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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88화 (288/373)

학사재생 288화

제 288화

담담하기만 하던 황준우의 입에서 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눈물로 범벅된 고개를 들어 거칠게 고개를 돌려 황준우를 직시한 달기가 외친다.

“약속해!”

“그게…….”

“나도 약속했었잖아! 그러니까 너도 약속하라고!”

“그, 그래.”

그 기세에 압도당한 황준우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그제야 어느 정도 흡족한 듯 달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약속 안 지키면, 나도 약속 안 지켜. 나쁜 짓도 많이 할 거고, 사람도 마구잡이로 죽일 거야.”

그 뒤로도 황준우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붉은 입술을 달싹이던 달기가 고개를 돌렸다.

“가자! 마귀할멈!”

힘찬 목소리가 제법 젖어 있었지만, 의지는 분명해 보였다.

황준우의 손목에 묶여 있던 빛의 밧줄이 자연스럽게 끊어진다.

그렇게 멀어지는 달기의 뒷모습을 조금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황준우를 향해 서왕모가 코웃음을 흘렸다.

“고얀 계집이……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사람을 홀리려고.”

“할머니.”

“됐다. 이것아. 더 말 안 해도 잘할 터이니. 내 생각보다 심경의 변화가 큰 것 같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고마워.”

“너는 네 할 일에나 집중하도록 해.”

“또 보자. 건방진 애송이.”

마지막으로 웃음을 보인 서왕모마저 이제는 그 뒷모습이 흐릿해진 달기를 쫓아 멀어진다.

홀로 남겨진 황준우는 그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시선을 팔선도에게로 돌렸다.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린 이후, 다소 흐릿하던 눈에 강렬한 빛이 돌아왔다.

“팔선도라…….”

서왕모의 말대로였다.

느낌상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다른 데 정신을 팔 틈이 없었다.

힘차게 내디딘 걸음은 단숨에 강 한복판을 향했다.

선계라 하여 모든 것이 평등하지는 않다.

이미 태청경과 옥청경을 지나오며 보았듯 신선들마다 차이점은 분명했다.

누군가는 무공을, 또 누군가는 학문을, 어디의 누군가는 그야말로 도를 깨달아 이곳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탈하여 애초부터 신선으로 난 자들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황준우의 곁에 있었던 서왕모 역시 애초에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는 영혼을 수집하는 무시무시한 요괴였다는 소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곤륜에 군림한 신선에 속하는 것이다.

팔선(八仙)의 경우는 그런 서왕모와는 반대되는 경우에 속했다.

그들 중 한때 범인(凡人)이 아니었던 자가 없다.

또한 그 소속된 이들의 남녀노유(男女老幼), 빈천부귀(貧賤富貴)를 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 아래 인간군상이었던 이들이 등선하고, 모여 팔선이 된 것이다.

때문에 도가(道家) 내에서는 그 이름이 상당히 유명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지상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주다 보니 친근감이 높은 탓일 터였다.

도교에 관하여 그리 큰 관심이 없는 황준우 역시 그 이름을 들은 적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 가는 신선을 뽑자면 역시 두 사람이었다.

‘검선(劍仙) 여동빈, 천하도산한종리권(天下都散漢鍾離權)!’

둘 모두 팔선 중 무예 방면으로도 이름이 높은 이들이다.

‘만약 둘 다 자리에 없다면 낭패겠지만…….’

서왕모는 팔선의 방랑벽이 심하다고 하였다.

또한 또다시 서왕모의 경우를 통해 보니 지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면 신선들도 어느 정도 천하에서 활동이 가능한 듯도 보였다.

둘 모두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가 봐야지.’

다른 팔선에게서도 배울 것은 충분히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바다 위를 날듯이 유영하던 황준우의 미간이 점점 깊게 팼다.

‘이거…….’

생각보다 멀다.

분명 육안으로 보았을 때 흐릿하게나마 형상이 보여 금방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을 달려도 팔선도가 가까워지는 기색이 없었다.

‘대충 두 시진은 뛰어온 것 같은데, 난감하네.’

선계에는 자연지기를 닮았으나, 안정도가 높은 선기(仙氣)가 풍부하다.

처음 태청경을 넘어선 순간부터 그것을 느꼈고, 서왕모와 자존심을 건 경공 대결에서는 그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까지 적응했다.

지금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지상에서 자연지기를 다룰 때와 다름없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주변의 선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높은 선기는 몸속에 다소 불안정하게 봉인된 우주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덕분에 내력이 모자랄 일은 없지만, 자칫하다가는 체력적 한계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로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마는…….’

아무리 황준우라 하여도 며칠 이상 물 위를 뛰어다니면 지칠 수밖에 없다.

막말로 마음 편히 엉덩이 한 번 붙일 곳 없는 장소 아닌가?

무엇보다 주변의 풍경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과, 고요하다는 것 역시 큰 문제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정신적으로도 적지 않은 괴로움을 느낄지도 몰랐다.

“진짜 곤란한데.”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어차피 주변은 어떤 방해랄 것도 없는 드넓은 강 위였다.

물 위라는 사실 탓에 조금 변형을 가해야 하겠지만, 축지법과 경공을 혼용한 질주를 사용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결심한 황준우는 물 위로 발을 내디디며 축지법을 사용하려 했다.

땅이 아닌 물 위이기에 쉽게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손쉽게 적용되어 주변의 공간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펼쳐졌다.

‘선계여서 그런 건가?’

발밑의 물 하나까지도 선기가 가득 찬 땅이다.

술법을 사용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반적으로 팔괘술을 시전하기도 쉬운 느낌인데…….’

어쩌면 술법적으로도 비약적인 성장을 거둘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황준우가 눈을 반짝 빛내며 다시금 팔선도를 노려보았다.

“어찌 됐든, 도착하고 나서 생각할 일이니까.”

신형이 늘어나고, 줄어들며 속도는 몇 배로 늘어났다.

팔선도에 비하자면 다소 가깝다고 느꼈던 육지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렇게 칠 일 밤낮.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느낌상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을 쉴 새 없이 달렸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망망대해(茫茫大海)와 같은 강물 위에 서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강이야!”

이제는 앞으로도, 뒤로도 오로지 물길뿐.

여전히 저 멀리 팔선도가 흐릿한 형체로 보이기는 하나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 서 있던 육지에서만 멀어진 느낌.

칠 일이라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어지간한 무인이라 하여도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면 지칠 수밖에 없다.

하나 황준우에게는 분명 여유가 있었다.

정신력 역시 아직은 굳건했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눈을 빛낸 황준우가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팔선도와의 거리에 황준우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대체 얼마나 멀리 있는 거냐고!”

어찌나 흥분하였는지 주변으로 기운이 폭발하며 물자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쏴아아-!

빗물처럼 쏟아지는 물을 머리 위로 맞는 황준우의 코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차가운 물을 온몸에 적시니 그래도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힘들고, 제법 지치지만 결국 가야 할 길이다.

마음을 가라앉힌 황준우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서왕모 할머니가 움직이는 방법, 분명 더 효율적이던데.’

지상이 아닌 물길에서도 축지를 펼쳤다.

서왕모처럼 허공에서도 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어차피 팔선도는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수련이나 하는 편이 마음이라도 편할 터라 생각한 황준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축지경공(縮地輕功)을 안정적인 형태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더 좋고.’

빠르기는 하지만 불안정한 면이 많다.

황준우는 다소 마음을 느긋하게 먹은 후 스스로의 관조와 새로운 이동법의 연구에 힘을 썼다.

서왕모가 보여주었던 공중 축지는 삼 일 만에 그 방법을 찾았다.

축지경공이 가진 약점 역시 보름이 지난 후에는 거의 사라졌다.

간단한 일이었다.

축지경공의 세계가 인지하지 못할 만큼 빠른 탓에 위험하다면, 그를 익숙하게 만들면 될 일이다.

황준우는 그 모든 걸 한 달도 되기 전에 이루어냈다.

그렇게 완성된 축지경공을 이용한 가공할 속도로 이동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드디어…….”

눈앞까지 다가온 팔선도의 모습을 확인한 황준우의 지친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도착했다!”

기분 좋게 육지를 디딘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처음 팔선도를 향해 뛸 때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긴 여정이었다.

중간에는 무엇 하나 변함없는 풍경에 쓸데없이 힘을 쏟아 강이라도 뒤집고 싶은 심정이 몇 번 들었으나 간신히 인내했다.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진짜 마구잡이로 힘을 쏟아 강이 범람하기라도 한다면 낭패였으니 말이다.

“평화롭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팔선도에 대한 첫 감상은 일반적인 선계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바람이 한 번 불면 풀과 나무가 내음을 풍기며 춤을 추었고, 이따금 작은 새와 동식물들, 곤충들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섬이다.

눈앞으로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팔선 각자의 거처인 듯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려나.”

팔선도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봉우리도 가파르지만 높지는 않다.

마음먹고 오른다면 어디든 반나절 안에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어디에 누가 산다고 이름이라도 적혀 있으면 좋으련만…….’

오는 길부터 불친절했던 팔선도에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고민하는 황준우의 마음을 이끈 것은 지저귀는 새들 사이로 흘러든 퉁소 소리였다.

아주 짧은 시간 들려오고 사라졌지만 황준우는 그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왼쪽 끝에서 세 번째 봉우리.

‘신선이 있나 보구나.’

다른 봉우리에는 팔선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하나 퉁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분명 누군가 있다는 얘기다.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가까이 갈수록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던 퉁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음률이 제법 흥이 나 뛰어가는 황준우의 걸음에도 절로 힘이 어렸다.

팔선도까지의 여정에 지쳐있던 감정이 완전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봉우리의 끝에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퉁소 소리는 오두막 뒤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오두막 뒤편까지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귀한 풍경을 목도했다.

기분 좋은 음률에 아름다운 백학(白鶴)이 모여 하나가 된 듯 춤을 추고 있다.

때로는 여흥을 더하듯 입을 벌려 울음소리를 흘렸는데 그 소리가 제법 맑다.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황준우가 봐온 선계에서도 이토록 기분 좋아 보이는 광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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