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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94화 (294/373)

학사재생 294화

제 294화

더 이상의 긴 설명은 없었다.

“그러면, 무운을 비마. 건방진 구원자야.”

장과로의 검지와 중지가 길게 벌어졌다.

빛이 번쩍였고, 황준우의 눈앞으로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의 틈새가 벌어졌다.

신비한 보랏빛이 물씬 풍겨 나오는 기이한 형태다.

“고마워. 다른 대가 없이, 무사히 돌아온 이후에 어고는 무조건 구해다 줄게.”

“…….”

미간을 찌푸린 장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준우의 신형은 순식간에 보랏빛 틈새로 빨려 들어간다.

동시에 벌리고 있던 양 손가락을 접어 문을 닫은 장과로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영정 녀석 그사이 결계를 더 강화했잖아. 놈도 괴물은 괴물이란 말이야.”

자칫했으면 내뱉은 말조차 책임지지 못할 뻔했다.

“설마…… 구원자가 당하지는 않겠지?”

상정했던 것보다 더 성장한 영정의 능력에 걱정이 인 장과로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눈동자가 또다시 벽안으로 변했다.

“운 나쁘면 진짜 똥 밟을 각인데.”

눈앞으로 부채를 펼치며 웃고 있는 백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영 안 되면 녀석한테라도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입 밖으로 또다시 긴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방.

화려한 장식.

매일같이 찾아와 보필하는 시종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생활 속에서 주연하는 스스로가 독을 마시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내 자유를 찾았다 생각했거늘, 결국 내 신세는 새장 속의 새로구나.”

깊은 한숨과 함께 심경을 쏟아내지만 대답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주변에 가득한 시녀들과 시종들 모두, 눈을 뜨고 살아있는 듯 움직이나 표정에 감정 하나 비추지 않는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섬뜩한 감정이 인다.

하나 그 또한 영정을 떠올리면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황준우를 만났다고 하였던가…….’

얼마 전, 지친 표정을 한 영정이 그녀를 찾아와 이야기했다.

황준우를 만났고, 죽이지 못했다.

주연하는 안도했다.

영정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표정이 되어서는, 꼭 그를 죽이고 너를 갖겠노라 선언하며 방을 나갔다.

그 조용한 듯한 광기는 주연하의 머리를 새하얗게 태워버렸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

황준우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곧장 탈출을 감행하려 했다.

몰래 문을 열고 탈출하여 나갈 길을 찾으려 하였다.

하나 그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난 청묘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제압당했는지 알 도리도 없이 당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하였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지쳐간다.

마치 독이 퍼져 전신을 갉아먹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궁에 힘없이 묶여 있을 때도 이토록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도 뜻대로 할 수가 없다.

‘아니, 아니다. 오롯이 내 의지만은 나의 것이지 않던가.’

다소 지쳐가던 주연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아직 모든 것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주연하가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산재한 감정 없는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빗살처럼 쏟아진다.

“어디 한번 끝까지 막아 보아라. 내 의지는 강철과 같아 부러질수록 더욱 단단해질 터이니.”

결심을 선언한 주연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어젖혔다.

화려하고 거대한, 하나 죽어있는 궁궐의 풍경이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하나 문을 연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죽은 궁궐이 아닌 명백히 살아 있는 인물이었다.

“어딜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선 영정이 싸늘한 음성을 흘리며 묻는다.

두 눈에는 폭발하기 직전의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않느냐.”

“이곳은 나의 궁이다.”

“하나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이 궁궐에 들어온 모든 것은 나의 것. 나의 소유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흘러나와 주연하의 육체를 억압했다.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 심지어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조차 의지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감히…… 무릎 꿇어라.”

차가운 영정의 음성이 주연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나 무릎이 휘어질 것처럼 떨릴지언정 굽혀지지 않는다. 부릅뜬 두 눈은 마치 영정을 향해 외치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을 빼앗겼다 한들 정신과 의지는 여전히 그녀에게 있다.

“건방진…….”

아랫입술을 깨문 영정의 두 눈에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눈에서 푸른 귀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정했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아끼려 하였으나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겠구나. 하찮은 여인아. 주제를 깨닫고 내 발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라. 따르지 않는다면 내 직접 혼을 거두어주마.”

영정의 손이 주연하의 머리를 향해 다가온다.

하나 여전히 주연하의 무릎은 굽혀지지 않았다.

눈빛조차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천천히 다가온 두 손이 단숨에라도 주연하의 머리를 짓뭉갤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아가던 손을 거둔 영정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끝까지 무릎조차 굽히지 않는다니. 정녕 탐나는 의지로다.”

차가운 시선으로 끝끝내 굽히지 않는 주연하의 모습을 확인한 영정이 자신의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순간 주연하를 압박하던 기운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은 주연하가 순식간에라도 무너질 듯 휘청인다.

하나 지면을 디딘 두 다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인정하마. 너는 강하다. 하나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죽음이 나를 찾아온다 한들……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영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있다.

스스로의 죽음조차 초연할 수 있는 강인한 영혼.

하나 그런 이들이라고 하여 결코 꺾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만간 내가 입었던 상처가 모두 치유될 것이다. 이후 내가 무엇을 할 것 같으냐?”

“궁금하지 않다.”

“아니. 알아야 할 것이다. 네가 아끼는 사람, 물건, 또한 무엇이든.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파멸할 테니 말이다.”

“…….”

“모든 것이 너로 인하여 벌어질 일이지.”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주연하를 향해 서늘한 웃음을 보인 영정이 등을 돌렸다.

“뜻대로…… 되지 않을 게다.”

무거운 음성이 뒤를 따른다.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방에 가두어라.”

단호하게 말하며 내젓는 손길에 영혼 없는 시종들이 움직였다.

드르륵- 쾅!

방문이 닫히고, 그 안에 갇힌 주연하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고얀…….’

영정이 원하는 바를 꿰고 있다는 듯한 태도다.

아쉬움에 혀를 찬 영정이 걸음을 뗀다.

고작 몇 걸음 사이 그의 신형은 어느덧 주연하가 갇힌 궁궐로부터 크게 멀어져 있었다.

부름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청묘가 나타났다.

“쉬고 싶어.”

“그러셔야 할 때입니다. 무리해서 나서셨어요.”

청묘의 걱정스러운 음색에 뒤를 돌아 묘한 웃음을 보인 영정이 말했다.

“묘가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첩 때문에 고생하는 정실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

“뭐, 그녀가 첩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씩 웃은 영정이 다시금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

눈썹을 크게 찌푸린 영정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방금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

“글쎄요. 전…….”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영정의 눈에서 푸른 귀화가 치솟았다.

황궁 곳곳을 둘러보던 그가 문득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노성을 터트렸다.

“장과로!”

거칠게 그의 이름을 읊은 영정의 시선이 주변 곳곳을 훑는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발을 들인 것이냐!”

그 거친 외침에 청묘의 몸도 굳어졌다.

영정의 분노는 깊었다.

주연하를 향한 다소 거친 광기와는 엄연히 달랐다.

순수한 분노.

무시무시한 기세가 다시금 들끓었다.

황궁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린다.

청묘가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과한 분노는 작금의 영정에게 좋지 않다.

“묘. 놈을 잡아야 돼. 장과로는…… 위험해.”

하나 영정은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팔선 중 가장 속내를 알기 힘든 괴짜.

그가 비밀 황궁의 문을 열었다.

잡지 않는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였다.

“제가 할게요.”

청묘가 영정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장과로가 아무리 대단한 술법사라고 하여도 이곳은 선계가 아니에요.”

청묘의 굳건한 두 눈이 영정에게 신뢰를 건넨다.

결국 영정은 이번에도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을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황준우가 선계에서 나올 것이다.

그때 그를 잡기 위해서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옳았다.

“할 수 있지?”

“물론이죠.”

“지켜보고 있을게.”

“걱정 마세요.”

“알지. 청묘?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너밖에 없다는 걸.”

조심스럽게 청묘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볼가에 입을 맞춘 영정이 속삭인다.

언제나와 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인 청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고마워. 청묘.”

마지막 말과 함께 눈앞에 있던 영정의 모습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사라진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청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장과로.”

영정의 휴식을 방해한 자.

그리고 언젠가 선계와 맞서게 된다면 곤란한 적 중 하나.

‘가능하면 죽여야겠지.’

뛰어난 술법사인 만큼 마음먹고 모습을 감춘다면 찾기 힘들겠지만, 방금 전 그녀는 영정의 입맞춤에서 그의 권능 중 일부를 얻어왔다.

영정을 닮은 푸른 귀화가 청묘의 두 눈에도 솟아났다.

비밀 황궁 곳곳을 향하는 시선은 빠르게 흔적을 쫓아나간다.

‘빠르게도 이동했군.’

그렇게 상대의 흔적을 쫓아 눈을 움직이던 청묘의 고개가 갑작스럽게 번쩍하고 돌아갔다.

하늘 위, 빛이 번뜩이듯 무언가가 지나갔다.

짧은 시간인 만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사람의 인영이었다.

‘어째서?’

그런 그가 향한 방향을 확인한 청묘의 머릿속에는 곧장 의문이 떠올랐다.

‘지상의 새 황제와 장과로라…….’

이해되지 않는 조합.

의문은 직접 마주한 이후에 풀어도 될 일이다.

청묘의 신형이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돌아왔던 길을 돌아가며 흔적을 쫓는 그녀의 시선에 피어난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짙어졌다.

‘장과로는 팔선 제일의 술법사.’

하나 정작 주연하를 가둔 궁궐로 향한 발길에서 느껴지는 것은 술법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청묘 그녀에게 익숙한 형태가 보였다.

‘경신술…….’

무공이다.

‘장과로가 무공을 하였던가?’

의문이 꼬리를 물 무렵.

상대의 흔적을 쫓아 주연하의 궁궐에 도달하여 열린 방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기운, 이윽고 그 끝에 있는 상대의 뒷모습을 확인한 청묘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흘렀다.

“장과로인 줄 알았는데…… 생각 외의 대어가 걸려들었군.”

그 목소리를 들은 젊은 청년, 황준우가 뒤를 돌아보며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은신에는 재능이 없다니까. 이름이…….”

“청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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