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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85화 (285/373)

학사재생 285화

제 285화

“이곳에 있는 반도는 최소 삼천 년 이상 키운 녀석들이다. 어때, 환상적이지 않느냐?”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서왕모가 묻는다.

“감동적이네요.”

황준우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기운에 집중할수록 주변을 가득 채운 활력이 온몸을 기분 좋게 적시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는 달기의 몸 역시 단순히 반도밭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 제법 회복되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반도 중에서는 가장 하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했듯 그래도 삼천 년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선계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지. 실상 함부로 내어줄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만…….”

웃음을 지은 서왕모가 손짓하자 주변을 돌아다니던 여자 신선이 반도 하나를 나무에서 따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를 제 손으로 받아든 서왕모가 황준우를 향해 내민다.

“네가 가진 마음의 가치, 그리고 그간 해왔던 위대한 업적, 또한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에 비하자면 부족함이 느껴지는구나.”

“할머니…….”

다소 감격스러운 눈빛을 한 황준우의 말에 서왕모의 눈에 짓궂은 빛이 떠올랐다.

“다만 선계까지 와서 늙은 노파 하나를 이기려고 전력을 다한 것 하나는 괘씸한데…….”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였다고?”

“객점 주인과 손님 사이였지.”

“아이고, 조금도 가깝지 않구나.”

“그래도 가게 안 망하게 하는 데 일조했지 않아?”

“네놈이 없어도 안 망했다. 이놈아! 단골이 얼마나 많은데!”

잠시 버럭 소리를 친 서왕모의 눈에 쌍심지가 솟았다.

“다음에 가면 제일 비싼 술 살게.”

“반도 값으론 어림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황준우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안 된다만, 약속 하나만 해다오.”

“연하. 무사히 구해내야 한다. 가엾고, 착한 아이다.”

서왕모의 말에, 다소 편안하던 황준우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그는 선계에 와 충족감을 느끼고 있지만, 시황제 영정의 손에 잡혀 곤욕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답답해진 탓이다.

“응. 살결 하나도 상하지 않게, 무사히 구해낼게.”

“좋구나. 약속 값이다.”

시원해 보이는 웃음을 지은 서왕모가 손에 들고 있던 반도를 허공으로 던졌다.

기겁한 황준우가 재빨리 한 손을 뻗어 그를 받아든다.

“깜짝이야!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어쩌려고!”

“천하의 무신이 그 정도도 못 받으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시점에, 기미가 없던 움직임이라 황준우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서왕모 역시 표를 내지 않을 뿐 무공의 경지가 얕지만은 않은 듯했다.

“하여튼 고마워. 할머니. 일단 이 녀석부터 살리고 나머지 이야기 하자.”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런데 세상에…… 마왕을 살리겠다는 구원자라니. 반도가 조금 아깝기는 하구나.”

참으로 미묘한 시선을 보낸 서왕모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미 마음을 먹었으나 진짜 반도가 마왕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바라보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사이 달기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황준우가 반도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단지 맞닿은 것뿐인데 밝은 빛과 함께 흘러나온 생명력이 달기의 전신에 흩어진다.

‘이제 이걸 어찌 먹이지?’

생각해보니,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반도를 먹일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던 황준우가 난감한 감정을 느낄 때였다.

가만히 있던 달기의 입이 열렸다.

달리 황준우가 무슨 방도를 찾기도 전,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반도를 입에 문 달기의 턱이 알아서 움직이고 삼키기까지 한다.

놀란 황준우의 시선이 서왕모를 향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의 손끝이 달기를 향해 있는 탓이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봐 조금 도움을 주는 것뿐이니.”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달기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도 서왕모의 손짓에 따라 반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반도의 효과는 굉장했다.

생명력이 가득 차오르다 못해 넘쳐 주변으로는 연분홍빛이 가득 차기 시작했으며, 짓뭉개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던 달기의 꼬리 역시 다시금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금씩 감겨있던 달기의 눈썹 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손가락 마디도 약하지만 미동을 보였다.

“내 목소리 들려?”

조심스러운 황준우의 목소리에, 떨리는 달기의 눈썹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이윽고 주변을 감싸던 연분홍빛이 달기의 몸 내부로 빨려들 듯 흡수된 직후에는,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짧은 침묵이 흐른다.

둥글둥글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 본 달기의 입가로 이내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시끄럽다. 이 요괴 년아!”

쌍심지를 높게 세운 서왕모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놀란 달기가 재빨리 황준우의 뒤로 숨으며 몸을 웅크렸다.

“저 고약한 마귀할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응? 둘이 아는……”

황준우가 의문을 채 끝내기도 전.

“누가 누구보고 마귀할멈이래! 이 망할 요물이! 네년이 마왕이지 않느냐!”

“마왕 안 해! 때려칠래! 할멈이 거기 더 잘 어울려!”

“이이…… 미, 미친 것이!”

눈썹 끝을 파르르 떨던 서왕모의 머리카락이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지며 주변의 기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의 파장이 엄청난 탓에 황준우조차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겉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더한데?’

태상노군과 서왕모.

선계의 신선들 중 최고 등급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 황준우가 느낀 소감은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강력한 힘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뭔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는 아니다.

놀랍지만 순간적으로나마 의욕이 꺾일 정도로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때문에 서왕모가 빠르게 달려갈 때 다소 승부욕이 발동하여 뒤를 쫓았던 것이다.

한데 지금 서왕모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조금 달랐다.

황준우의 단전 아래, 조용히 잠자고 있는 우주기가 꿈틀거리며 자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엄연히 말해 눈앞의 서왕모는 근래 만난 최강의 적인 영정보다도 몇 수는 앞서 보였다.

‘굉장하잖아.’

지금 당장 맞붙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상대는 굉장히 오랜만이다.

심장이 떨리고, 말아 쥔 두 주먹에는 긴장감으로 땀이 가득 차올랐다.

“이놈 봐라?”

문득 그런 황준우를 바라본 서왕모의 눈에 이채가 가득 찼다.

“지금 나랑 진심으로 한번 싸워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냐?”

반짝이는 황준우의 눈에 가득 찬 감정은 엄연한 호승심이다.

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최고 신선이 된 이후 그녀를 향해 이런 시선을 보낸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최소 신선이 아닌 이는 누구도 없었다.

유계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왕들도 서왕모가 불같이 화를 내면 달기와 같이 감히 나설 생각을 못 하고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그런 서왕모를 향해, 아직 인간의 탈을 벗지 못한 황준우가 승부욕을 비추고 있다.

자연스레 서왕모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황준우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중압감에 황준우의 이마 위로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섭게 눈매가 솟은 서왕모의 표정에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황준우를 압박하는 기운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은데.”

그 와중에, 황준우가 입을 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거친 기운을 내뿜던 서왕모의 눈가에 감출 수 없는 이채가 흘렀다.

치솟았던 눈매는 순식간에 내려온다.

“아……!”

입에서 터져 나온 한숨에는 감탄이 묻어 있었다.

주변을 뒤흔들던 기운 역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생각 없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황준우의 질문에 서왕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번쩍인다고 생각했고, 달기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폭음과 함께,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어깨 바로 위까지 온 서왕모의 손길을 막은 황준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위험…….”

“고약한 놈. 아직 네놈은 멀었다고 한 매질을 막아?”

“이게 매질이야? 너무 과격한데?”

“그래야 수준 차이를 알 것 아니냐. 헌데 그걸 막아 버렸으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으나, 서왕모의 가슴은 여느 때보다 크게 뛰고 있었다.

‘이 건방진 녀석. 아까 내가 복숭아를 던질 때 이미 움직임을 읽으려 들었다 이거지?’

한 번은 놓쳤으나, 두 번째는 아슬아슬했지만 막아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지만, 어지간한 신선들도 감히 막을 엄두를 못 내는 공격을 말이다.

무섭도록 소름 끼치는 재능이었다.

‘인계에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분명 인간치고는 대단했다.

말도 안 될 수준이라고는 생각했었다.

하나 최고 신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력을 쓸 수 있는 신선들과 비교하자면, 기껏해야 중급 신선 정도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한데 선계에 올라오기 전부터, 올라온 후까지 짧은 시간 내에 또 성장했다.

선계 아래에서 몇 번 보았던 황준우의 재능을 생각해도 너무나 빨랐다.

‘어쩌면 이 녀석한테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너무나 거대한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다.

서왕모 역시 그 비화(?話)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짐작은 했었다.

하나 생각보다도 더 거대하다.

하늘 아래에서 배울 것이 부족하여 더 성장하지 못했을 뿐인 대기(大器).

‘이놈이 곤륜을 내려갈 즈음에는 얼마나 커져 있을까.’

반만년 만에, 서왕모는 침을 깊게 삼켰다.

‘영정 녀석, 제가 얼마나 골치 아픈 적을 만들었는지 모르고 있겠군.’

입가로는 헛웃음이 흘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침묵이 지나갔다.

황준우는 긴장한 시선으로 서왕모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달기 역시 그 뒤에 숨은 채 두 주먹을 움켜쥐고는 황준우를 바라보고 있다.

고심이 끝나고, 그러한 둘의 모습을 본 순간 서왕모의 입가로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클클클. 마왕쯤 되는 요선이 인간에게 의지해 응원하고 있는 꼴이라니.”

“내 마음이거든! 이 마귀할멈아!”

“빌어먹을 여우 요괴가 정말!”

또 한 번 서왕모의 손이 움직이려는 순간 황준우의 어깨가 살짝 꿈틀거린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군.’

예상은 했지만, 두 번째보다 세 번째 반응이 더 좋다.

서왕모는 고개를 내젓고는 한숨을 쉬었다.

“되었다. 그만하자. 네놈도 긴장을 좀 풀어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아직은 멀었다. 단전 아래에 있는 기운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덕이고 있는 중 아니더냐?”

서왕모가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고 나서야, 집중하고 있던 황준우의 어깨에 힘이 풀렸다.

“휴우…….”

입 바깥으로는 깊은 한숨이 떨어져 내렸다.

“정말 굉장하네. 사실 지금 내 몸속에 있는 우주기를 모두 흡수해도 이길 방법이 몇 가지 떠오르지 않아.”

“고약한 놈. 몇 가지라도 떠오르긴 한단 말이냐?”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운이 아주 좋다면…….”

“말도 말아라.”

서왕모가 손을 휙 내저으며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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