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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99화 (299/373)

학사재생 299화

제 299화

“할머니. 혹시 무슨 소식 전하러 온 것 아니야?”

“맞다. 잘 알고 있구나.”

뛰어난 무인은 직감도 무섭도록 정확하다.

그렇게 생각한 서왕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숙께서 너를 뵙고자 하신다.”

현재 우주에 남은 가장 높은 신.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들었다.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나 지금 황준우가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다.

“주연하나 장과로는?”

“주연하? 공간의 틈새가 벌어지는 것은 알았다만 설마 장과로와 무슨 짓을 꾸몄던 게냐?”

오히려 서왕모가 놀라 반문한다.

“영정의 비밀황궁에서 내가 구해 왔어. 그리고 할 일이 있다고 둘이 같이 황궁으로 갔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황준우의 말에 서왕모의 표정도 굳어졌다.

“주연하, 장과로…….”

두 사람 모두 중요한 인물이다.

적어도 서왕모로서 우습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장과로는 아주 뛰어난 도사다. 영악하고, 쉽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말한 바 있듯 뛰어난 무인의 직감은 무섭도록 정확하다.

황준우의 경우는 그러한 무인들 중 가장 정점에 속해 있는 인물.

우습게 여길 수는 없었다.

“내가 따로 알아보겠다. 너는 우선 이 길을 따라 숙을 뵙고 오너라.”

서왕모가 손짓을 하자 빛무리가 일어 길을 만들어 냈다.

황준우가 건너온 거대한 강의 반대편으로 보이지 않던 투명한 다리가 형체를 드러내고,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선계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 조금 미룰 수는 없을까?”

“숙을 뵐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그분이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지. 네 걱정은 잘 안다. 또한 나 역시 둘을 아낀다. 최선을 다할 터이니 다녀오도록 하여라.”

“별일 없겠지?”

“아마도…….”

확신을 할 수는 없다.

하나 지금은 믿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금방 다녀올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겠다.”

“…….”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의 신형이 빛무리를 따라 멀어진다.

홀로 남은 서왕모는 황준우가 왔던 장과로의 거처를 향해 뛰어올랐다.

황준우는 다급한 걸음으로 빛무리를 따랐다.

그 길을 한참이나 따라 걸으니 어느 순간 나타난 무지개 형태의 다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길이다.

‘시간도 없는데 대체 어디까지 이끌려는 건지…….’

옥청은 삼청(三淸) 중 가장 높은 곳.

그 위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장소는 하나밖에 없다.

우주를 떠올린 황준우의 걸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렇게 거대한 무지개다리를 정신없이 오르고 있던 어느 순간, 사방이 환한 빛으로 뒤덮였다.

세상이 뒤바뀌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

어느새 눈앞에는 새하얀 방이 펼쳐졌다.

처음 보는 구조와, 물건들이 가득한 기이한 방이다.

밝은 방에서도 눈에 뜨이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 차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그러한 방의 중심에 있는 사각형의 탁자와, 그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새하얀 여인이다.

새하얗다.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피부도, 머리 색도, 눈동자, 심지어 입고 있는 의복마저 새하얀 그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당신이 숙?’

황준우는 입을 열어 질문을 하려 하였다.

하나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방 전체가 너무나 적막하다.

다채롭게 꾸며져 있지만, 완전히 빈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다.

확실하다.

이 공간에 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방의 한편에 위치한 네모난 상자에서 처음 보는 형태의 사람들이 나와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때였다.

‘취향 한번 괴팍하군.’

그 사실까지 인지한 이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네 말대로. 취향이 좋은 편은 아니지. 우선 앉아. 내 이름은 굳이 답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탁자에 앉은 숙이 황준우를 향해 손짓하며 말한다.

아니, 말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의지.

전음과도 엄연히 다르다.

그를 훨씬 더 초월한 무언가가 황준우의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절로 전율이 일었다.

‘이게 신.’

이 세계의 가장 정점에 선 존재.

신선이라든지, 그런 종류와는 규격 자체가 다르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지만 승리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방만큼이나, 완전무결하다.

이런 존재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우주의 멸망이란 것이 새삼 두려워질 정도였다.

[과연…… 본질은 어쩔 수 없나 보구나. 보자마자 호승심부터 보이다니.]

숙이 그런 황준우를 향해 오묘 모호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가 본 것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란다. 신이란 것은…… 말하지 않아도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숙은 조금은 공황상태에 빠진 황준우에게 침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맞는 말이다.

신이 완벽했다면, 홀은 도망치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세상에 멸망이란 시기가 도래할 수 없었다.

제강이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강은 죽고 홀은 도망쳤다.

숙은 홀로 그것을 막지 못해 조력자를 찾고 있다.

‘신은 완벽하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신살(神殺) 역시 이미 이루어진 역사가 있다.

[거칠어. 그리고 파격적이야. 예상은 했지만…… 그런 와중에 훌륭히 자라났다는 것도 모순적이지. 자, 다시 말하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너와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즐겁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숙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정면에서 숙을 바라본 심경은 처음 느꼈던 감정과 또 달랐다.

여전히 새하얗게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인다.

지쳐있다는 표현이 맞을 터였다.

[그래. 네 생각대로야. 나는 지쳐 있어. 한데 그것 알아? 애초에 신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 후후.]

시간이 없다는 말과 다르게 숙의 목소리는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울 정도로 느렸다. 또한 기이할 정도로 따뜻했다.

황준우는 언젠가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였더라? 아…….’

세상에 다시 태어나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그때 느꼈던 감정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어째서?’

의문은 질문이기도 했다.

하나 숙은 거기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보아도 정말 훌륭하게도 자라주었구나. 올바르게 익히고, 올바르게 행하면서…… 이렇게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뻐. 그리고, 너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서 너무 미안해.]

‘당신은…….’

점점 더 혼란스럽다.

숙이 생각지도 못했던 여인의 모습인 탓일까?

기이할 정도로 그녀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신살을 잠깐 떠올리기도 했지만, 결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다.

‘신의 강압?’

마음속 무언가에 자물쇠가 걸린 듯한 기묘한 기분에 먼저 떠올린 생각이다.

하나 다르다.

그냥 어렵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순수하게 황준우의 마음이 그리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어째서 부른 거지?’

결국 황준우는 그러한 부분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대신하여 본론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 말대로 시간이 없다면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틈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보고 싶어서?]

‘…….’

[우후후.]

괴팍한 성정만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하긴 신의 속내를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이제야 본론이다.

흔들리는 숙의 기운에서 그 감정이 느껴졌다.

[장과로의 부탁으로 유계로 갈 생각이지?]

‘물론이야.’

약속은 지킬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말이다.

[그곳에서 네가 꼭 찾아야 할 것이 있어.]

[응. 꼭 찾아와야 해. 사실은 조금 더 그 장소에 놓아두려 했지만, 아무래도 바르지 못하게 큰 아이가 곧 눈치를 챌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든데.’

[당장 이해하지 않으려 해도 돼. 백택이 설명할 거고, 유계에 가면 조력자가 나타날 거니까.]

‘…….’

그런 이야기라면 굳이 불러낼 필요가 있었을까?

조급했던 상황인 만큼 괜한 불만이 생겼다.

하나 어째서인지 그녀를 향해 따지고 싶다는 생각은 또 들지 않았다.

[정말 좋다. 이렇게라도 너를 볼 수 있어서.]

그런 황준우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을 숙이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더 오래 함께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만. 이미 생각보다 긴 시간을 소비했어.]

새하얀 방의 공간이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황준우의 시야도 어지럽게 돌아갔다.

[귀중한 시간을 내주어서 고마워. 보답이라고 말할 것은 없지만…… 네게 있어 소중한 이들의 시간을 일부 되감아 놓았어.]

‘그게 무슨……?’

[도착하자마자 놀랄 수도 있지만, 너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설명을 하나라도 제대로 좀 해달라고…….’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기도 전 시야가 암전되었다.

새하얗던 세상은 사라지고 눈앞의 숙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순식간에 숙의 모습이 사라지고 육체는 격류에 휩쓸린 듯 어딘가로 쓸려 내려갔다.

기이한 감각에 놀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황준우의 육신은 어느덧 또 다른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선계는 아니야.’

오히려 어떠한 악의와 적의로 가득 찬 검은 공간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순식간에 지옥 불보다 뜨거운 푸른 겁화가 발밑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준우의 주변으로 회색빛으로 변한 주연하와 장과로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 멀리, 광소를 터트리고 있는 영정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이 영정에게…….’

위기감이 심장을 섬뜩하게 감쌌다.

비릿한 미소를 보인 영정이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모습을 감춘다.

순식간에 폭발한 화염이 주변을 집어삼킨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장과로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주연하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황준우의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속박된 듯 뜻을 따르지 않던 육체에도 활기가 돈다.

이후 반응은 빨랐다.

몸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우주기가 주연하와 장과로의 몸을 단숨에 잡아당겼다.

두 사람 모두 놀란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본다.

하나 무언가를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숙의 말대로 황준우 역시 당황한 상태였고, 솟아오르는 푸른 겁화의 위협도 적지 않았다.

‘굳이 불을 끄려 할 필요 없어.’

애초에 쉽게 꺼지지도 않을 불이다.

강제로 덮으려 하면 황준우 역시 전력을 쏟아야 할 터였다.

주변으로 우주기를 둘러 푸른 겁화의 침범을 막은 황준우의 시선이 장과로를 향했다.

“탈출할 수 있어?”

“물론이다. 애송이. 나를 뭘로 보는 것이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장과로의 양팔이 넓게 벌어졌다.

세 사람의 눈앞, 검은 동공 사이로 거대한 틈이 나타난다.

황준우는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콰과광-!

검은 공간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푸른 겁화로 완전히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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