영정이 또다시 웃음을 보였다.
“그런 중요하지 않은 건 제쳐 두자고. 그냥 내 집이고, 궁궐이라는 정도로만 알면 되니까.”
주연하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인다.
“감히…… 궁이 어떤 곳인 줄 모르고 하는 말인 게냐?”
“모를 리가. 누구보다 잘 알걸. 어쨌든 기뻐해도 좋아. 이 시대에 내 집까지 온 사람은 네가 처음이니까.”
“…….”
딱히 무언가를 감추려는 의도도 없어 보이지만, 성실히 대답할 기색도 없다.
주연하는 영정과의 대화가 겉도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닫았다.
대신하여 여태껏 그가 내뱉었던 단어를 머릿속에 조합하고 새로 엮어낸다.
“또 머리 굴린다. 그러지 말고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
“황준우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네놈이 내 목을 친다고 하여도 말이다.”
“흐음……. 황준우인가 하는 놈, 남자지?”
영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던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멎은 것도 동시였다.
“무엇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주연하는 순식간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감정을 느꼈으나,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답하였다.
상대가 범상치 않은 괴인(怪人)이라는 사실쯤은 충분히 깨달았다.
‘의도대로 놀아날 수만은 없지.’
굳건한 시선을 한 주연하를 다소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영정이 되물었다.
“잘 생겼나 봐.”
“…….”
“혹시 좋아해?”
“…….”
“너…….”
영정의 몸에서 검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때였다.
“정. 제가 궁에서 난동을 피우면 어떻게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지요?”
방문 밖,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늘하기만 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제 온도를 찾는다.
멎었던 음악 역시 동시에 다시 시작되었다.
“너무해. 묘. 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방 바깥을 향해 투덜거린 영정이 입술을 내민다.
남자치고 아름다운 미색에서 나오는 그 음성은 다소 고혹적이기까지 할 정도다.
하나 문 바깥에 선 여인, 청묘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듯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이라도 할 기세였죠. 쓸데없는 질투하지 마시고 차라리 남자답게 솔직하게 밀어붙이시죠.”
“에에,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너무하잖아.”
“…….”
분명 문 바깥의 기척은 여전하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너무하군. 너무해.”
문밖을 향해 다시 한 번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흘린 영정이 시선을 주연하에게로 돌렸다.
고혹적인 얼굴에는 다소 홍조가 떠오른 채다.
“큼큼, 그래서 뭐. 이미 정황상 들어서 알겠지만 말인데…….”
“죽여라.”
“에이, 끝까지 들어봐.”
여인보다도 고와 보이는 긴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 영정이 주연하를 향해 손을 내민다.
“너, 내 부인이 되는 건 어때? 미리 말하지만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야. 이 제안을 받은 건 청묘 이후로 네가 처음이라고.”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가득 어려 있다.
“헛소리.”
주연하의 얼굴에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너, 내가 누군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내 부인이 되면 네가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어마어마해진다고. 그러니까, 명 제국의 황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거든? 이것 참, 답답하네. 있잖아. 너…….”
“네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는 내 적이란 것이다.”
“……어째서?”
“내 친구의 이름을 악의로 가득 찬 음성으로 찾았다. 친구의 적이 어찌 내 아군이 될 수 있겠느냐?”
“허…….”
영정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 피어올랐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나 안 잘생겼어? 멋지지 않아? 너 나랑 하룻밤이라도 자보고 싶다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푸하하. 제 자랑이 아주 꼴불견인 수준이구나. 내 의지에는 한 치 변함이 없다. 오만한 사내여.”
주연하가 영정의 눈을 직시한다.
“네 부인이 될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빌어먹을 년!”
고함소리와 함께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영정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씩씩거리는 콧김을 내뿜는 영정의 눈에 수많은 갈등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으나 끝내 손길은 주연하에게로 도달하지 못했다.
말없이, 그런 영정을 바라보는 주연하의 입가에 명백한 조소(嘲笑)가 어렸다.
그를 바라본 영정의 눈에 다시 한 번 불똥이 튀기는 듯했으나 이전처럼 폭발하지는 않았다. 갈등 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는 웃음이 떠오른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딱 세 번만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다시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고민해보도록 하여라.”
여태껏과 다른 다소 권위 섞인 음성을 흘린 영정의 걸음이 성큼성큼 방문 앞을 향한다.
이후 그는 놀랍게도 방문을 열지도 않은 채, 통과하듯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또다시 잠시 끊긴 듯했던 음악이 주연하의 귓가에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죽음에 놀란 듯 다소 격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는다.
영정이 눈앞에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 뒷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주연하의 입가에서 곧 깊은숨이 토해져 나왔다.
“후욱……!”
기세의 일부만을 접했을 뿐인데 머리가 아찔하게 저려왔다.
팔 끝이 떨리고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리도 미약해서야…….’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보이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방문 밖에 서 있던 청묘가 내부로 들어와 있다.
“몇 가지 조언을 해주려고.”
표정에는 여전히 한 치 변함이 없다.
음성에도 높낮이가 없어 마치 인형과 같아 보였으나, 영정에 비하자면 그녀 측이 몇 배는 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살아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과 너무나 달랐다.
주연하는 그 감각이 대체 무엇이라 표현할 방법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첫째.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
“헛소리.”
“마음대로 대답해. 나는 정과 달리 너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어. 듣고, 어떻게 판단할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
“이어서 둘째, 혹시 혼자 죽겠다고 괴상한 짓은 하지 마. 그런 방법으로는 정을 벗어날 수 없어.”
“무슨…….”
“마지막 셋째. 이곳에 있는 넌 황제가 될 뻔했던 위대한 존재가 아니야. 그저 한낮 여인일 뿐이란 걸 명심해. 설령 네가 황제라 한들 그의 앞에서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겠지만.”
할 말을 다했는지, 청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잠깐. 대체 그는 누구지?”
주연하가 재빨리 입을 열어 그런 청묘에게 질문을 던진다.
잠시 고개를 돌려 주연하를 바라본 청묘는 무덤덤한 얼굴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드르륵-!
방문이 활짝 열렸다.
주연하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궁궐의 풍경이다.
수많은 야명주와 보석들, 그리고 화려한 장식들.
그 사이를 누비는 생기 없는 사람들.
괴이할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찬란하다. 주연하는 천하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궁성을 본 적이 없었다. 황궁인 자금성보다도 더 화려하고 밝은 빛을 내뿜는 궁성이 감히 천하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여긴…….”
떨리는 음성을 내뱉는 주연하를 여전히 무감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청묘가 입을 연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곳은 황궁이야, 그의 이름은 영정이고.”
“설마 그가…….”
말도 안 된다.
상식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다.
주연하는 떠오르려는 생각을 재빨리 벗어던지려 하였지만 그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 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과 청묘의 말은 모든 진실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영정…… 정녕 그가…….”
입가로는 헛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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