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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03화 (303/373)

학사재생 303화

제 303화

“뭐, 나쁘지는 않겠지.”

황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여화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쓸 만한 인재라면, 어울리는 자리에 앉아 제 몫을 해낼 것이다. 전왕이 그런 정도의 안목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면 그 아이도 바로 남천맹 본단으로 보내. 일을 잘해내면 하오문의 독립도 충분히 들어줄 여지는 있어.”

여화이를 향해 묘한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사라졌다.

“속내를 완전히 읽혀버렸네. 아닌 척 은근히 영악하단 말이야.”

그가 떠난 자리,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여화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아. 까짓거, 해내면 될 뿐이야. 여화이, 넌 할 수 있다. 이 굴욕을 다음 대까지 넘겨줄 필요는 없잖아?”

몸을 일으켜 힘찬 걸음으로 다가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여화이가 외쳤다.

“유경이를 들라 하세요. 최대한 빨리!”

침묵하던 하오문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보세가와 하오문, 양측 모두에게서 제법 괜찮은 결과를 얻어냈다.

그에 흡족한 황준우는 백교를 만나 행선지를 다시 지정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소주 먼저 들르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백교 역시 동의했다.

굳이 남천맹이 있는 안휘를 돌아갈 필요는 없다.

곤륜을 향할 때도 지나쳐야 할 길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걸음이 만금장으로 향했다.

황석후의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찾아갔다.

“큼큼.”

집무실 문 앞.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황준우가 짧은 헛기침을 했다.

“준우냐?”

그 소리만으로 정체를 알아챈 황석후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예. 스승님과 같이 왔습…….”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건강해 보이는 안색의 황석후가 단숨에 황준우를 끌어안았다.

“건강히 잘 다녀왔구나.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황준우가 모든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아는 듯했다.

“아쉽게도……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에요. 볼일이 있어서 들른 것뿐이라.”

“아……?”

짧은 신음을 흘린 황석후가 포옹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민망한 기색이 어려 있는 채였다.

“음…… 이거 참, 주책을 부렸구나.”

“아니에요.”

황준우의 말에 방문에서 비켜선 황석후가 안쪽으로 손짓했다.

“우선 들어오거라. 백 선생도 들어오시지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백교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이 다시금 서로를 마주 본다.

황석후의 눈에 오묘한 빛이 어렸다.

“한데 벌써 돌아온 이유는…… 언령 탓입니까?”

시선은 백교를 향했다.

“그 외로도 이유는 있습니다만. 대인을 찾아뵌 것은 그 이유가 크지요.”

“그 외의 이유라…….”

턱을 쓰다듬으며 짧은 신음을 흘린 황석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우에게도 도와줄 힘이 필요한가 보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황준우의 질문에 황석후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어린다.

“눈칫밥만으로 살아온 인생이다. 이 정도야 기본이지. 경 무사와 홍 무사…… 그리고 서연이냐?”

“이 정도면 눈치가 아니라 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황준우가 백교를 보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동감합니다. 본래부터 대인이 그런 쪽으로 꽤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계시긴 하셨지요.”

“백 선생에게 듣기는 민망한 말입니다. 하하.”

웃음으로 칭찬을 넘긴 황석후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게 도움이 된다면 능히 그리 해야겠지.”

“서연이가 걱정돼서 그러시죠?”

굳이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자식 모두를 위험한 길에 내보내는 것이니 부모로서 그 심정이 어찌 편하겠는가?

“부정할 수는 없겠구나. 그래도 어찌하겠느냐. 믿어야지. 우리 아들을, 그리고 딸을.”

황석후는 세계의 끝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믿는 것이 최선인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 네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구나.”

“아…….”

서시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강한 여인이라고 하지만, 자식에 대한 걱정마저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한동안 기분이 안 좋을 확률이 높았다.

“어른으로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구나.”

“저랑 서연이도 이미 충분히 어른인걸요. 나이로만 치면 이미 혼인할 시기도 지났죠.”

“그러게 말이다. 둘 다 워낙 말썽쟁이라 결혼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헛웃음을 터트린 황석후가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바쁜 와중 아니더냐?”

“그렇기야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황석후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황준우는 자신의 이 생이 가족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 따뜻함만큼은 영원히 지속된다 하여도 아쉬울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언령의 기운을 빼내겠습니다. 그 전에…….”

백교의 시선이 황준우를 향했다.

황준우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보관하던 목각 상자를 꺼내 들어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를 받아들어, 뚜껑을 연 황석후의 표정에 묘한 감탄이 어렸다.

“이게 반도…….”

선명한 분홍빛과, 은은한 달콤한 향이 감도는 반도는 그 뛰어난 효능을 제외하고서라도 눈이 갈 수밖에 없을 만큼의 매력을 자랑했다.

“가능만 하다면 안 먹고 보관해놓고 싶구나. 후후.”

“안 돼요. 그런 복숭아 하나보다 중요한 게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거라고요.”

“알고 있다. 욘석아. 내가 오래, 건강히 잘 살아야 너희들이 일할 날이 멀어지지.”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농담이다. 바로 먹으면 되는 겁니까?”

웃음 지으며 말한 황석후의 시선이 백교를 향했다.

“예. 그냥 드시면 됩니다.”

백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소 굳은 눈을 한 황석후가 반도의 한 부분을 크게 집어삼켰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 퍼져 나갔다.

황석후의 몸 내부로도 선천지기가 단숨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왕모께서 좋은 반도를 선물했군요.”

그 기운을 읽고 있던 백교가 짧은 감탄을 터트리고는 펼치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바쁠 차례였다.

“두 분 손을 서로 맞잡으시지요.”

황석후와 황준우가 한쪽씩 손을 내밀어 맞잡는다.

그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은 백교의 두 눈이 새하얗게 변하였다.

주변으로는 성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밝은 기운이 단숨에 쏟아져 나온다.

“라…… 차허…… 오…… 마아…….”

영문을 알 수 없는 백교의 음성이 황준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렇게 짧은 주문이 끝을 맺고 황준우의 몸 안으로 무언가가 흐르듯 파고 들어왔다.

첫 느낌은 굉장히 무거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차가워?’

순간 온몸의 혈관 하나, 하나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황준우를 제가 잡아먹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조율경을 넘어선 이후 양기와 음기, 양측 모두로부터 자유로웠던 황준우로서는 당황스러운 사태였다.

“침착하게, 가장 자신 있는 내공심법을 운용하세요.”

그런 황준우의 귓가로 백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황준우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뿐이었다.

‘천조신공.’

스스로 붙인, 오만한 이름을 가진 신공.

어느덧 그 경지의 벽은 팔단공을 넘어선 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우주와의 조화까지 이루었음에도 천조신공의 극(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짧은 상념 속, 천조신공이 운영되며 몸을 엄습하던 한기가 빠르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오히려 침착하게 자신이 남긴 상처를 보듬으려고까지 한다.

‘굉장한 태세 변환인데.’

속으로 웃음을 지은 황준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간이 그리 오래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황석후.

“건강해 보이시네요.”

반도를 모두 먹은 탓일까.

혈색은 오히려 이전에 비해 건강해 보였다.

“천하의 반도를 하나 통째로 먹었는데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느냐. 오히려 힘이 넘치는 느낌이다.”

황석후가 소매를 걷어 보이며 팔뚝을 자랑했다.

그리 두텁지는 않지만 탄탄한 근육이 잘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황석후 역시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이 필요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다행이에요. 한데, 이걸로 끝인가요?”

짧은 위기를 겪었지만, 무언가 크게 변화한 느낌은 아니었다.

단전을 비롯한 육체 내부를 관조해보아도 딱히 무언가 변화가 보이지도 않았기에 절로 의문이 든 것이다.

“예. 끝입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황준우의 말에 다시금 부채를 펼친 백교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킨다.

“상단전을 살펴보시지요.”

“음……?”

그 말을 따라 상단전 주변을 향해 의식을 집중한 황준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게 뭐야?’

현재 황준우의 상단전은 세계와의 조화를 위하여 크게 넓혀진 상태다.

자연에 이어 우주까지 받아들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데 언령이라 지칭할 법한 힘은 그 위를 얇은 막처럼 덮고 있었다. 황준우가 품고 있는 우주조차 뛰어넘는 큰 규모라는 뜻이었다.

“이게 언령……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한 의지다. 네 바람이 우주를 움직일 정도여야 된단 거지.”

“의지를 통해 움직인다고요? 조율과 비슷한 건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공자의 경우는 제가 조금 제한을 걸어두었거든요.”

“제한이요?”

“무리해서 사용하게 되면 큰 지장이 올 테니 말이죠. 사실 대인께서도 언령의 힘을 모두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

확실히, 지금 느껴지는 언령의 힘은 너무나 까마득했다.

‘이건 마치…… 숙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데.’

이런 것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려면 목숨값으로도 부족할 터다.

“연습 같은 건 하면 안 되겠네요.”

“예. 때가 되면, 절로 그 방법을 알게 되실 겁니다.”

간절할 정도의 염원이 필요한 시기라면 언령이 알아서 도울 것이다.

따지자면 비장의 무기를 품은 것과 다름없기도 했다.

“애초에 이런 것에 크게 의존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후후.”

황준우의 자신만만한 말에 백교가 흡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그러면 되었다. 어서 가보아라.”

황석후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도 할 일이 많겠지만, 두 사람이 더 바쁘겠지. 안 그렇습니까?”

“짧은 여유 정도는 있습니다만.”

백교의 말에 황석후가 되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쉬움의 여운도 짙어질 뿐이지요. 둘 다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 믿으니, 오늘은 이만 괜찮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믿고 있다. 내 아들.”

황준우의 앞에 서, 어깨를 두드려준 황석후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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