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7화
제 297화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들 말한다.
모든 행동, 말 역시 다르지 않다.
처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토록 힘겨웠다.
때문에 돌고, 돌았고, 감추고, 억눌러왔다.
하나 한번 내뱉은 순간 어째서 지금까지 이토록 참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져 버렸다.
“후우…….”
눈을 감고, 깊은숨을 쏟아 낸다.
다소 들뜬 심장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 양손을 한쪽 가슴 위에 살포시 얹어본다.
“그래. 내가, 너를 사모한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개의치 않고, 다시 한 번 가슴에 가득 찬 말을 읊조린다.
“주연하.”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정면을 직시하여 황준우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본 주연하의 고개가 빠르게 떨어졌다.
“주연하?”
두근, 두근.
“잠시, 잠시만 기다려다오.”
분명 마음이 한결 편해졌을 터였다.
심장이 놀랄 정도로 뛰고 있지만 충분히 침착할 수 있다.
‘나는 주연하다.’
왕녀였고, 황녀였으며, 황제라는 이름을 등에 지게 될 여인이다.
자신을 다독이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어째서인지 유달리 얼굴이 뜨겁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손을 들어 볼을 감싸보니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연하?”
“바, 바보 같기는…….”
황준우가 또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담하다고, 괜찮다고 다독인 주제에 너무 부끄러운 상황 아닌가?
“바보 같지 않아.”
황준우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주연하가 재빨리 한 손을 내뻗었다.
“잠시!”
“잠시 시간을 다오!”
무언가 순서 그리고 행동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 하지만 가까이 오면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 같지 않느냐!’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주연하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작고 하얀 두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간다.
‘이번에야말로 당당히.’
고개를 들어 황준우를 직시한다.
“직시…….”
해야 하는데 웃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또다시 고개가 떨어져 버렸다.
“흐어아…….”
난생처음 뱉어보는 괴상한 음성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와 버렸다.
그 사실에 얼굴이 더욱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도 서툰 일이란 게 있긴 하구나.”
“그, 그야,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황준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하는 주연하의 곁으로 황준우의 기척이 가깝게 다가왔다.
“잠깐! 아직 안 된다니까!”
놀란 주연하가 또다시 뒷걸음질 치려 하였지만, 따뜻하게 등을 감싸는 손의 온도에 가로막히고 만다.
이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바로 정면, 눈앞에 황준우의 얼굴이 있다.
여전히 웃고 있다.
하나, 어째서인지 묘하게 난감한 것 같은 표정이다.
두근, 두근.
미칠 것만 같다는 말이 이럴 때도 어울릴 줄 어찌 알았을까?
“괜찮아?”
“아, 안 괜찮다.”
“미안해.”
황준우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담담해야 하는데…….’
언제나처럼 그의 곁에 당당히 서 있을 자신이 있었는데 역시 생각대로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기라서…….”
“나는…… 괜찮다.”
아니, 안 괜찮다.
생각과 다른 말이 입 바깥으로 흘러나온다.
어째서인지 코끝이 시큰했다.
‘안 돼. 눈물만큼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처음인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싶지는 않다.
움켜쥔 두 손에는 절로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러니까…….”
여전히, 뭔가 난색 가득한 표정의 황준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뒤에 나올 말은 딱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가 되었든 좋게 들릴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나도, 좋아. 아마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살게 된다면 그건 너이지 않을까…… 그렸던 적 많으니까.”
그 말에, 주연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붉어진 눈시울에 참고 있던 물기가 살짝 맺히는 기분이 든다.
“이 멍청이가!”
그 순간, 너무 화가 나 저도 모르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그런 말이라면 조금 더 정확하게 하란 말이다!”
감정이 말로 할 수 없는 어떠한 종류로 마구잡이로 들끓었다.
“아, 그러네. 내가 또 실수했구나. 네가 말했듯, 나도 이런 건 처음이니까…….”
사실 그런 건 아무렴 좋았다.
힘겹게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아니, 이것도 문제가 아니라고.’
그냥 이 들끓는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내뻗어진 손이 단숨에 황준우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당황하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 왔지만 곧 입술 주위를 감싸는 따뜻한 감촉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
이제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심장 소리가 서로의 귓가를 때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너무나 닮아 있는 채였다.
살의가, 또는 난폭한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장의 한복판에는 수도 없이 많이 서봤다.
그조차도 이제 와서는 마음속에 작은 여운을 남길 뿐이다.
하나 감정의 폭풍 속에 서 있어 본 적은 처음이다.
그 탓일까?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멋대로 힘이 풀려버린 다리 탓에 자리에 동시에 주저앉은 채 서로의 손을 잡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때 사내인 내가 나서야 하는데…….’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그 끝에 남은 여운에 저도 모르게 황급히 말문을 닫아버린다.
어떤 말을 해도 어색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저 멀리서, 당나귀를 타고 다시 돌아온 장과로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우라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장? 둘이 내 집 앞마당에서 그렇고…… 에잉!”
두 사람을 향해 격하게 혀를 찬 그가 다시금 당나귀의 고삐를 돌려 멀어져 버린다.
“저자는…….”
“장과로야. 들어는 봤지?”
덕분에 두 사람의 말문이 트였다.
확실히, 기이한 행색에 당나귀를 거꾸로 탄 채 다니는 노인은 흔치 않다.
“정말…… 장과로. 팔선?”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 보았던 상대를 마주한 주연하가 놀란 음성을 흘렸다.
“응. 맞아. 그 팔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선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팔선도고…….”
“팔선도! 하면 이곳에 다른 팔선도 있는 것이냐? 검선께서도?”
“안 그래도 장과로를 만나기 전에 뵙고 왔어.”
“이럴 수가.”
쉽사리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하나 근래 들어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또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래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시황이 살아 있었다.
그는 알 수도 없는 어딘가에 비밀 황궁을 만들고 영세(永世)를 누리고 있던 것이다.
하물며 선계라고 없을까?
팔선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대체 너는 무슨 일에 엮인 것이냐?”
다만 의아한 것이 있다면 어째서 황준우가 이러한 곳에 있느냐는 것이다.
영정의 경우도 괴이했지만, 선계 역시 쉽게 접할 일은 아니다.
한데 황준우는 당당히 선계 한복판에 있다고 말하였다.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작은 사건이 있어서 말이지.”
황준우는 살짝 말을 둘러댔다.
솔직하게 멸망의 새 제강이라든가, 숙과 홀의 이야기 등을 한다면 그녀가 걱정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괜한 마음을 쓰게 할 필요는 없지.’
그런 황준우의 속내가 모두 보였던 것일까?
눈을 가늘게 뜬 주연하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알겠다. 더는 묻지 않으마. 다만,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느냐.”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는 주의인데.”
“노력이라도 해보겠다고 답하여라.”
“……그럼 최선을 다해볼게.”
“답답하기는.”
가볍게 콧방귀를 뀐 주연하가 고개를 돌렸다.
하나 입가에는 어째서인지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는 채였다.
“주연하.”
그 옆모습을, 조금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바라본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밀을 말할 생각이라도 들었나 보구나.”
“정말이냐?”
놀란 주연하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너 진짜 예쁘다고. 사실 우리 어머니보다도 예뻐 보일 때가 많았어.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놨던 말이니까. 비밀 맞지?”
“그, 그 무슨…….”
원래는 화를 내려고 했는데, 그조차 되지 않는다.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에 마음 한 편이 간질간질하여 어찌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말 마음껏 해도 되려나?”
확실한 건, 싫지는 않다.
아니, 분명히 좋다.
“……그래 주면 좋겠구나.”
진심 담긴 말에 황준우의 입가로 또 한 번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진짜, 친구라는 말로 어떻게 참아왔을까.”
“그것만으로도 좋았으니 말이다.”
“하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었다.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척박한 삶이었고, 작은 것 하나조차 소중했으니 말이다.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욕심 좀 부려볼까.”
“나는 예전부터 결혼하면 자식을 많이 낳는 게 꿈이었거든.”
“……!!”
주연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다.
“이, 이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잠깐, 그런 걸로 치자면 아까 네가…….”
“시끄럽다!”
불과 조금 전에 있었던 짧은 입맞춤이 두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거칠게 외친 주연하의 몸에서 피어오른 기운이 황준우의 전신을 압박한다.
“아니, 갑자기 왜 난폭해지는 건데.”
“부끄럽지 않느냐!”
이 정도까지 솔직해서야 달리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알겠어. 주의할게.”
결국 황준우가 양손을 들며 항복 선언을 했다.
그때까지도 얼굴을 붉힌 채였던 주연하가 가쁜 숨을 내쉰다.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마구잡이로 들어와서는…….”
황준우 본인도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눈치란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짧은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꽤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끝에,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만 같던 주연하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황준우.”
“내가, 너와 아니,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목소리가 유달리 무겁다.
주연하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떠한 결심을 내렸을 때가 많았다.
황준우는 진중하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
“언제고 말했었는데, 혹시 기억하느냐?”
“무슨 말?”
“나는 너와 동등하게, 언제나 바로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하였었다.”
“아아…… 물론이지.”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으로 주연하에게 반했었다.
그녀는 황준우가 보아왔던 많은 이들과 다르게 강했고, 멋졌다.
설레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주연하는 어느덧 그때, 처음 반했던 순간과 같은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하여 그 심정이 다르지는 않다. 하나 이미 우리의 차이는 동등할 수 없을 만큼 큰 무언가가 벌어져 버렸구나.”
“…….”
“황준우. 난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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