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6화
제 296화
그 기운은 단숨에 황준우의 전신을 짓눌렀다.
발조차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공간 전체에 형태가 없는 강력한 압력이 더해진 듯했다.
그 짧은 틈새, 청묘의 손바닥이 황준우의 턱 바로 아래까지 도달해 있었다.
황준우의 신형이 궁궐의 천장을 뚫고 허공 높이 치솟았다.
그 뒤를 쫓듯 날아오른 청묘의 등 뒤로 백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바닥 수십 개가 나타났다.
“이걸로 끝이다.”
마치 화살 비가 쏟아지듯, 거대한 손바닥이 황준우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심지어 그냥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어떠한 무공의 이치를 담아 움직이고 있다.
황준우는 마치 홀로 일백에 가까운 청묘를 상대하는 것 같은 심경을 느꼈다.
‘지상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구나.’
그를 다소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본 황준우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흐른다.
청묘는 정말 강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을지도 몰랐을 정도의 초고수다.
‘놀라워.’
여태껏 황준우가 만난 인물 중, 검선 여동빈을 제외하고 이만큼이나 되는 무(武)를 보여준 무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포의 무공 역시 육체의 극한을 보여준 것이 전부였다. 영정조차도 술법을 이용한 폭발력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결국 청묘는 현재 황준우가 만난 무인들 중 가장 강하다.
다소 안일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청묘가 그러했듯, 황준우 역시 그녀의 전력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 마침내 마주했다.
‘나도 전력으로 가야지.’
황준우의 결심에 수왕검이 울림을 토했다.
세상을 덮을 듯 쏟아지는 엄청난 수의 장법은 따지자면 일종의 심상지기다.
청묘가 생각해 낸 무공의 가장 강력한 형태.
그를 우주기로 발휘한 것이다.
자연지기로 펼치는 것과는 엄연히 그 위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황준우 역시 최선을 다한 심상지기를 펼친다.
‘흐름을 따라.’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수왕검이 허공을 날았다.
‘마음이 가는 곳에 이미 검이 있으니…….’
흐름을 이어가는 선의 끝과 끝.
극점(極點)을 긋는 한 줄기 황금빛 섬광이 번쩍였다.
폭음도 없었다.
기가 분출하듯 쏟아지지도 않는다.
하나 황준우와 청묘, 두 사람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황금빛 검광(劍光)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해 버린다.
베이고, 사라진다.
비유가 아닌 그야말로 광속(光速).
‘아아…….’
청묘의 뇌리로 짧은 신음이 흘렀다.
‘이건…… 피할 수 없겠구나.’
가슴둘레 아래로 붉은 핏줄기가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죽는 건가?’
아쉬움은 없었다.
짧은 삶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팔백 년 하고도 몇십 년은 더.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질 시간이다.
‘미련이 남는 것이라고는…….’
감은 눈 위로 슬퍼하는 영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안타까움의 탄식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콰과과광-!
그때가 되어서야 폭음이 들려왔다.
기가 충돌하여 베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가슴 아래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을 아래로 내리까니, 돌아오는 수왕검을 받아드는 황준우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무섭구나, 정녕.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미 새로운 극의(極意)를 만들어내다니. 내…… 패배다.’
의식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완전히 열린 상단전을 통해 가장 빠른 검을 구현해냈다.
검선 여동빈과의 대결 중에도 사용할 수 없었던 검이다. 자칫하면, 여동빈조차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 위력을 처음으로 목도했다.
‘이건 확실히 조심해야겠군.’
누군가를 분명히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상단전,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나 컸다.
‘자연지기를 조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짧은 생각을 끝마치며, 주연하의 앞으로 내려선 황준우가 손을 뻗었다.
“가자.”
시간이 없다.
방금 전 충돌은 컸다.
잠들어 있던 영정이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감히, 누가! 으아아-!”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영정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준우와 주연하의 머리 위로 검푸른 불덩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음에도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황준우의 살결에 열이 일었다.
손을 맞잡은 주연하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를 흘려보낸 황준우는 품에서 장과로가 건넨 부적을 곧장 꺼내 들어 기운을 분출했다.
‘다행히 아직 타지는 않았어.’
거리가 더 가까워지면 부적조차 타버릴 것이다.
아니, 그를 벗어나 황준우와 주연하가 견딜 수 없다.
영정의 분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다음에 올 때는 네놈 차례다.’
부적을 단숨에 찢는 황준우의 눈에, 저 멀리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영정의 얼굴이 보였다.
흉신악살보다도 더 무섭게 일그러진 채다.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기운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듯 거칠다.
실제로, 그의 세계나 다름없는 비밀황궁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황준우! 주연하!”
두 사람을 확인한 영정의 외침과 함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불길이 떨어져 내려 황궁을 녹여버리며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하나 부적을 찢은 두 사람의 신형은 이미 제자리에서 사라진 채였다.
“장과로! 장과로 놈이 결국! 크아아!”
오열하며, 괴성을 내지른 영정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청묘가 죽었다.
아니,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귀화를 띈 영정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아직 그녀의 혼이 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양손을 맞대어, 술의 형태를 그리고 그러한 청묘의 영혼을 붙잡는다.
잡아당겨 다시 육체로 밀어 넣는다.
기겁한 표정을 한 청묘의 영혼이 떨려 온다.
영혼의 흔들림에서 간곡함이 전해졌다.
“안 된다. 아직, 아직 나는 네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 의미를 이해했음에도, 망설임 없이 영혼을 잡아당겨 다시금 육체로 밀어 넣은 영정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꺼헉-!”
반 이상 사라진 육체로 돌아와, 거친 핏물을 토한 청묘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새카맣게 변한 채다.
“제발…… 정.”
청묘가 영정을 향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듣지 않겠다.”
“죽음만큼은…… 나의 뜻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이런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정…… 부탁…….”
“갈! 나는 세계의 제왕이다! 감히 누구의 뜻을 어기려 한단 말이냐! 네 복수를 이루어준 사람이 누구냐? 너의 삶을 허락한 이가 누구더냐?”
“정…….”
청묘의 눈가로 새카맣게 죽은 눈물이 흘렀다.
“가지마. 죽어서도 남아서, 내 곁을 지켜라.”
영정의 손길이 땅을 더듬었다.
그 위로 흘러나온 흙이 형태를 이루어 인간의 육체로 형성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청묘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흙 인형 속에 갇힌 영혼은 자아를 잃는다.
스스로가 가진 모든 것을 놓은 채, 그저 인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려운 점은 그로 인한 절망과 고통은 계속해서, 무한히 혼을 괴롭힌다는 점이다.
죽은 자를 억지로 붙잡아두기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끔찍한 제약이다.
인형을 완성하고 청묘의 영혼을 다시금 부여잡은 영정이 눈물을 쏟아내며 말한다.
“미안해. 하지만…… 이기적인 내게는 이게 최선이야. 부탁이야. 묘. 웃어 줘. 지금 내겐 너밖에 없어.”
“아…….”
공포를 담아, 간절히 부탁하던 청묘의 표정이 흔들린다.
결국, 그녀는 힘이 빠져나가는 육체의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제왕의 뜻이라면…….”
“고마워, 묘.”
두 사람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슬픔과 기쁨이 엮인, 서로 다른 웃음이었다.
“아슬아슬했지 않느냐.”
눈앞에 나타난 황준우를 바라보는 장과로의 얼굴에 대놓고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황준우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장과로가 길길이 날뛴다.
“하마터면 네 탓에 내가 책임을 질 뻔했지 않느냐! 왜 쓸데없이 무리를 해서는. 설마하니 소수마녀 고 계집마저 그렇게 크게 성장했을 줄이야.”
“그녀는 훌륭한 무인이었어. 전력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고.”
“이런…… 빌어먹을…….”
이를 아득, 아득 간 장과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해 봐야 이야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이미 여동빈 등을 통해 지금과 비슷한 대화를 몇 번이고 나누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대신하여 장과로의 시선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주연하에게로 향했다.
“네가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지 못한 여인이로구나.”
“그대는 누구인가?”
“나? 클클.”
웃음을 흘리는 장과로의 두 눈이 벽안으로 변했다.
주연하를 훑어보는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과연, 그런가. 어째서 뒤틀렸는가 하였더니 애초부터 네 운명은,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 알 수 없는 말을 주억거린 장과로의 손이 천천히 내뻗어진다.
“무슨 짓이야?”
그 앞을 막아선 황준우가 의문을 표했다.
내뻗던 손을 멈추고, 그런 황준우를 잠시 노려본 장과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라 하더니, 과연이로다. 인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구나. 가장 높은 신의 생각을 내가 어찌 알리오.”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찬 장과로가 뛰어올라 제 당나귀에 걸터앉는다.
그러고는 말없이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주변을 돌고 나서 반 시진 후에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할 이야기가 많겠지. 대화를 나누고 있거라.”
그 말과 함께 장과로가 당나귀의 엉덩이를 때린다.
묘한 울음소리를 토한 당나귀가 느린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갔다.
“괴인(怪人)이로구나.”
“조금 독특하기는 하지.”
주연하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지긋이 바라본다. 먼저 입을 연 측은, 물처럼 고요한 눈을 한 주연하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구나. 다만 그중에서도, 딱 하나를 골라내고 싶다.”
“황준우.”
“그래, 주연하.”
고요하게만 보였던 주연하의 두 눈에 옅은 떨림이 시작된다.
복받쳐 오르는 듯 숨결 역시 가빠져 왔다.
“너를……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양손을 모아 가슴 한편에 올려놓은 주연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두 눈을 감는다.
“정말로, 너무나, 너무나 기쁘다.”
“나도 기뻐.”
“황준우.”
“황준우.”
“그곳에 있는 동안, 누구보다 네 생각을 많이 했다. 네 얼굴을 많이 그렸다.”
영정이 물어왔으니까, 단지 그뿐일까?
주연하는 오래전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두려웠다.
죽음조차 무서워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 한 마디, 작은 걸음을 떼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무언가가 무너질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공포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하나 더 이상은 그러한 감정에 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물러나지 않는다.
철의 여인.
그 별명에 어울리게, 나아간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에,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심에 따라 말을 내뱉는다.
“너를 좋아하는 것 같구나.”
깊은숨과 함께 진심의 한 마디가 발걸음을 떼었다.
심장이 크게 박동하다 못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다.
힘을 주어 뜬 두 눈썹 끝은 가파르게 떨린다.
입술은 뜨거운 열기를 마주한 것처럼 바짝바짝 메말랐다.
어째서일까? 마주한 황준우의 두 눈은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눈에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궁금하지만, 집어삼킨다.
생각을 한다면 여태껏 그래왔듯 나아갈 수 없다.
“내……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을 만큼, 그만큼이나,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한 글자, 한 글자에 진심을 다한다.
꽉 움켜쥔 작은 두 손이 긴장감으로 차갑게 변했다.
너무나 두렵지만 이번에야말로, 모든 전력을 다해 감정을 쏟아낸다.
“너를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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