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4화
제 284화
“저 역시 잠시 얼굴이나 뵈었으면 했던 겁니다. 중요한 일은 서왕모께서 직접 하실 터이니, 이대로 나가셔서 궁의 최정상에 오르면 옥청경으로 향하는 문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혼자 가면 되나요?”
“계단만 오르면 되는 일인데, 혹시 안내자가 필요하십니까?”
태상노군의 물음에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아니니까요.”
“후후, 그래 보입니다. 백택께서는 잠시…….”
“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있습니다.”
웃음을 지은 태상노군이 손을 저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정상까지로 향하는 계단에 빛무리가 어렸다.
“혹시 해서 표식을 남겨 놓았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기를.”
“예. 그러면 이만.”
달기를 품에 안은 채로 또 한 번 공수를 취한 황준우가 단숨에 방을 벗어나 계단을 오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상노군의 입에서 깊은숨이 쏟아져 나왔다.
“하아…….”
“한숨이 깊으십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지요.”
백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펼쳤다.
“그분의 도박이 제법 성공적인 듯해서 다행입니다만…… 만약 구원자의 심성이 조금만 삐뚤어졌어도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보셨다시피 훌륭하게 자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도의 한숨이 먼저 나온 겁니다. 어허허.”
너털웃음을 흘린 태상노군이 긴 수염을 몇 번이고 쓸어내린다.
표정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가득 채워진 채였다.
“그리고 곤륜 측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계셨지 않습니까.”
“응? 우리가 말입니까?”
태상노군이 능글맞은 표정을 한 채 어깨를 으쓱인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백교가 가는 눈을 살짝 뜨고는 미묘한 시선을 흘린다.
“자꾸 모른 척하실 겁니까?”
“허허허…… 이것 참, 백택의 눈마저 피할 수는 없습니다그려. 과연 만물열람(萬物閱覽), 명불허전입니다.”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연결해 놓으셨지만 글쎄요…… 아마 공자께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으실 확률이 높습니다.”
“구원자 본인이 말입니까?”
“예. 눈치가 빠른 편이니까요.”
“허허…… 설마…….”
긴 수염을 쓰다듬은 태상노군의 시선이 황준우가 따라 오른, 아직도 빛무리가 자욱한 계단을 향했다.
“오히려 서왕모께서 놀라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백교의 웃음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전해졌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태청궁의 정상에 도착한 황준우의 앞으로 거대한 백색의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현판에는 옥청경(玉淸境)이라는 글이 검은 글씨로 양각되어 있다.
‘궁 정상에 또 다른 문이라니.’
기이한 경험이다.
문 앞에는 태청경 입구에서 보았던 좌와 우를 닮았으나, 더 험상궂어 보이는 중년인 둘이 검과 방패를 든 채 서 있다.
“미리 말하지만 이 녀석도 함께 갈 거야.”
황준우가 품에 안은 달기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렇게 해라.”
“이미 어머니께서 허락하셨다. 조금만 기다려라.”
묘한 웃음을 보인 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밀기 시작했다.
‘여긴 자동이 아니네.’
신선계의 또 다른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일까?
새로운 모습에 황준우가 열리는 옥청경의 문을 신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큰 굉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잠시 태청궁이 떨려왔다.
“지나가라.”
“응원한다.”
문을 연 후, 다시금 좌우로 비켜선 중년인이 황준우에게 말을 건넨다.
그 길을 무심코 지나치려던 황준우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혹시 네 이름도 우? 그리고 좌?”
우측과 좌측의 중년인을 가리킨 황준우의 질문에 두 사람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우리가 동생이다. 난 우이(右二).”
“난 좌이(左二)다!”
“아하…….”
동생들 측이 더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것 같다는 말을 속으로 삼킨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내 이름 황준우. 또 보자고.”
“고맙다.”
“기억하겠다.”
이후 황준우의 걸음은 환한 빛을 뿌리고 있는 옥청경 문 건너편을 향했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이려나?’
곤륜에서 태청경의 문을 넘어섰을 때 보았던 풍경은 그야말로 상상했던 선계의 모습이었다.
드넓은 초원과, 평화로운 동물들의 모습,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옥청경.
빛이 사라지고, 펼쳐진 풍경에 황준우는 감탄을 흘리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
“무릉도원(武陵桃源)!”
거대한 복숭아밭,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하얀 병을 기울이고 있는 신선들과 동물을 닮았으나 또 다른, 처음 보는 영물들이 그런 신선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옥청경의 풍경은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면 여기 있는 복숭아가 모두 반도인가?”
신선들이 탁주가 들어 있는 하얀 병을 들이키며 손을 내뻗어 자연스럽게 따먹는 복숭아.
빛깔이 다소 좋은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나 전설상의 반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이곳에 있는 복숭아는 반도가 채 되지 못한 녀석들이다. 흘흘.”
놀라는 황준우에게 다소 낯익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돌려 말을 건 노파를 바라본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과연, 할머니가 서왕모였구나.”
“호오……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선계의 어머니라 불리는 노파의 모습을 본 황준우가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기색이 가득했고, 특이했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언제부터 알았던 것이냐? 설마 처음 연하랑 같이 객점에 왔을 때부터?”
“아, 그건 아니고. 황궁 때 일로 들렀을 즈음부터.”
황준우의 말에 월하객점의 주인, 심술꾼 노파로만 알고 있던 서왕모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꽤나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버려서. 어쨌든, 이렇게 보니 반갑네.”
“나도, 좋은 얼굴로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구나.”
말과 다르게 제법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지은 서왕모다. 황준우는 품에 안고 있는 달기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말이지. 할머니. 여러 가지 궁금한 건 뒤로 미뤄두고 우선 이 녀석 좀 살려줘. 사실 그렇게 착한 녀석은 아닌데, 그래도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사람이 빚을 졌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이렇게 죽는다고 끝이 아닌 건 알지만…….”
“길게 설명할 필요 없다.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 네 고운 마음이 이미 반도 하나의 값을 치르고도 남겠구나. 따라 오거라.”
제법 시원하게 말한 서왕모의 걸음이 복숭아나무가 가득한 과수원을 빠르게 지나간다.
그 뒤를 쫓기 시작한 황준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건 뭐지?’
태상노군과 마찬가지로 살짝 공중에 떠오른 채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서왕모의 움직임은 경공도, 축지와도 조금은 달라 보였다.
따지자면 축지에 가깝긴 한데 땅을 딛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특이점이 있었다.
‘저걸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이전에 고민하여 만들었던, 다소 위험하지만 빨리 달리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높은 허공에서 축지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흘흘, 영악한 놈. 이건 공짜가 아니니 알아서 잘 배워 보거라.”
황준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뒤를 돌아본 서왕모가 웃음을 터트리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서왕모의 모습에 황준우도 속도를 높였다.
신선과 영물들이 가득한 복숭아밭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주변을 빠르게 지나쳐 간다. 바람이 찢어질 정도의 움직임에 몇몇 신선들이 잠시 시선을 보냈으나 단지 그뿐이다.
‘오호, 이래도 쫓아온다고.’
바로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황준우를 바라본 서왕모가 내심 감탄을 토했다.
황준우의 무공이 범상치 않음을 알았으나, 그녀 역시 선계의 최고 신선 중 하나다.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웃음을 지은 서왕모가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어지간한 중급 신선, 또는 무공으로 선도에 오른 무선들도 지쳐 떨어지기 십상인 빠르기다.
한데 황준우가 그 뒤를 무섭게 쫓아왔다.
얼굴이 제법 굳어졌지만 그리 지쳐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놈이?’
입술을 깨문 서왕모의 쌍심지가 살짝 솟았다.
‘전력을 다해 달려주마.’
생각지도 못한 고약한 심보가 올라왔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놓친다면 다시 데리러 돌아오면 될 뿐이다.
마음을 먹은 서왕모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길게 늘어졌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황준우도 깜짝 놀랐다.
‘저게 뭐야.’
이미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서왕모의 뒷모습이다.
경공도 아니고, 축지와도 다른데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 놀라울 뿐이었다.
전력을 다한 경공으로도 쫓을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결국 황준우의 몸에서 팔괘술의 기운이 빠져나왔다.
땅이 접히고, 황준우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오른다.
지면이 흔들리는 소리가 잠시 주변을 울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소리에 놀란 서왕모가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빛살 하나가 서왕모의 머리 위를 지나쳐 어딘가로 떨어진다.
그 뒷모습이 영락없는 황준우였다.
“……지금 내가 따라 잡혔다고?”
순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얼떨한 음성을 흘린 서왕모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무슨 수법을 썼는지는 예상이 갔지만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방법이 짐작이 갔기에 더 어이가 없었다.
“고얀 놈! 남의 영역에까지 와서 제가 이기려고 목숨까지 걸어!”
입가로는 절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다소 격한 자존심 싸움이 채 끝나기도 전 서왕모의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게 서라. 이놈아! 이미 여기가 반도 밭이다!”
머리를 울릴 정도의 큰 음성에 다시 한 번 축지를 펼치려던 황준우의 몸이 멈칫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잘 몰랐는데 확실히 주변 풍경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선 술을 마시며, 복숭아를 따 먹던 신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영물들은 몇몇 보이기는 했으나 대다수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눈을 감고 깊게 잠든 채다.
시끌벅적하게도 느껴지던 초입과는 엄연히 다른 분위기다.
조용하고 적막하다.
그렇다고 신선이 하나도 없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 복숭아나무 사이를 바쁘게 다니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녀복을 입은 여자 신선들이 몇몇 보인다.
‘이게 진짜 반도.’
언뜻 보면 일반 복숭아와 큰 차이 없는, 다만 다소 진한 분홍빛이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이다.
하나 자세히 보면 복숭아 자체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인다.
‘내부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 있구나.’
자연지기에서 생명이라 볼 수 있는 물과, 땅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짙은 확연한 생기(生氣)가 가득한 반도를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에 절로 감탄이 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