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8화
제 278화
“마음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괜히 부담 가시는 일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부디 머물다 가시지요.”
고개를 내젓는 황준우의 발걸음을 곁에 있던 중년 사내가 함께 붙잡는다.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까지 지린 탓에 꽤나 난감한 몰골을 한 상태였지만 황준우를 향한 음성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는다.
눈빛 역시 제법 간절했다.
“밥 한 끼 하고 가시지요!”
“거 덕분에 장씨네가 무사해 내가 다 고맙습니다, 그려!”
“시원했습니다. 술은 내가 살 테니 앉으세요!”
주변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손님들도 목소리를 다 함께 높인다.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 앞에서 억눌려 있던 진심 된 목소리다.
“음…….”
난감해하는 황준우를 향해 웃음을 보인 백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리들 원하는데, 머물고 가시지요.”
“나도 그만 돌아다니고 싶다. 고집 그만 피우고 자리 앉아라.”
백교와 신아까지 거드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고개를 저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다시 걸음을 돌렸다.
“원래 우리 집안이 황소고집보다 더한데, 여러분들은 못 이기겠군요.”
“오오……!”
황준우의 말에 객점 부부의 얼굴과 손님들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세 사람이 벽에 구멍이 뚫린, 다소 휑한 객점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들뜨기 시작했다.
다소 썼던 황준우의 기분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제가 씻고, 음식 금방 내오겠습니다.”
“돈은 손님이 가득 주셨으니 걱정 마세요.”
객점 부부가 황준우에게 다가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밝은 분위기에 두 눈에 어려있던 공포도 제법 사라진 채다.
“고맙습니다.”
“아이, 뭘요.”
황준우가 인사를 건네자 웃음을 보이며 손짓한 객점 부부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두 사람에게 제법 바쁜 하루가 될 듯 보였다.
“예전에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협의에는 보상이 없다.”
황준우의 바로 옆, 객점 부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교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부채를 펼친 백교가 다소 몸을 풀어헤친다.
반면, 황준우를 향한 시선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협의는 말 그대로 본인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잖아요. 거래도 아니고, 합의도 아니죠. 보상을 바라는 점에서 협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과연!”
웃음을 보인 백교가 박수를 쳤다.
“그 책에는 같은 말을 가지고 의미를 둘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공자께서 방금 하신 말이고, 둘째는 인간이란 동물이 가진 간사함을 논했습니다.”
“둘째 역시 부정할 수만은 없겠네요.”
입가로 미소를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생은 아니지만, 전생에서는 그 간사함에 의해 큰 위기에 빠졌었다.
지나간 일이라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몇 번을 다시 떠올려도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때문에 황준우는 누군가를 도와주기 전 함부로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정황이 확실하지 않은 한, 약자라고 해서 비겁하지 않다는 보장은 없는 탓이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사람은 제 욕심을 위해 은인조차 버릴 수도 있지요. 해서 공자의 답을 듣고 싶었습니다만…… 이미 확고한 마음이 있으시군요.”
“그렇다고 늘 약자를 돕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소 비겁하더라도, 힘이 있더라도, 정말 억울한 사람의 편에 서야 하니까요. 저한테 대협이라 불릴 만큼의 협의지심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마저 외면하고 지나갈 정도의 소인배는 아니고 싶기도 하고요.”
“좋은 자세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요.”
“뭐 그 정도까지나…….”
어색하게 웃는 황준우의 앞으로 객점 부인이 차를 내려다 놓았다.
제법 향이 맑고 진하다.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사용하는 싸구려 차와는 종류가 달라 보였다.
“귀한 손님께 대접하려고 조금 숨겨 놨던 용정차입니다. 솜씨가 형편없어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가볍게 목을 축이고 계셔요.”
황준우를 비롯하여 일행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준 객점 부인이 또다시 멀어진다.
그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백교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훌륭하군요.”
“그러게요. 말씀과 달리 차를 잘 달이셨는데요.”
향이 맑고 맛은 풍족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온기마저 가득 느껴졌다.
“어쨌든, 진지하게 말해 공자께 드린 말은 과언이 아닙니다. 언젠가 제가 같은 질문을 건넸던 누군가는, 명확한 두 번째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누군지 궁금하네요.”
“아마 조만간 보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나름의 사정으로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나, 분명히 살아 있을 테니까요.”
“진무영에게 힘을 지원한 인물 말입니다.”
차를 들이켜는 백교의 눈에서 잠시 차가운 빛이 흘렀다.
“제가 한 가장 큰 실수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네요. 그자가 정말 진무영을 지원했다면, 덕분에 저도 큰 고생을 했고요.”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이름을 머릿속에 담은 황준우의 눈에도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아마 사실일 겁니다. 지금 천하, 아니 선계까지 통틀어 멸망시를 앞당길 만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손에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진무영과 같은 이와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인물은 하나뿐이지요. 아마 힘을 빌려준 본인도 진무영이 그 정도까지 극단적으로 자신의 힘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만요.”
“역시…… 진무영의 그 힘. 본인의 것이 아니었군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우주는 진무영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힘이었다.
황준우조차 조화의 경지를 다시 이해하게 될 정도의 일 아니었던가?
만약 진무영이 그런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면 황준우에게서 도망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다소 변덕스러운 양반이, 또 장난스럽게 건넨 힘이었겠지요. 진무영의 경우는 도를 지나쳐 많이 놀랐을 겁니다만. 오히려 그래서 지금쯤 더 공자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에 대한 호기심을요?”
되묻는 황준우의 눈이 빛난다.
사실 꽤나 반갑다는 생각도 든 탓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데.’
진무영 때문에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심지어 그 마지막을 제대로 손봐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힘의 제공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 황준우를 노려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예. 그자는 우선…… 겁쟁이고, 비겁자니까 말이죠. 우주와 조화를 이룬 강자가 이렇게 저와, 또 숙과 협력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게 분명하거든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원래 그자는 지금의 공자와 같은…… 그러니까 함께 세계를 구하고자 하였던 영웅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처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딘가 지쳐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에 그간 많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실패했다.
심지어 그중 누군가는 배신을 택하였다.
백교가 보이는 차가운 시선과 살기 역시 이해가 되었다.
“대체 누구죠? 저도 알 법한 사람인가요?”
“알다마다요. 역사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인물인걸요.”
“아, 잠시만요. 이제는 그 누군가에게 실망할까 봐 굉장히 겁나네요.”
역사에는 위인(偉人)이라 불릴 만한 수많은 영웅들이 존재한다.
그중 누군가는, 황준우에게 있어서도 감탄을 자아낼 법한 역사를 이룬 인물들이었다.
마음속 한편을 흔드는 현실을 남겼기에 영웅인 것이다.
때문에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더 마셔 마음을 진정시킨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굽니까. 그 배신자?”
숨을 가다듬은 황준우의 질문에 마찬가지로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백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왕 아니지, 시황제(始皇帝) 영정.”
“……그가 정말 불사를 이루었군요.”
잠시 말문을 잃었던 황준우가 다소 침착한 음성을 내뱉었다.
“짐작하셨습니까?”
“마음의 준비 정도는 했으니까요.”
“그래도 크게 놀라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런가요.”
“아무래도 앞으로 부딪칠 확률이 높은, 명백한 적이니까요. 그 이름이 주는 부담감에 먼저 기겁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멸망의 새마저 들은 마당에 시황제가 대수겠습니까.”
“후후, 맞는 말입니다만. 때론 인간이란 너무 먼 것보다, 다소 멀지만 가깝기도 한 존재에게 겁을 먹기도 하거든요. 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늘을 높이 날아보면 대충 이해하실 겁니다. 사람이란 게 오히려 지면과 아주 멀어지면 겁이 없어지거든요.”
“무슨 말인지 대충 알 것 같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검지로 식탁을 두드린다.
“시황제, 시황제라…….”
“사실 곤란한 상대입니다. 그 역시 어렸을 때부터 문일지십,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굉장한 천재였으니까요.”
“그리고 수천 년을 살아왔다.”
천재가 수천 년을 살았다.
“대체 어떻게 불사를 이룬 겁니까? 아버지가 봉인한 진시황릉은요?”
의문이 수없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나씩. 우선 그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힘을 쓰는 대가로 반도를 얻었습니다.”
“지금 저처럼요?”
“예. 뭐 사용처가 다르긴 하고…… 그의 경우에는 선불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반도를 먹은 이후는요?”
“누구보다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세계가 멸망하면, 제국도 없고 본인도 없으니 가만히 있지는 않았죠. 다소 삐뚤어진 심성이나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유도 그 탓입니다만…….”
“생각보다 더 비겁자였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신아가 찻잔을 강하게 내려놓으며 짜증 난 목소리를 흘렸다.
“신아도 그를 알아?”
“직접 본 적은 없다. 다만 이야기는 들었지.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짜증 나는 인물상이다.”
“동감합니다. 설마 본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도주를 택할 줄은…….”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의 우주에는 홀이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았으나, 삼백 년쯤 지났을 때였나요.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시선을 홀에게로 바꾸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주에서 도망가는 법을 찾기 시작한 거지요. 살아남고 싶다. 생명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에 그는 망설임 없이 따른 겁니다. 다른 사람을 책임져야 할 이유를 찾지도 못했고요.”
“협의에는 보상이 없다.”
“예. 그 두 번째 답안을 내놓은 사람이 바로 영정입니다.”
“미친…….”
결국 영정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목숨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떠났다.
모두를 구하는 것보다는 쉬운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영정에게는 분명 비겁자라는 지칭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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