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1화
제 281화
잠시, 그런 달기를 바라본 황준우의 눈에 짧은 망설임이 지나가고, 곧 결심이 어렸다.
“약속해. 착하게 산다고. 하다못해 이유 없이 누군갈 죽이지는 않겠다고.”
“어서!”
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황준우의 일갈에 달기의 고개가 몇 번이고 끄덕여졌다.
“어, 어.”
“그리고 다음엔 절대 눈에 뜨이지 마.”
짧은 말이 끝나는 순간 황준우의 손목에 묶여있던 빛의 밧줄이 끊어졌다.
홀로 멍하니 지면에 떨어진 달기가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을 내뻗었지만 황준우는 이미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영정의 코앞까지 다가간 뒤였다.
“……멍청이. 죽든지, 말든지!”
입술을 깨문 달기가 재빨리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짓을……!”
그 모습을 다소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신아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황준우와 백교 측을 향해 달려나갔다.
“칫, 잘못하면 천 년 쌓은 공덕이 오늘 무너지겠구먼.”
양손에는 긴장감으로 가득 채운 땀이 물씬 차올랐다.
하늘에서 떨어졌던 하얀 기둥과 같던 짐승의 앞발이 눈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질 무렵, 황준우의 수왕검이 영정의 머리카락 끝자락을 베고 지나갔다.
“……!”
흩어지는 머리 자락을 보며 신음을 흘린 영정의 시선이 바로 옆을 향했다.
지켜만 보는 것 같던 중년 여인, 청묘가 움직인 것은 동시였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손이 날카롭게 황준우의 목을 찔러온다.
그 기세가 날카롭다 못해 섬뜩하여 목을 움직여 공격을 피한 황준우의 손에서 수왕검이 떨어졌다.
쐐에엑-!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왕검이 영정을 쫓는다.
그를 가볍게 쳐내는 것은 이번에도 청묘의 손이다.
황준우의 인상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주먹을 내뻗고, 기다렸다는 듯 맞추어 들어오는 새하얀 손바닥과 부딪친 순간에는 주변의 자연지기가 크게 출렁인 후, 사그라든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난 황준우의 눈에 감탄이 흘렀다.
“진짜 여중제일고수가 여기 있었네.”
“…….”
감정 하나 없는 듯한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보는 청묘의 눈에는 흔들림도 없다.
“봐봐, 묘! 저거, 저거! 놔두면 진짜 위험할 것 같다니까!”
그 뒤에 숨은 영정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인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위협적인 기세와, 위엄은 한순간에 사라진 것만 같다.
“호들갑 떨지 마시고, 다른 두 분이나 어떻게 해주시죠.”
청묘는 황준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답했다.
아주 짧은 틈새라도 놓치면 곧장 당한다.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지만, 오랜만에 어깨가 굳어질 정도로 긴장되는 상대를 마주한 청묘의 호흡이 살짝 가빠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하얀 신수의 거대한 다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 수가 둘이다.
영정과 청묘, 양측 모두를 노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핫-!”
거대한 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린 신아가 기합을 내지른 순간에는 두 사람의 발아래로 나무 덩굴이 올라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다시금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영정의 두 눈 위로 푸른 귀화가 솟아났다.
“흐앗-!”
기합과 함께 땅에 손을 박아 넣은 영정의 몸에서 검푸른 기운이 솟았다.
쿠드드득-!
영정의 손에 걸린 엄청난 양의 나무 덩굴이 대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들어 올려, 단숨에 거대한 채찍으로 엮은 영정의 팔이 크게 휘둘러진다.
폭음과 함께, 하늘을 가리던 짐승의 다리가 또다시 눈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한 황준우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신아의 도술을 훔쳤어?’
나무 덩굴은 자연생성이 아닌 신아가 만들어낸 도술의 영향이다.
한데 그것을 양손에 잡아 제 무기로 다루었다.
신아의 도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결단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어떻게 한 거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를 무렵, 황준우의 가슴 중앙으로 반투명한 강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한눈팔 여유가 있나 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느껴진다.
찌이익-!
단숨에 옷이 찢어지고, 가슴 위의 살이 일부 뜯어져 나가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깊은 상처를 면했으나 곧장 죽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준우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조금 쉽게 봤나.’
사실 비등해 보였던 첫 공수에서는 아주 조금이지만 황준우가 앞섰었다.
몇 가지 동작에서 청묘가 따라오지 못했던 탓이다.
물론 서로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숨겨둔 수 정도는 황준우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빨랐다.
‘여포보다 살짝 느린 수준인가.’
황준우가 여태껏 만난 무인 중, 육체적으로 가장 강하였던 상대는 여포다.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그 움직임을 상식적으로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청묘의 경우는 그보다 조금 아래였지만 역시나 효율적이고 빨랐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로군.’
눈앞의 적.
청묘를 확실히 인지한 황준우는 입가가 마르는 것을 느꼈다.
서로 간에 상충하는 자연지기의 힘이 엇비슷하다.
기운을 다루는 운용 면에서도 대등하다는 뜻이다.
몸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우주를 담고 있기에 완벽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품고 있다 하여도 놀라운 상황이었다. 여태껏 기운을 다루는 일에서만큼은 압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적을 찾을 수 없던 황준우였으니 말이다.
“한 번 더 한눈팔면 죽어.”
청묘의 말은 무거웠다.
단순한 권고나, 협박이 아니라, 확정된 미래를 읊는 것이다.
황준우 역시 다음 방심은 정말로 위험하다는 말에 크게 동의했다.
하지만 온연히 청묘를 상대로 집중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었다.
‘주연하.’
영정이 읊은 그 이름이 계속해서 뇌리를 자극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황제가 되어 황궁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줄 알았던 그녀의 이름이 영정의 입에서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역시 무시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라면 무사해. 지금까지는, 그리고 적어도 한동안은.”
두 눈에 여전히 불쾌한 감정을 담은 청묘가 혀를 차며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 다만 네가 걱정할 일은 없다는 거야. 적어도 아직까지는.”
청묘의 말에, 살짝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라도 주연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로만 알았기에 다소 복잡하였던 머리가 정리되었다.
“고마워.”
이제야 눈앞의 적, 청묘가 확연하게 보였다.
아마 그녀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일 터였다.
“나름의 보답.”
이 시대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적수가 될 무인은 없었다.
오래도록 무료했고, 그만큼이나 식어 있던 가슴이 뛰고 있다.
황준우라는 무인의 등장은 청묘의 입장에서도 기쁜 일이었다.
‘아쉽게도 이 자리에서 죽어야겠지만…….’
그래도 끝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의 맞수를 쉽게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나도 이제부터 최선을 다할게.”
허공에 떠 있는 수왕검을 한 손에 움켜쥔 황준우의 주변을 맴돌던 오색빛깔 기운이 완전히 갈무리 된다.
자연스럽게 청묘의 자연지기가 황준우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무슨 장난…….”
“두고 보면 알 거야.”
짧은 답과 함께 큰 한 걸음을 내디딘 황준우의 신형이 청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놀란 청묘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고개를 뒤로 젖힌다.
턱 끝, 예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검극이 보인다.
시야를 아래로 내리니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황준우가 웃고 있다.
“배웠거든.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법.”
차가운 목소리가 청묘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건…… 생각 이상…… 나도 우습게 본 건가.’
입가로는 웃음이 떠올랐지만 등 뒤가 촉촉하게 젖어 든다.
그 순간에도 허공으로 떠오른 수왕검이 미간을 향해 쏘아지고, 가슴 앞으로 두터운 강기의 기운이 밀려들고 있었다.
파바밧-!
연기구름처럼 흩어지는 청묘의 신형을 바라본 황준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를 곁눈질로 확인한 청묘가 혀를 찼다.
‘빨리도 쫓아오네.’
본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공중으로 피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라고들 한다.
공중에서의 운신이 많이 제약되는 탓이다.
하나 그 또한 황준우와 청묘 정도 수준의 고수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중은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이 아니다.
기운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 수도 있고, 구름 위를 날듯 몸을 띄울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기준에 있어 하수들의 싸움과는 엄연히 격이 달랐다.
쫓아온 황준우의 검이 다시 한 번 청묘의 신형을 찌른다.
그녀의 신형이 흩어지듯 사라지는 것도 동시다.
황준우의 시선은 그런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점점 더 가까이 따라붙는다.
한데 이제 보니 그 모습조차 또 다른 의미로 경악스럽다.
청묘가 움직이기 전 짧게 만든 자연지기를 발판 삼아 쫓아오고 있다.
기운을 펼쳐 공간을 제어하며 공중을 날고 있는 청묘와는 달랐다.
‘순수하게 육체 능력만으로 쫓아오고 있어.’
자연지기의 제어조차 뛰어넘는 육체의 움직임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외치고 싶지만 영정에게 이와 같은 위용을 보인 무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여포 봉선과는 대체 무슨 관계지?’
의문이 끝을 맺을 무렵, 무섭게 쫓아오던 황준우의 손아귀가 드디어 청묘의 멱살을 훔치듯 사로잡았다.
청묘는 기다렸다는 듯 양손을 펼쳐 강기를 내질렀다.
지근거리로 다가온 반투명한 강기를 왼손날을 이용해 베어버린 황준우의 등 뒤로 수왕검이 떠올라 벌처럼 날아들었다.
대다수가 청묘의 자연지기로 뒤덮인 공간에서, 황준우의 기운에 움직이는 유일한 도구가 청묘의 어깨를 꿰뚫었다.
핏물이 튀기고 청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그 순간 황준우의 표정 역시 기묘하게 변했다.
짧은 틈새, 멱살을 움켜쥐었던 팔에 청묘의 오른손이 맞닿아 있었다.
빛과 함께 솟아난 반투명한 강기가 무겁게 황준우의 팔을 짓눌렀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황준우의 손에 힘이 풀렸다.
어깨에 꽂힌 수왕검을 뽑아, 다시금 황준에게로 내던진 청묘의 신형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백교와 신아, 두 사람을 상대로 다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던 영정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향해 손을 내뻗은 청묘가 고개를 내젓는다.
“제가 합니다. 맡긴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영정의 두 눈에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곧 고개가 크게 내저어졌다.
“아니. 판단은 충분해. 놈은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해.”
“아…….”
청묘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렀다.
푸른 귀화가 솟은 안구로 황준우를 바라본 영정의 신형이 거대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늘의 태양이 가려졌다.
압도적일 정도의 기운이 주변을 뒤덮고 황준우의 몸을 휘감았다. 허공에서 황준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손바닥은 마치 천벌(天罰)과 같아 보였다.
‘어째서?’
상대에게 압도당한 듯, 아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아무리 거대한 존재라고 하여도 겁 하나 집어먹지 않은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기이한 경험이 처음이라는 사실 또한 문제였다.
“안 됩니다!”
백교의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앞발이 그러한 손바닥을 막아선다.
하나 아무런 저항조차 못 한 채, 한여름에 눈이 녹아내리듯 단숨에 짓뭉개져 버린다.
창백한 안색의 백교의 입가로 핏물이 흘렀다.
“감히 제왕의 심기를 거스른 죄. 죽음으로 되갚아라!”
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가 황준우의 머리를 띵하고 울릴 때였다.
눈앞으로 여섯 개의 여우 꼬리가 휘날렸다.
거대한 손바닥이 지면을 때리는 손가락 사이의 작은 틈새로, 황준우를 품에 꼭 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는 머리 위로 쫑긋 솟은 짐승 귀를 까딱거린 달기가 핏물을 흘리며 외쳤다.
“멍청이! 그러게 죽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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