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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93화 (293/373)

학사재생 293화

제 293화

그 모습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는 결국 고개를 젓고 눈을 감았다.

‘심상수련이라도 하고 있어야겠군.’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마음을 놓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장 눈앞으로 허상의 여동빈이 떠올랐다.

‘강하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면 백 번 싸워서 아흔 번은 내가 이겨.’

술법까지 사용한다면 백 번 중 아흔아홉을 이길 터였다.

여동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수련 상대로는 아쉬운 면이 많다.

고민 끝에 황준우는 또 한 명, 가상의 적을 만들었다.

모습을 나타낸 이는 다름 아닌 영정이다.

‘승률은 사 할…… 아니, 삼 할쯤 되려나.’

난적이다.

전생을 통틀어 현생까지, 근래 들어 유독 강자들을 많이 만났다.

‘조금 더 난이도를 올려보자.’

이내 영정의 옆에 청묘마저 나타났다.

그녀 역시 무공만으로 보자면 황준우를 놀라게 할 만큼의 실력자였다.

‘이 할…… 이하인가.’

셋의 기세를 떠올렸을 뿐인데 등 뒤가 절로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이쯤은 돼야 넘어서는 맛이 있지.’

입맛을 다신 황준우의 눈앞으로 세 무인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맹호를 떠올릴 만큼 대담하였으며, 벼락이 내리치는 듯 빨랐다.

콰과광-!

황준우의 머릿속으로 끝없는 폭음이 이어졌다.

심상 속 대련이 백 번이 넘어갔다.

그때가 될 때까지도 황준우의 승률이 오 할을 넘지 못했다.

세 강자의 합공은 그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결국 황준우는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깜짝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출수(出手)를 할 뻔하였다.

“이제야 끝난 게냐?”

코앞, 눈동자를 굴리는 장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벽안(碧眼)?’

장과로의 눈빛이 일순간 그렇게 보였으나, 다시 확인해 보니 확연한 검은빛이다.

“재미있는 짓을 벌이더구나. 심상만으로 그 정도로 상세한 상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다.”

“……심상수련을 꿰뚫어 본 게요?”

심상수련은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가상의 상황이다.

한데 장과로는 마치 그를 모두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마치 생각을 읽어내듯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일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런 굉장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네놈이 무서운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황준우의 시선을 받은 장과로가 혀를 차며 말한다.

“그래도 마치 생각을 읽는 듯 말하는구려.”

“대충은 보이니까. 뇌를 읽는 게 아니라 표정과 눈빛을 보는 거다. 그쯤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 않느냐?”

가볍게 혀를 찬 장과로가 다시금 제 당나귀 위로 올라 길게 하품을 했다.

“그나저나 어디 사는 여씨 놈 같은 말투는 집어치워라. 내 너에게 관심이 많아 지켜본 적이 많아 그 심성을 잘 알고 있다.”

“음…….”

“클클, 고약한 놈. 고민하는 척하기는.”

웃음을 흘린 장과로가 풀쩍 뛰어 당나귀 위로 안착한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처럼 날래고 조용하다.

‘무공을 쓴 건 아닌데…….’

과연 팔선 제일의 술법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 네놈이 나를 찾아온 이유도 잘 알고 있다. 뭐 빼먹을 게 얼마나 있나 알아보러 온 거지?”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배움을 청하러…….”

“그게 그 말이다. 이놈아. 가식적인 척하지 말거라. 나는 솔직한 녀석을 좋아한다.”

음흉한 웃음을 흘린 장과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데 어떻게 하나. 나는 네놈에게 내 것 중 무엇 하나 내줄 생각이 없는데…….”

짓궂은 어투를 부리는 장과로를 향해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싫다면 방법이 없겠지. 배움을 억지로 청할 수는 없으니까.”

“클클…… 그러면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없겠구나.”

“무슨 말이라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난 별로 관심 없다.”

“흠…….”

턱을 쓰다듬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우리가 대화를 나눌 방법이 무엇도 없지는 않다만…….”

황준우가 손을 휘휘 젓고는 등을 돌렸다.

“아냐, 뭐. 관심이 없다는데 굳이 오래 있을 필요가 없지. 팔선 장과로의 얼굴을 봐서 반가웠어.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

망설임 없이 봉우리를 내려가는 황준우의 뒷모습을 보는 장과로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진짜 가냐?”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눈앞에서 황준우가 사라졌다.

망설이거나, 돌아오려는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친놈일세.”

선계 내에서 본인이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를 내뱉은 장과로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혀를 찼다.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부딪치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고, 기운이 물결치듯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어느덧 황준우는 장과로의 눈앞에 서 있었다.

놀란 황준우가 주변을 둘러본다.

“이놈아. 아직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를 간단 말이냐.”

“이거 참 신기하네. 갑자기 위치가 바뀌었잖아.”

“흥, 팔선도를 만든 게 바로 이 몸이시다. 감히 어딜 벗어나려고.”

“할 이야기 없는 것 아니었어?”

콧대를 높이는 장과로를 돌아본 황준우가 되물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할 것 아니냐. 무슨 젊은 놈이 성미만 급해서는.”

“애초에 먼저 대화할 이유를 잘라버린 게 누군데…….”

“예의 없는 놈!”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 제법 지켜봤다며?”

“빌어먹을 녀석.”

혀를 찬 장과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측이 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본론?”

“부탁을 하나 하고 싶다.”

이제야 장과로의 본심을 이해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에 그렇게 말을 하지.”

“늙은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갈 순 없지 않느냐.”

입술을 크게 내민 장과로가 자세를 바로 했다.

“구원자야. 지상에서 존귀를 이룬 무신아.”

“급한 거 아니었어?”

“떽! 모든 일에는 순서와 체통이 있는 법이다!”

“…….”

황준우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과로의 종잡을 수 없는 성정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편이 나을 듯 보인 탓이다.

“내 본래 아주 오래전, 영정이라는 고얀 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술법을 일러주지 않으려 하였다. 하나 우리의 인연이 이어졌고, 또 때가 다가왔으니 외면할 수만은 없는 법.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면 내 자신의 다짐을 이번 한 번쯤 능히 지울 수 있을 것 같구나.”

결국 이미 한 번 내뱉었던 말 그대로, 부탁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를 지적하고 싶은 황준우였지만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 전, 내가 아주 아끼던 보물 중 하나인 어고(?鼓)를 잃어버렸다. 한참을 찾아 헤맸는데, 선계 어디에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더구나. 다행히 그 위치를 찾기는 찾았는데…… 뭐랄까,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인지라…….”

어고는 책, 그리고 당나귀와 함께 장과로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다.

그런 보물을 잃어버렸다.

이제야 자존심 강한 장과로가 황준우를 붙잡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데?”

“……유계.”

조심스러운 장과로의 말에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계라면 그 마왕들이 있다는?”

“마왕뿐만이 아니다. 유계는 윤회의 기회를 얻지 못한, 또는 스스로 저버린 모든 망자의 터다.”

“……어쨌든 어쩌다가 어고가 그런 곳까지 떨어진 건데?”

“그건…… 말할 수 없다.”

굳게 다문 장과로의 입술에서 고집이 느껴진다.

아무리 캐물어도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알다시피 나도 지금 바쁜 일이 제법 있어서 말이야.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내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곤란한데…….”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였다.

“명의 새 황제를 구하려 한다고 알고 있다. 내 보건대 지금의 네 녀석이라면 영정과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래서?”

“영정의 비밀 황궁의 위치를 알고 있다. 참고로 내 술법으로 그 길을 어디서든 연결할 수 있지. 어고를 찾아주면, 바로 그 황궁으로 보내 주겠다. 클클.”

“먼저 비밀 황궁에 다녀와도 된다는 뜻이야?”

“아무렴, 약속만 한다면 그 순서는 상관없다.”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당장에라도 말이지?”

“그래. 하지만 거기까지다. 무언가를 더 해줄 수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선계 밖에서 신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니 말이다.”

“길만 열어주면 충분해.”

선계에서 수련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주연하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아가 장담한 만큼 안전할 것이라 믿고 있지만, 두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당장 구할 수 있다면 더 좋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 존재하기는 했다.

‘영정을 이긴다.’

심상수련 속 영정은 제법 강했다.

하나 지금의 황준우라면 십 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또, 또. 생각이 훤히 보이는구나. 방심하지 말아라. 네가 본 영정은 다소 영혼에 상처가 생긴 상태였다. 지금 네놈이 삼킨 그 우주기를 통째로 잃어버렸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만심이 강한 놈이라 여유로웠을 테지만, 한 번 된통 당했으니 회복에 열을 올렸겠지. 지금쯤 꽤나 멀쩡해졌을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비밀 황궁은 놈의 앞마당이다. 하물며 개도 제집에서 삼 할은 더 먹고 들어가는 건 알고 있겠지?”

“음…….”

“뭐 그렇다고는 해도 여자 하나를 구출해 오는 일이라면 문제가 없겠지.”

퉁명스럽게 장과로가 간단한 단서를 건넸다.

결국 영정이 황준우의 생각보다 강하다고는 하지만, 꼭 싸워 이길 필요는 없다.

몰래 침투하여 주연하를 구해오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잠시 고민하던 황준우가 물었다.

“아까 말한 대로라면, 그래도 자웅을 겨룰만하다는 거지?”

“네놈이 워낙 괴물같이 성장했으니 말이다.”

장과로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굳이 어고가 아니더라도, 황준우는 세계에 남은 유일한 구원자다.

그를 허망하게 잃게 되면 장과로라고 하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본인이 느낄 허탈감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코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 어쨌든, 우선 비밀 황궁에 다녀오고 싶은데.”

“지금 당장 말이냐?”

“응. 가능하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할지는 이후에 생각할 일인 것 같아.”

결정을 내린 황준우의 눈빛을 본 장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 하자꾸나.”

장과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황준우가 처음 보았던 벽안이 떠오른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죽지는 않겠구나.”

안도한 듯 웃음을 보인 장과로의 검지와 중지가 맞닿았다.

“문이 열리는 시간은 아주 짧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길어지면 눈치챌 테니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돌아올 때는 이 부적을 찢어라.”

장과로가 말을 하는 사이, 당나귀의 허리춤에 멘 가방에서 튀어 오른 부적이 황준우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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