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08화
제 308화
그 위협적인 힘을 거대한 손짓 한 번으로 지워버린 영정이 비웃음을 흘렸다.
“우습구려, 서왕모. 내가 만든 불로 위해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래, 네 힘이 굉장하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그 겁 많은 성격은 어디 가지를 못하는구나. 자신의 불이 두려워 물리는 모습이라니.”
서왕모의 입가로도 비웃음이 어렸다.
콰드득-!
동시에 지면으로부터 검은 나무뿌리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콰과과-!
마치 창날처럼 날아드는 수천의 날카로운 나무뿌리를 바라보는 영정이 눈을 부릅떴다.
“감히!”
이미 서왕모의 삼청조, 신아로부터 비슷한 공격을 받은 적 있던 영정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콰지지직-!
기세를 일으킨 나무뿌리는 천하의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는 영정의 몸을 꿰뚫지 못한 채 갈라지고 부러진다.
“흠…….”
짧은 신음을 흘린 서왕모의 검은 옷이 또다시 연속으로 펄럭였다.
그러자 갈라지고, 무너졌던 뿌리들이 한데 엉켜 그물이 되어 거대한 영정의 전신을 뒤덮고, 엮어 버린다.
“……!!”
생각지 못했던 변용에 영정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반고의 조각을 얻었다고 하여도, 거인의 약점은 변함이 없지. 자, 이제 네 죽음을 결정하자꾸나.”
차가운 웃음을 흘린 서왕모의 얼굴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했다.
피부는 회색빛으로, 양 눈은 흰자위 하나 없는 검은빛으로 물든다. 하얗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그 가닥 하나, 하나가 마치 가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콰드득-!
이어서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길게 자라난 손톱이 곤륜의 성산 아래로 내리박혔다.
콰과광-!
곤륜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나무뿌리가 서왕모의 손에 쥐어졌다.
“자, 무릎 꿇어라. 거인의 혼을 훔친 죄인이여.”
서왕모가 마치 채찍을 내리치듯, 거칠게 나무뿌리를 땅으로 두드렸다.
쿠구구-!
무너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던 영정의 거대한 신형이 땅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덩치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빛을 흩뿌린다.
이윽고, 영정의 신형이 완전히 쓰러졌다.
“노군! 종리권!”
서왕모의 외침이, 휴식을 취하던 두 신선의 귓가를 때렸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두 신선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백룡이 태양 아래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태상노군의 손짓에 의하여 만들어진 벼락의 기운이다.
다시 한번 뇌룡이 강림하였다.
콰과광-!
그 결과, 영험한 기운을 한껏 머금고 있던 곤륜의 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후우…… 후우…….”
산이 무너져 내리며 피어오른 자욱한 먼지구름 사이, 전력을 쏟아낸 종리권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가 해냈소.”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태상노군과 서왕모.
둘 모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정면만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왜 그러시오? 아무리 놈이 반고의 혼을 얻었다고는 하나…….”
종리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의문을 표현할 때였다.
쿠구구구-!
무너진 봉우리의 잔해를 헤집으며 땅이 일어났다.
아니, 거인이 기지개를 켠 것이다.
“이럴…… 수가…….”
종리권은 입을 크게 벌리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금, 태양을 가리고 우뚝 선 거인의 입가로 선명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최고 신선들다운 멋진 협공이었소. 내 인형 다섯을 모두 희생하게 될 줄이야.”
그의 몸을 딱딱하게 덮고 있던 흑청빛 조각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이내 지면에 닿아 인간의 신체 부위로 변하여 녹아내려 버린다.
“인형이라고……?”
그중, 본인이 다퉜던 흑의 갑주 무인의 모습을 확인한 종리권의 목소리가 떨렸다.
“물론 평범한 인형은 아니오. 내가 엄선하여 골라낸, 내 최고의 동료들이니까. 그중에는 살아생전 가장 사랑했던 여인 또한 있었지.”
분노한 영정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대기가 진동한다.
공기는 무겁게 억눌린다.
“화가 나지만, 이젠 괜찮소. 그들 모두 오히려 영생을 얻었으니…….”
싸늘한 웃음을 보인 영정의 거대한 손이 흙을 한 줌 퍼 올린다.
콰드득-!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푸른 불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꽃이 사라졌을 때는, 방금 전 희생을 통해 죽었던 다섯 무인이 그의 손바닥 위에 다시금 본래의 모습을 갖췄다.
“네놈…… 대체 어찌 그리 끔찍한 짓을…….”
서왕모의 음성이 떨렸다.
한때 죽음을 관장하였던 그녀의 눈에는 방금 전 영정의 손아귀에 피어오른 불꽃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훤히 보였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영혼을, 불에 태워 감각과 감정을 마모시킨 후, 어울리지 않는 흙으로 빚은 육체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아마 그들은 정신을 차릴 때마다 육체 안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를 것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영혼의 신음이다.
“끔찍하다고 했소? 나에게 이런 고통을 안길 수밖에 없는 슬픔을 건넨 이들이 누군가?”
영정의 쌍심지가 높게 솟았다.
“바로 곤륜의 위선자, 네놈들이다! 나를 억압하고, 외롭게 하였으며, 이내 소중한 것들까지 모두 빼앗아 버렸지 않느냐!”
광분하듯 외친 영정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태상노군과 종리권, 서왕모 세 사람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이건……!”
온몸을 짓누르는 강력한 압력에 세 신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면 아래, 천하의 중심에서부터 강력한 힘이 그들을 잡아당기고 있는 탓이었다.
“거짓 선으로 둘러싼 네놈 같은 녀석들이 신선이라며 멋대로 행동하기에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해서 이 나는 그 모든 것을 뒤엎기로 했다. 과거에 그래왔듯, 이번에는 모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지배하겠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 줄은 알고 있는 게냐……? 네놈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멸망이…… 곧…… 이곳을 찾아온단 말이다!”
서왕모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멸망! 그 또한 이 세계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저 지배하고, 그 이전까지의 시간을 이끌 뿐이다.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온다면 자격이 있는 자들만이 나와 함께하는 배에 올라타지 않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올바른 세계의 선민(選民)!”
“하면…… 그 기준은 누가 정한단 말이오!”
종리권이 거친 목소리를 토했다.
“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영정은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낸다.
“미친…… 놈!”
서왕모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결국 영정은 세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재단하고, 조율하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어떠한 선악의 잣대도 없다.
기본적인 법률과 논리도 없을 터였다.
모든 것은 영정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이루어질 제멋대로의 세계다.
“누가…… 그딴 세계를 원한다고…….”
종리권의 몸이 분노로 떨려왔다.
“삶과…… 죽음을 멋대로 정하는 기준은 이미 먼 고대에 버려졌다. 그 누구도…… 함부로 정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서왕모가 자신의 검은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
한때 그녀는 말 그대로 죽음의 신이었다.
누군가의 삶과, 그 끝을 제멋대로 정하곤 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인간들 중 자신의 벽을 깨고 선계로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서왕모가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던 인간들이다.
의문을 가지고, 그들과 대화를 시작한 그때야 그녀는 깨달았다.
잣대라는 것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댈 수 없는 것이다.
최고신인 숙조차 모든 것을 알지 못하거늘, 한낱 신선 따위가 어찌 통달(通達)한 듯 삶을 논한단 말인가?
이후 서왕모는 죽음을 뜻하던 검은 옷을 버렸다.
자신을 따르던 세 명의 시녀에게는 푸른 옷을 입혔으며, 본인은 자색 혹은 백색의 의복을 걸쳤다.
이후 서왕모는 침묵을 지켰다.
그 결과, 예전보다 더 많은 악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가능성과 세계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선계에서, 혹은 천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겪으며 혼자서 얼마나 흡족하였는지를 모른다.
결국 서왕모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자상한 어머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야, 가장 정점에 선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숙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하나…… 네놈만은 그저 두고 볼 수 없겠구나.”
서왕모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주변을 억압하던 중력(重力)을 떨치기 시작했다.
검고 날카로운 기운이 영정을 향해 매섭게 나아간다.
코웃음 친 영정의 손바닥 위에 서 있던 흑의갑주의 무인이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서왕모!”
놀란 종리권이 소리쳤다.
바람처럼 뻗어진 묵창(墨槍)이 서왕모의 왼쪽 가슴 위를 깊게 꿰뚫는다.
“쿨럭!”
핏물이 서왕모의 입가를 타고 흐른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비켜 갔으나 눈앞이 새카맣게 뒤집혔다.
“쓸데없는 반항을 하지 마라. 그저 그곳에서, 지켜만 보란 말이다.”
큰 걸음을 내디딘 영정이 이제는 한 줌 재가 되어 버린 태청경의 문을 잡아 뜯었다.
콰드득-!
문이 찢어지고, 다소 막혀 있던 선계의 기운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자연기와, 선기가 섞이며 크게 요동친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막혀 있던 경계의 벽이 갈라지고 있었다.
“아, 안 돼…….”
태상노군이 절망 어린 신음을 흘렸다.
“원시천존이시여!”
종리권이 가장 높은 신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았다.
“다음은 상청과 옥청경이다. 이후에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원시천존, 석가여래 아니지…… 숙. 그 역시 이 지상 아래로 끌어져 내릴 것이다.”
선언하듯 말한 영정이 다음 걸음을 뗄 때였다.
뜯겨 나간 태청경의 문 사이로 황금빛살이 쏘아져 나왔다.
“……!!”
놀란 영정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서서 눈을 빛내고 있던 네 명의 인형이 허공으로 떠올라 각자의 무공을 뽐냈다.
파바밧-!
하나 황금빛에 닿는 순간 태양열에 닿은 눈처럼 녹아내리며 사라지고 흩어진다.
막힘없이, 거대한 영정의 얼굴 앞까지 날아오른 황금빛에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위치, 오랜만이지?”
결코 낯설지 않은, 익숙한 목소리에 영정의 검미가 크게 떨려왔다.
“네놈…….”
“그래, 나야.”
“황준우-!”
영정이 그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대기를 짓누르는 중력이 더욱 강해지며 또 하나의 봉우리를 무너트린다.
콰드득-!
지면마저 깎여 내리며 뒤틀리기 시작한다.
“우리 악연도 이만 끝내자.”
찬란한 황금빛을 갈무리하여, 갑주처럼 두른 황준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안하지만, 나한텐 너무 가벼워.”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먹이 순식간에 거대해진다.
눈 바로 앞이다.
‘아니…….’
콧잔등에 닿았다.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크게 뒤흔들렸다.
세상이 뒤집힌다.
거대한 신체가 하늘을 몇 바퀴나 날았다.
이윽고,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 영정의 온몸에 격통이 찾아왔다.
“크아아아-!”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바로 위.
어느덧 눈앞까지 또다시 다가온 황준우가 입을 열었다.
“그것 알아? 원래 겁이 많은 동물일수록 자신의 몸을 부풀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해.”
“닥쳐라!”
휘두른 영정의 주먹이 허공을 저었다.
“지금 네 꼴이 딱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귓가에 다시 한번 황준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머리를 망치로 내리친듯한 충격이 또 한 번 뇌리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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