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8화
제 298화
“이해해.”
황준우는 괜한 위로라는 포장으로 감싼 부정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하다는 것은 주연하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그러한 감정을 쓸데없는 동정을 닮은 무언가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선계라면 나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겠지.”
주연하의 눈에는 이미 확고한 결심이 어린 채다.
“네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하겠지. 지상…… 황궁에 다녀와야 할 듯한데…….”
다행히도 주연하 역시 황준우의 걱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긴 쓸데없는 걱정인가.’
그녀라면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강한 자긍심만큼이나, 책임감 역시 뛰어난 성정이었으니 말이다.
“장과로가 오면 부탁해보자.”
“음…….”
주연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이와 동등하게 서는 일 역시 중요하다.
하나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필요한 건 흔들리고 있을 황궁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궁은 천하의 중심이다.
황제가 죽고, 권력 다툼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된 것은 궁인(宮人)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늘어난 고충 탓에 백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적이 들끓었고, 부패한 관리들이 제 세상인 양 자신의 권한을 행사했다.
주연하가 사라진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드디어 뭔가 정리가 좀 됐나 보구나.”
기다렸다는 듯 장과로가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떠한 기척도 없이, 기운이 잠시 요동친 것만으로 순식간에 위치를 이동한 듯했다.
‘저것도 놀라운 기술인데…….’
황준우의 탐내는 눈빛을 읽은 장과로가 혀를 찬다.
“쯧. 욕심 많은 녀석.”
“하하.”
웃는 황준우를 보고는 고개를 내저은 장과로가 주연하를 바라보았다.
“지상의 황궁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오라버니…… 주고치라고 하였던가? 그 녀석이 중심을 잡아 잘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황자가?”
황준우의 시선이 주연하에게로 돌아갔다.
덕분에 천하의 안녕은 어떨지 모르나, 이는 또다시 반역이 일어났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인 탓이다.
하나 주연하의 얼굴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안도하는 듯도 보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만약 스스로가 사라질 경우, 황제의 직위를 대신할 인물로 그를 뽑은 것은 그녀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주연하가?”
“실질적인 황실의 적통 계승자다.”
“하지만 그는…….”
전대 황제를 죽였다.
그것도 제 손으로.
적통 계승자를 벗어나 결코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맞는 말이다. 하나…… 현재 황궁에는 아직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다. 선대 폐하의 죽음 역시 실수나, 음모라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지.”
“허어…….”
“결국 지금 황궁에서 나를 대신할 인물은 그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위험한 것 아닌가.”
사정은 알겠지만, 역시 위험하다.
그 말은 달리하면 주연하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았다는 뜻 아니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내저은 이는 장과로였다.
“본래 그는 현 황제가 없는 빈자리에서 대리청정을 원치 않았다. 애초에 권력욕이 더는 없다는 말이 맞겠지.”
“본성 자체에 욕심이 없는 인물입니다. 다소 비뚤어진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과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선다.
하나 황준우의 걱정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사람이 또 자리에 앉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아무래도 불안한데.”
“쓸데없는 걱정.”
장과로가 단칼에 황준우의 말을 부정했다.
그에 주연하 역시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한들, 그것은 선택을 한 내 몫이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결국 황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한 발자국 더 가까운 관계로 다가갔다 하여 그를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심지어 황제라는 직위에 관한 이야기다.
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자리, 단순한 걱정으로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가 잘해주고 있다 하여, 황궁에 들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팔선 장과로 선생. 혹여 나를 지상의 황궁으로 보내줄 수 없겠습니까?”
“정말 괜찮다니까.”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주연하의 간곡한 눈빛에, 장과로의 안색이 굳어진다.
“이거 뭐, 고집마저 서로 닮았나. 어차피 여기로 돌아올 거라며?”
“돌아오는 것은 길만 알려주시면 제 발로 오겠습니다. 하니 한 번만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은혜, 어떠한 형태로라도 반드시 갚을 터이니…….”
결국 장과로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내가 졌다! 그래, 다녀오자. 그렇게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장과로 선생!”
주연하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상의 황제라고는 하나 선계에서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내가 나설 것도 없었네.’
도와준다고 해놓고, 말 한마디 못 꺼낸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나와의 약속이 남았으니 이 자리에서 기다려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장과로의 물음에 한층 더 밝은 표정이 된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라. 큼큼, 절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다.”
손을 요구하고는, 홀로 민망했는지 다른 곳을 보며 콧노래를 부르는 장과로의 손을 주연하가 망설임 없이 맞잡는다.
직후 황준우를 돌아본 주연하의 입가로 환한 웃음이 번졌다.
“금방 다녀와서 또 보자꾸나.”
“그래, 기다릴게.”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 바로 가겠다.”
그 말과 함께 장과로의 몸이 환한 빛에 휩싸였다.
마지막까지 황준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주연하의 입술이 또 한 번 달싹인다.
그 말을, 입 모양만으로 읽은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나의 반려여…….”
참으로 주연하다운 말이었다.
벌써 세 번째.
주연하는 어느덧 공간을 넘어선다는 개념에 제법 익숙해진 듯했다.
‘그래도 다소 어지러운 건 똑같군.’
그리고 실제로 이동하는 시간보다, 체감 시간이 더욱 길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꽤나 오랜 시간을 기이한 공간에 머문 듯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세상의 풍경이 보인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분명 빛을 지나고 공간을 완전히 넘어선 듯한데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다.
어둡고, 무언가 무거운 공기가 주변을 짓누르고 있는 채다.
“빌어먹을…… 설마……!”
놀란 표정의 장과로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욕을 내뱉는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주연하라고 하여도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장과로 선생?”
“아쉽군. 세 연놈을 다 잡아 죽이고 싶었는데.”
주연하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푸른 귀화로 전신을 감싸고, 불타는 검을 든 사내가 보인다.
그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기운의 질과 느낌만으로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영정…….”
주연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지. 차라리 잘 되었나. 크크. 놈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겠구나.”
웃음을 흘리는 영정의 전신에서 무서운 광기가 묻어났다.
언제나 보아왔던 모습과는 또 다른, 어딘가가 붕괴한 느낌이다.
또한 특이한 점은 그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으로 처음 보는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다섯이나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마치 장막이 드리운 듯 인상조차 어둠에 묻혀 있는 탓이었다.
사실 그가 아니더라도 영정 외의 누군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주변을 질식할 듯한 무게감이 가득 차 있는 채다.
“어떻게…… 벌써…… 내 술식의 흐름을 찾아낸 거지? 분명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장과로가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맞이한 채였으니 말이다.
“원래는 아니었지. 하지만 큰 상처와 분노가 나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장과로. 드디어 네 목숨을 뺏을 수 있어 너무나 기쁘다. 으하하!”
타오르는 귀화 속에서 광소를 터트린 영정의 손이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그 순간 눈을 부릅뜬 장과로가 주연하를 향해 팔을 뻗으며 몸을 날렸다.
쩌저적-!
어느덧 발밑의 어둠이 깨지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푸른 귀화가 뱀의 혀처럼 넘실거린다.
‘마지막…… 고백이라도 하길 잘했구나.’
그를 곁눈질로 바라본 주연하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어렸다.
콰과광-!
공간을 뒤덮는 폭음과 함께 푸른 귀화가 두 사람의 발밑에서부터 퍼져 나와 어두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콰과과가-!
공간이 깨지고, 부서지며 분열한다.
주변으로는 푸른 귀화가 거대한 혓바닥을 넘실거렸다.
그 가장 높은 곳.
“크하하하! 내가 겪은 아픔을 너는 피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곧, 네게도 찾아가마. 황준우!”
어둠의 정상에 선 영정이 광소를 터트렸다.
“생각보다 늦네.”
홀로 장과로의 거처 한편에 남아 심상에 빠져 있던 황준우가 눈을 떴다.
벌써 한 시진이 넘게 흘렀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보다. 별일은 없겠지.”
다시 눈을 감고, 심상수련에 빠져들려던 황준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명 별일은 없을 거야. 장과로가 함께 갔잖아.”
비록 선계를 벗어나면 그 힘이 많이 제약된다고는 해도, 나름의 비책도 준비하지 않았을 인물이 아니다.
직접 겪어본 장과로는 영악한 점이 제법 많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건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황준우의 시선이 강하게 돌아갔다.
강한 기운을 품은 기척 하나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누구지?’
익숙한 듯한데, 또 낯설다.
확실한 것은 장과로나 주연하의 느낌은 아니었다.
얼굴에 절로 아쉬움이 묻어났다.
“황준우!”
“할머니?”
목소리를 듣고,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황준우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혹여 그녀가 장과로 혹은 주연하의 소식을 가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황준우를 만난 서왕모가 놀란 신음을 흘렸다.
‘이놈…….’
눈앞, 다소 거친 기세를 내고 있는 황준우의 기운이 달라졌다.
팔선도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전과 확연히 다른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놈 조금 있으면 진짜로 나를 뛰어넘을지도…….’
착각이 아니다.
분명히 그리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부터 황준우가 해야 할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이 아닌, 신선으로서 전력을 다하여도 불가능했던 일들.
그야말로 새로운 신화를 써나가야 한다.
멈춰서 있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터였다.
“훌륭하게 컸구나.”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반면 황준우의 얼굴은 여전히 풀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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