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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77화 (277/373)

학사재생 277화

제 277화

들어선 객점의 한쪽 벽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는 채다.

무너진 벽면 바로 옆으로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있는 중년 남성이 쓰러져 있었으며, 정면으로는 눈을 부릅뜬 민머리의 사내가 위협적인 기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이고, 나리!”

흉악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할 때, 한 중년 여인이 뛰어들다시피 몸을 던져 민머리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용서해주시지요. 저 이가 촌구석 출신이라 무인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리.”

중년 여인의 눈물 섞인 외침에 잠시 시선을 돌린 민머리 사내의 미간이 깊게 파인다.

“알아보는 눈이 없는 것도 죄다. 감히…… 대 남천맹 출호단(出豪團) 단주인 나 송무강 님을 무시해? 그깟 방값은 만금전장에 가서 요청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민머리 사내, 송무강의 부리부리한 눈이 다시금 오줌을 지리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로 향했다.

주먹을 움켜쥔 두 눈에는 살기가 번뜩인다.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으마. 하지만 알아보는 안목이 없는 죗값으로 두 눈은 가져가야겠다.”

“아이고, 나리!”

중년 여인이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릴 때였다.

“대충 상황 파악은 되는 것 같은데…….”

송무강의 어깨를 움켜쥔 황준우가 작은 목소리를 읊조린다.

“건방진……!!”

화들짝 놀란 송무강이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꿈치를 강하게 휘두른다.

가볍게 고개를 젖혀 그를 피한 황준우의 발끝이 단숨에 송무강의 목젖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순식간에 뒤를 잡힌 데 이어, 치명상을 입기 직전까지의 상황이 된 송무강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흐른다.

“심증은 생겼지만, 내가 확실한 걸 좋아해서 말이야. 정확하게 어디라고?”

“네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이 몸은 대 남천맹 소속이시다.”

“아, 그러니까 그다음에 어디라고 했지?”

“……출호단?”

송무강의 조심스러운 음성에 황준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내가 얼마 전까지 보고 받은 데에서는 그런 이름이 없었거든?”

“무슨 소리냐?”

“우리 남천맹에는 출호단이라는 단체가 없다고.”

가볍게 답한 황준우의 발끝이 송무강의 목젖을 지나쳐 어깨에 닿는다.

아무런 충격음은 없었다.

한데 송무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무릎이 빠르게 휘었다.

순식간에 쓰러진 송무강의 어깨에 여전히 한 다리를 올려놓은 황준우의 눈에는 한기(寒氣)가 어렸다.

“이름이 송무강?”

“이, 이 노옴!”

황준우의 질문에 목에 핏대를 세운 송무강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친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무신께서 나 송무강을 총애하여 왼팔의 자리까지 주셨거늘. 무신의 오른팔, 거기검 경호! 그리고 왼팔, 출호단의 송무강이란 소리도 못 들어보았나 보구나!”

“……응?”

생각지도 못한 사내의 허세에 황준우의 입에서 잠시 당황스러운 음성이 흘렀다.

“흐흐……, 이제야 조금 분위기 파악이 되나 보구나. 마침 그분께서 이 근처에 계신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곧 찾아 나서실 것이고, 이 꼴을 보게 될 수도 있지. 겁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어서 빨리 도망가거라. 내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할 터이니!”

“허허…….”

황준우의 입에서는 이제 헛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천맹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지고 있다.

그만큼이나 무신, 황준우의 이름도 높아지고 있다.

누군가 그를 사칭하고, 이용하는 일도 생길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강호에서는 이름이 곧 힘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 꼴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기분은 또 달랐다.

화가 나는 감정조차 들지 않을 정도의 황당함?

그 정도가 심하다 싶은 순간에는 정말 헛웃음 외에 어떠한 감정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사내, 송무강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어이, 송무강. 그래도 초절정이나 돼서 막 여기저기 사칭하고, 헛소리하고 다니면 쪽팔리지도 않나?”

“제, 제법이구나.”

자신의 무공경지가 단숨에 읽혔다는 사실에 송무강의 입술 끝이 떨린다.

“너, 무신의 왼팔이라고?”

“그, 그렇다.”

“자, 그럼 문제. 네가 그렇게 떠들어대는 남천맹, 그리고 무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누굴까?”

“…….”

송무강의 두 눈이 떨리며 걱정이 어린다.

흔치 않은 경우이기는 하지만, 눈앞의 황준우가 무신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떨리는 시선에 담긴 가정을 읽은 황준우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혹시 무신의 이름은 알고 있나?”

“가, 감히 그분의 존함을 어찌 내 입에 올린단 말이냐.”

“걱정 말고 말해. 내가 허락해 줄 테니까.”

“어, 어찌…….”

생각과 다른 분위기를 확실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송무강이 황준우의 시선을 피한다.

적막 속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객점 주인 부부와, 손님들의 시선에도 옅은 기대가 어렸다.

“왜. 안 보이는 데서는 욕도 하고 할 수 있는 거잖아. 너처럼 사칭도 할 수 있고.”

“아, 아니다. 나는…….”

“무신의 이름은 황준우야. 그렇지?”

“…….”

황준우의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신 황준우의 이름은 유명하다.

적어도 무인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몇 없을 터였다.

“자, 다시 첫 번째 문제로 돌아가자. 나는 누굴까?”

“…….”

송무강은 입을 닫았다.

긴장감 가득한 눈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위기감이 온몸을 지배하자 달아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쓸데없는 힘 빼지마. 차라리 문제를 맞힐 생각해 봐. 혹시 알아? 운 좋게라도 맞히면 살려줄지. 기회는 세 번 준다.”

“윽…….”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발의 무게에 인상을 구긴 송무강의 시선이 황준우를 향했다.

웃고 있는 눈매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가 매섭다.

벗어날 방도는 없어 보였다.

“……거기검?”

차라리 송무강은 그를 맞히는 쪽을 택했다.

“경호 녀석이 들으면 좋아…… 아니 몸서리치려나. 아쉽게도 틀렸어.”

황준우의 작은 읊조림에 송무강의 눈이 더욱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다.

머릿속 생각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거기검 경호를 녀석이라고 했어. 알고 있는 사이 정도가 아니야. 누구지? 설마…….’

아랫입술을 깨문 송무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 무신…… 본인이십니까?”

말도 안 된다.

스스로 말하고도 헛웃음이 나왔다.

남천맹의 무신.

아니, 무림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가 이런 마을의 객점까지 찾아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온갖 천하의 부귀영화가 모두 그의 손에 있거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데 더욱 진해지는 황준우의 웃음이 불안하다.

등 뒤로는 알 수 없는 오한이 물밀 듯 몰려왔다.

“빠른 정답. 내 이름이 황준우야.”

“……!!”

놀라는 송무강의 어깨 위에 올라 있던 발의 무게가 갑작스럽게 힘을 더했다.

“아악-!”

어깨뼈가 함몰되는 고통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몰려든 무릎 아래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는 눈이 뒤집혔다.

“끄윽, 끄으윽…….”

고통스러워하는 송무강의 앞에 앉은 황준우가 차가운 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네놈이 진짜 남천맹 소속인지 아닌지는 몰라. 사실 가짜라고 해도 상관없어. 다만 아주 만약에라도 진짜 우리 소속이었다면 더 억울해할 필요 없어. 남천맹 준칙 첫 번째, 기본적 도의를 알아야 하며 협의를 우선시해야 한다.”

준칙을 세운 것은 전왕이다.

하나 그 기준을 만든 이는 황준우 본인이었다.

“착하게 살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적어도 준칙이 있으면 지키는 척이라도 해야지. 나보다 약한 사람들 핍박하고, 힘 있다고 자랑하라고 무공 익힌 거 아니잖아?”

“죄송, 죄송합니다…….”

황준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슬 퍼런 기세에 질린 송무강이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넸다.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인다.

상대의 눈까지 뽑아버린단 말을 서슴지 않게 한 주제에 자신의 고통은 두려운 듯하였다.

“약속대로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애초에 네 목숨을 어찌할지는 내가 정할 일이 아니거든.”

황준우의 시선이 여전히 겁먹은 시선으로 송무강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객점 주인 부부에게로 향한다.

“잘해야 할 거야. 송무강. 공포가 분노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니까 말이야.”

나지막하게 말하는 황준우의 손바닥이 송무강의 배꼽 아래에 맞닿는다.

행태에 어울리지 않는 초절정고수라는 경지답게 느껴지는 내력이 제법 묵직하다.

“아, 안 돼…… 제, 제발……!”

자연스레 송무강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나 황준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송무강의 뇌리에 폭음이 번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으며 눈이 뒤집혔다.

“끄, 끄어억……!”

침을 질질 흘리며 경련하다 쓰러지는 그를 보며 천천히 일어난 황준우의 시선에 문득 송무강의 품속 한 편에서 떨어져 나온 푸른 깃발 둘이 그려진 패(牌)를 향한다.

남천맹, 그중에서도 대주 이상의 서열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여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눈앞의 결과는 분명하다.

“후…….”

자연스레 입가로 한숨이 나왔다.

걸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객점 부부에게로 향했다.

황준우가 다가가자 두 부부가 몸을 떤다.

이야기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는 못했지만, 황준우가 송무강보다 더한 고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탓이었다.

“부하의 실수는 상관의 탓이기도 하지요. 죄송합니다. 남천맹의 이름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런 걸로 보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너진 벽도 수리하시고, 한동안 마음을 추스를 수 있길 빌겠습니다.”

황준우는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조금 더 진정된 모습의 중년 여인의 손에 쥐여준다.

중년 여인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감사를 표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썼다.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꼴이 우습네요.”

다가온 황준우의 말에,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백교가 부채를 펼치며 웃음을 보인다.

“손이 아무리 크다 한들 천하 곳곳 작은 틈까지 덮을 수는 없는 법. 다만 상황을 목도했을 때의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공자의 방침은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우후후.”

“후후.”

백교가 건넨 위안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객점 문밖을 향하려 할 때였다.

“자, 잠시만요!”

무너지듯 앉아 있던 객점 부부 중, 중년 여인 측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걸음을 옮기던 황준우가 고개를 돌린다.

“머, 머물기 위해 오신 것이라면 식사라도…… 아니 한숨 푹 주무시고 가세요.”

용기 내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년 여인의 두 눈에는 아직도 황준우를 향한 공포가 어려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인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네는 제안이 고맙다.

덕분에 황준우의 입가에 번져 있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마음도 다소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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