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04화
제 304화
“몸 건강히, 잘 다녀오거라.”
담담한 목소리가 황준우의 마음에 박혀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깊게 숙인 황준우가 뒤로 물러나며 사라진다.
“하면 대인, 또 뵙겠습니다.”
그 뒤를 따라 백교마저 사라지고 홀로 남은 황석후의 표정에는 은은한 외로움이 어렸다.
“이거 또, 한동안은 적적하겠구먼.”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대답을 한 이는 모습을 감춘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흑표다.
그에 황석후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
오래도록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온 흑표는 말이 별로 없고, 농담도 잘 못 하지만 분명 친구 같은 존재였다.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작은 목소리에서는 무안함이 느껴진다.
“푸하하!”
덕분에 큰 웃음을 터트린 황석후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다행이로군. 나만 나이 먹는 것 같아 섭섭할 일은 없지 않나.”
“……동감입니다.”
“오늘 밤에는 술이나 같이 한잔하세. 오랜만에 약주를 하겠구먼.”
“…….”
대답은 없었지만, 따뜻한 감정만은 전해졌다.
덕분에 황석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하나 더 떠오르긴 하네요.”
황서연, 경호, 홍산을 보기 위해 연무장을 향해 가던 황준우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대표두요.”
“아…… 여봉선의 후예분 말씀이시로군요.”
백교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금장에 있으면 만나서 한번 이야기나 해볼까요?”
“그래 보죠.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다행히도 굳이 여선위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연무장에 도착해보니, 세 사람 외에도 여선위 역시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열심히들 한다고 하더니…….”
여선위를 상대로 세 사람이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든 채 기세를 일으키고 있다.
아무리 황서연이 천재라고는 하지만 여선위 역시 시대의 큰 그릇.
심지어 쌓은 경험도 다르다.
사실상 여선위 측이 더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변수가 있다면 경호랑 홍산인가…….’
사실 이 부분에서 황준우가 가장 놀랐다.
“두 사람 다 엄청 노력한 것 같아요.”
“확실히, 생각보다 빠른 성장이네요.”
백교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공의 경지에 있어 황준우의 눈을 속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그런 황준우의 눈에, 두 사람은 모두 비록 초입이나마 조화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여 표두가 불리하겠는데요.”
황준우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황서연보다는 확실히 여선위가 위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 셋 모두 초인의 경지에 오른 고수.
그리고 황준우와 함께 하며 나름대로 실전 역시 제법 겪었다.
여선위가 마냥 유리하다고 말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황준우는 결과가 궁금했다.
“시작하려나 봅니다.”
마침 세 사람 중 황서연 측이 먼저 움직였다.
여선위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 빛을 토했다.
“저, 저…… 다급한 성격만 고쳐도 한발은 더 앞설 텐데.”
황준우가 안타까운 한숨을 토했다.
황서연의 재능과, 무공 솜씨는 뛰어나지만 이미 말한 바 있듯 여선위가 몇 수는 앞서 있다.
섣부른 공격은 틈을 만든다.
실제로 선공에 나선 황서연의 옆으로 비켜선 여선위의 공세가 빠르게 이어졌다.
“두 사람도 판단이 조금 늦고.”
이미 황서연이 실수를 한 마당이라면, 셋이 호흡을 맞춰 몰아붙여야 하는 게 옳다. 이런 상황에서는 짧은 고민조차 독이 된다.
한데 두 사람은 몰아치는 공세에 빈틈을 찾으려 움직임을 늦추고 있었다.
“당하겠는걸.”
황준우가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뻗어진 주먹이 황서연의 얼굴 옆을 무섭게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정면 공격을 피했다.
아마 직격타를 맞았다면 바로 전장에서 이탈되었을 터였다.
물론 대련인 만큼 맞기 전에 여선위의 주먹이 멈췄을 테지만 말이다.
땀에 뻘뻘 젖은 황서연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기세가 몰린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후아…….”
거친 숨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왔다.
동시에 경호와 홍산이 움직이려 했다.
말했듯, 이미 늦은 움직임이었다.
여선위는 황서연을 쫓기보다 먼저, 대호처럼 움직여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덮었다.
“젠장!”
비명을 내지른 두 사람은 공격 한 번 가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버렸다.
기세에서부터 압도당한 탓이다.
그러던 차, 호흡을 몇 번 더 고른 황서연이 세 사람 사이로 막힘없이 뛰어들었다.
“호오…… 성급하지만, 그만큼 용맹하기도 하군요.”
“여동생한테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아요?”
황준우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 백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부정하실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칭찬이라면 칭찬이니까…….”
그리고 진실은 어디로 가지 않는 법이다.
어쨌든, 망설이지 않은 황서연의 가세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을 빠른 속도로 제압하려던 여선위의 계획이 틀어지며 압도적이던 공세가 주춤했다. 기세가 밀려나며 수세로 전환되기까지도 몇 초식이 걸리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승부가 갈릴 듯도 보였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점점 더 기세를 끌어 올리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과연 여봉선의 후예, 대단하군요.”
하나 황준우와 백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힘을 아끼면서도 중간중간 위협적인 움직임이 돌출되고 있어요. 잠시 방심하면…….”
황준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여선위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한 경호의 균형이 무너졌다.
들어 올려진 주먹이 단숨에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 한다.
하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황서연의 움직임이었다.
흐릿한 잔상만을 남겨둔 채, 몸을 틀어 검을 길게 내뻗어 여선위의 목에 가져간다.
흔히들 이형환위라 말하는 고도의 수법을 순식간에 재현한 것이다.
“끝났군요.”
주먹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여선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격렬하던 연무장의 공기가 가라앉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여선위의 목 근처에 가져다 대고 있던 검을 치운 황서연이 이마를 훔쳤다.
“와, 진짜 아슬아슬했다.”
“비장의 한 수를 따로 숨겨두고 있었구나.”
여선위가 놀란 눈으로 말을 건넸다.
“한 번 보이고 나면 견제하실 거잖아요.”
“당연한 이야기를…….”
“오빠가 그랬다고요. 무림에서 실력의 삼 할은 숨겨야 한다고.”
“하하!”
황서연의 자신만만한 말에 대소를 터트린 여선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소장주께서 잘 일러주셨어.”
“저기…… 그 전에 일어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표두님.”
그런 여선위의 밑에 깔려 울상을 짓고 있던 경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차, 너무 놀란 나머지 잊고 있었군.”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여선위가 밝은 웃음을 보였다.
“어쨌든 셋 다 많이 성장했군. 처음 대련할 때만 해도 압승이었는데…….”
“경호 아저씨랑 홍산 아저씨가 조화경에 올라준 덕이 크죠.”
“여 표두님이 조금 손속에 여유를 두신 덕도 있고.”
황서연이 웃으며 쑥스러워하던 차, 모습을 드러낸 황준우가 말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황준우를 향했다.
“오빠!”
신이 났는지 목소리가 절로 들뜬 황서연이 황준우에게로 뛰어들었다.
언제나처럼 품에 달려든다고 생각해서 양팔을 벌리고 있던 황준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황서연이 눈앞에서 동작을 멈춘 탓이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마냥 말괄량이처럼 굴 순 없지.”
설마 황서연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이야. 예상도 못 했던 황준우가 놀란 의문을 내뱉었다.
“방금 대련이 끝나서 몸에 땀 냄새가 가득하잖아. 안기는 건 이따 씻고 할 거야.”
“……그런 의미였냐.”
확실히, 이제야 조금 황서연답다.
그렇게 생각한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군요.”
“오빠 돌아올 때까지, 짐이 되지 않도록 수련한다고 했으니까.”
“노력했습니다.”
“아직 멀었지만요.”
황서연, 경호, 홍산의 이어진 말에 황준우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약속 지키느라 고생이 많네.”
“한데 벌써 돌아온 거요?”
여선위의 질문에 황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은데, 아쉽게도 다른 볼일이 있어서.”
황준우가 뒤편을 바라보았다.
말은커녕 기척조차 없이 서 있던 백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어, 오빠의 스승님이다?”
“백 선생님이시로군요.”
황서연과 경호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반면 홍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인 탓이었다.
“공자의 글 선생 백교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왕 모습을 드러낸 김이라 생각했는지 백교가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제강에서부터, 영정의 이야기, 그리고 신선들에 관한 비화 등, 꽤나 감출 것 없는 직관적인 이야기인지라 황준우마저 놀랄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남은 네 사람의 반응이라고 해봐야 다를 것도 없었다.
아니, 황서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뭐야, 우리 오빠 대단해. 그런 일에 나섰던 거야?”
감동, 그리고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본 그녀가 양손을 모으며 꼭 움켜쥐고는 결심한 눈으로 말했다.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더 강해지기로 한 거니까.”
“적응이 빠르시군요.”
오히려 백교가 놀랄 정도의 모습이었다.
“아, 그야……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오빠 옆에 있다 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았지.”
경험이 많은 여선위 측도 제법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확실히 도련님이 그사이에 끼어 있으니 뭔가 이해가 됩니다만…… 그래도 규모가 보통이 아니네요. 제가 나서도 될 만한 일인지…….”
경호가 고개를 저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생각해보니 애초부터 제가 해야 할 일일 뿐이로군요.”
홍산 역시 마음을 정리하고는 편히 말했다.
“그러면 일단, 네 사람 모두 도와주는 거지?”
밝은 얼굴을 한 황준우의 물음에 황서연, 경호, 홍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꼭 해내겠습니다.”
반면 여선위의 표정은 오묘했다.
“대표두?”
“아무래도…… 내게는 힘든 이야기 같소.”
“아…….”
황준우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렀다.
큰 조력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혹시 오해하지는 마시오. 딱히 두렵다거나, 믿지 못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아무렴 여봉선의 후예께서 싸움을 두려워하시겠습니까.”
백교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여포는 한때 투선의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후손이 다소 규모가 거대하다고 해서 겁을 집어먹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번 큰 부상을 입은 이후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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