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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80화 (280/373)

학사재생 280화

제 280화

“예. 맞습니다. 질투했습니다. 그보다 생각해 보았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대체 무엇인가요?”

“후후, 역시.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청묘가 이해해. 나 같이 훌륭하고 멋진 남자의 옆에 있으려면 어쩔 수가 없거든. 아, 맞아. 그보다 생각한 것 말이야.”

반강제적인 청묘의 동의에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자기 자랑을 끝낸 영정이 눈을 빛냈다.

“진무영 녀석, 마지막에 과도하게 힘을 끌어다 썼잖아.”

“정이 멸망시라도 움직인 것 아니냐고 하셨지요.”

“나조차도 쓰러질 뻔했으니까 말이지. 딱 한 번 준 권한인데 그렇게까지 사용할 줄은 정말 몰랐지 뭐야. 영악한 녀석. 뭐, 그래서 마음에 들었었지만. 아, 어쨌든! 황준우라는 녀석이 그 힘을 처리한 건 분명해. 그렇지?”

“그렇죠.”

“곤륜, 그리고 백택이 가만히 있었을까?”

청묘의 고개가 내저어졌다.

“그럴 리도 없지요.”

“분명 만났겠지.”

“동의합니다.”

“찾기도 어렵지는 않았을 거야. 꽤나 이름이 알려진 녀석이니까 말이야.”

“그런데도 우리는 못 찾고 있죠.”

“만금장인가? 그곳에는 보이지 않잖아. 남천맹 본단이란 곳에도 없고. 한발 늦은 거지. 이쯤 되면 확실하지 않아?”

영정의 질문에 청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으로 향했겠군요.”

“정답. 문제는 녀석이 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냐는 건데…….”

조심스럽게 말하는 영정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무영은 몇 가지 특별한 약속을 통해 영정의 능력을 단 한 번에 한해서 재현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리고 그를 아주 강력하게 사용했다. 힘의 주인인 영정조차 부담을 느낄 정도의 위력이었는데 황준우라는 새로운 무신이 정리해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시대의 인간 중에 진무영 녀석을 뛰어넘는 재능이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 이 전 세대에 칠야무신인가 하는 놈이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칠야무신은 죽었죠.”

“정확하게는 봉인 당했지. 아쉬운 일이야. 그대로 계속 컸으면 유계 어딘가에서 마왕 자리 하나 꿰차서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입맛을 다신 영정이 볼을 긁적인다.

“어쨌든, 그런 진무영을 죽이고 내 힘마저 처리한 녀석이 약할 리는 없겠지.”

“그 역시 당연한 말씀입니다.”

“싸우면 위험하지 않을까?”

“늘 느끼지만 정은 엄살이 심한 편이니까요. 무어라 확답할 수는 없겠네요.”

“흐음…….”

턱끝을 쓰다듬은 영정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민보다는 일단 부딪쳐 보는 거지. 묘. 내가 위험하면 구해줄 거지?”

“차라리 제가 먼저 나서는 편이 속 편하지요.”

“그래 줄래?”

영정의 눈에 반짝임이 어린다.

곱게 모은 양손은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지요.”

그런 영정을 다소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청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빨리 가야겠네요. 이 시대의 무신이 곤륜에 입산(入山)한 이후라면 우리 입장에서도 곤란하니까요.”

“난 절대 못 가. 신선 놈들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올 거라고.”

진저리난다는 듯 몸을 떤 영정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빨리 가자.”

다급하게 목소리를 외친 후에는 천 개의 계단 아래로 단숨에 뛰어내린다.

청묘 역시 신형을 따라 그런 영정의 바로 옆으로 조용히 안착했다.

“우선 멀리서 지켜보고, 청묘가 한 번 떠보는 거야. 그리고 만만하다 싶으면…….”

“…….”

잠시 표정 없는 청묘와 시선을 마주친 영정이 환한 웃음을 보였다.

“죽여 버리자. 나보다 잘난 녀석은 정말 싫으니까.”

“정의 뜻이 그러하다면.”

청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다음 날, 황준우 일행은 객점 부부의 과도한 친절이 담긴 아침 식사에 이어, 간식거리까지 얻어 마을을 떠났다.

듣자 하니 늦은 밤 정신을 차린 송무강은 기겁하며 달아났다고 하였다.

객점 부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를 쫓지 않았다.

분노와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리 한쪽이 부러진 채로도 질색하며 달아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동정심이 일었다고 하였다.

황준우는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팔, 다리 한 짝씩에 이어 단전까지 잃은 무인의 삶이다.

아마 송무강은 평생을 그날을 후회하며 눈물을 쏟을 것이다.

악업에 대한 벌로서는 충분하다.

그렇게 짧은 시간 여러 가지 기억을 남긴 마을을 떠난 황준우 일행은 마을을 벗어나 섬서까지 단숨에 지나쳤다. 중간중간 몇 번 더 휴식을 위해 마을을 들렀으며, 때로는 또 다른 작은 소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강호 여정을 하면서, 칼 찬 무림인들의 행사에 관여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중 일행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몸에 다소 위험을 안고 있는 상태라고는 하여도 이미 일반적인 무인 중에 황준우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감숙에 이르러서는 그런 자잘한 사건들도 거의 겪지 않게 되었다.

무림인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기도 하였으며, 무림맹 소속으로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며 다소 위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쟁쟁한 공동파의 입지가 상당히 큰 덕인 듯했다.

감숙을 넘어 청해에 이를 즈음에는 황준우의 얼굴에도 옅은 피로가 어렸다.

바뀐 환경에, 오랜 여정은 위대한 무인마저 지치게 만든 것이다.

다행인 점은 그런 피로조차도 청해의 드넓은 초원을 계속해서 달려나가다 보니 상당히 해소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초원은 황준우에게 있어 막막함을 건네기보다 시원함을 선물한 것이다.

그렇게 일행들이 드디어 여정의 끝자락인 곤륜 인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쯤에서 쉬고, 내일 새벽 일찍 산에 오르면 될 것 같구나. 천리행(千里行)을 쓸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피폐해진 얼굴의 신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제 발로 뛰니 더욱 힘든 것 같군요. 후후.”

백교 역시 다소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이 곤륜.”

집중해서 보면 보이는, 높은 산을 바라본 황준우의 시선에 짧은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그를 감추듯이 감싼 새하얀 구름, 그 너머로 은은하게 보이는 신성한 기운이 과연 성산(聖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까이서 보면 또 다르겠지.’

먼 거리에서 집중하여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감상에는 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느낌으로는 다소 집중을 하면 곤륜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모습도 읽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신아가 가리킨 마을, 객점이라고도 부르기 초라한 작은 건물에 들어서 식사를 시키고 차를 마시던 황준우가 속으로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흘렸다.

“성산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다른가 보구나. 오호호.”

그런 황준우를 보며 뿌듯하게 어깨를 편 신아가 다소 방정스러운 웃음을 토했다.

“그나저나…….”

황준우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는 죽은 듯 숨 쉬는 것조차 주의하고 있는 달기를 향했다.

“이 녀석하고도 내일이면 진짜 끝이네.”

“왜, 설마 마왕이자 요선인 녀석하고 정이라도 들은 게냐?”

신아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럴 리가. 감회가 색다르다는 거지.”

“네놈도 남자라고 구미호한테 혹하기는 하는가 보구나.”

“아니라니까.”

고개를 냉정하게 내젓는 황준우의 시선이 축 처진 달기의 꼬리와 귀를 향했다.

“그냥 뭐,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해서.”

“갈! 헛소리하지 말거라!”

신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기름칠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객점 문이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들어선 손님은 중년의 남, 녀. 둘이다.

두 사람은 청해성 원주민이 아닌지 짐을 꾸린 여행자의 행색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곤륜이에요.”

“소문의 성산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니, 감격스럽구려.”

피부색과 생김새, 억양에서는 사천 지방의 느낌이 묻어나기도 했다.

양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준우 일행이 시선을 거두었다.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탓이다.

그러던 차,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곧 죽을 것만 같던 달기가 코를 벌렁거리며 고개를 벌떡 든다.

시선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부부 중 중년 남성에게로 향했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인데.”

풀 죽어 있던 달기의 갑작스러운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최근 들어 그녀가 보였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의아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인 탓이다.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달기의 동공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와 황준우 일행을 번갈아 보는 시선에는 고민이 가득하다.

부채를 들고 일어선 백교가 긴장된 시선으로 몸을 일으킨다.

황준우 역시 조심스럽게 일어나며 허리춤에 찬 수왕검에 손을 대었다.

조용한 객점 내에 차가운 공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대체 누구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를 무렵, 재빨리 몸을 날려 황준우의 다리 뒤에 숨은 달기가 외쳤다.

“저놈 영정이야!”

“……!”

그 거친 외침에,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안 보이는 듯 정면의 여성을 보며 이야기하던 중년 사내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두 눈동자에는 큰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감히! 여우 요괴 주제에! 내 분명 경고하였거늘!”

동시에 영정의 머리 위로 새하얗고 거대한 짐승의 앞발이 떨어져 내렸다.

“바로 곤륜을 향해 뛰세요!”

부채를 정면으로 내뻗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백교가 황준우를 향해 외쳤다.

“피하라고?”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였다.

손목을 훔친 신아가 고개를 내젓는다.

“굳이 확실하지 않은 싸움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

“…….”

다리 뒤에 숨은 달기 역시 황준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눈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가득 어린 채였다.

짧게 혀를 찬 황준우가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그극-!

지면을 누르고 있던 거대한 기둥 같은 새하얀 다리가 조금씩 들어 올려지기 시작한다.

“으음…….”

백교의 입에서도 짧은 신음이 흘러나올 무렵.

거대한 무게에 눌려 몸을 굽히고 있던 영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외친다.

“주연하! 그녀를 되찾고 싶지 않은가!?”

곤륜을 향해, 이미 먼 거리를 나아갔던 황준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속임수다! 놈이 기만자에 비겁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주었지 않느냐!”

신아가 돌아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백교의 표정은 평소와 답지 않게 딱딱하다.

“참으로 어여쁘고 강한 여인이더구나! 그녀는 너를 지키고자 스스로 목숨마저 던지려 하였거늘!”

“미안. 신아.”

고개를 돌린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아 들었다.

고오오-!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오색 빛 기운은 단숨에 수왕검을 감싼다.

“죽는다고, 멍청아!”

손목에 엮인 탓에 억지로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 달기가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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