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3화
제 313화
황금빛 밧줄에 붙잡힌 이후, 요동은 일단 맞았다.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대처할 수도 없을 만큼 빨랐다.
아니, 사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아팠다.
죽일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쳐 주길 바랐지만 눈앞의 인간은 무심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주먹만 휘두를 뿐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요동은 항복을 선언했다.
[내,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겠다! 그러니까 제발……!]
세상의 요괴와 요선들이 몰려든 금오도에서도 몇 없다는 뇌신, 그중에서도 이름 높은 요동이 쩔쩔매며 양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물론 본심은 아니었다.
머릿속은 상대가 방심하고 시선을 돌린 틈에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한 채였다.
싸울 생각?
당연히 없었다.
맞는 동안 배운 게 없었다면 그는 요선도 못 되었을 것이다.
“흠…….”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는 다소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동이 튀어나왔던 경계의 틈을 옷 꿰매듯 단숨에 메워버렸다.
‘대체 저 인간은 뭐야!?’
요동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세상의 균형이 어그러지고 흐름이 깨어졌다.
덕분에 자신과 같은 요선도 인계, 천하라고 불리는 땅으로까지 뛰어나올 수 있던 것이다. 그 정도로 큰 흐름의 불합리는 수많은 대요괴, 요선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요괴왕(妖怪王)들이라 하여도 쉽게 어찌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겠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한데 눈앞의 인간은 그러한 세계의 불균형을 몇 번의 손짓으로 가볍게 메워버렸다.
‘도망갈 수 있을까?’
잘못 보았다.
눈앞의 인간은 그냥 강한 게 아니었다.
요동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아주 간혹, 인간 중에 뛰어난 존재가 나타난다고 하여 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격이 다르다.
‘지상에 나오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냐.’
고개를 돌리는 황준우의 두 눈에서 빛나는 황금빛이 으스스하게 요동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노예.”
[…….]
“앞으로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야. 영원히 죽지도 못할 만큼 괴롭든지 혹은 영멸(永滅)하든지.”
요동의 큰 눈이 다시 한번 함지박만 하게 변했다.
‘인간 주제에 영멸도 알아!?’
유계와 금오도에 사는 인외(人外)의 존재들에게 있어 죽음은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나 영멸은 다르다.
요괴왕은 물론, 유계의 마왕들도 영멸만큼은 피해갈 수 없다.
영원한 소멸.
윤회도, 또 다른 미래도 없다.
영멸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짙은 어둠 중에서도 가장 깊은 칠흑의 느낌일 터였다.
당연하지만 요동은 그런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끝없는 고통을 온몸에 새기고 싶지도 않았다.
“노예.”
빠른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동시에 황준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머리가 울리는군.”
말했듯, 요동은 눈치가 나쁘지 않았다.
번갯불이 몇 번이고 번쩍이며 거대하던 요동의 몸이 황준우와 비슷한 인간의 크기로 변했다.
원숭이 같은 얼굴이 크게 변하지 않았고, 엉덩이 뒤편으로는 기다란 꼬리도 튀어나왔지만 등에 달고 있던 날개 정도는 어찌어찌 감춘 뒤였다.
“헤헤, 제가 아직 요력(妖力)이 모자라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딱히 그…… 인간님을 불편하게 하려는 건 아니고요.”
금오도에 명성을 떨치던 요동의 자존심상 차마 주인님이란 말은 나오지 못했다.
황준우도 그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요동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황금빛 눈을 빛낸 황준우는 시선을 옮겨 서남쪽 부분을 바라본다.
“저기.”
검지를 들어 방향을 가리키자, 양미간에 힘을 준 요동이 눈을 빛낸다.
“야구자 놈들이로군요. 요괴의 체면도 모르는 녀석들.”
요괴 중에서도 사람의 골을 탐내는 종류는 몇 없다.
그중에서도 야구자는 조금 더 끈질기고 지독했다.
나름대로 스스로가 명망 있는 요선이라 여기는 요동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존재 중 하나에 속했다.
“처리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가볍게 답한 요동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봤다.
“가서 처리해.”
“저 묶여 있는데요?”
요동이 조금은 비열한 웃음을 보이며 자신에게 채워진 목줄을 가리켰다.
“괜찮아. 이 밧줄은 내 의지만큼 늘어나니까.”
잔머리가 먹힐 상대도 아니다.
결국 한숨을 내쉰 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야구자 놈들 따위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이 된 요동의 몸이 번갯불을 튀기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흠…….”
황준우의 황금안(黃金眼)에 이채가 어렸다.
땅에서 기어 나온 야구자들 사이로 떨어진 요동이 어느덧 생성한 나무망치를 들어 번갯불을 번쩍이며 위용을 보인다.
“우오오오-!”
쿠르릉-!
멀리까지 들리는 고함 소리와 함께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구자 구워지는 내음이 딱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쓸 만하군.’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한 때.
제법 쓸 만한 애완동물을 얻은 것 같아 흡족한 황준우의 눈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정말 바쁘군.’
아무래도 한동안은 정신이 없을 듯했다.
해가 뜨고, 지기를 열다섯 번이 넘게 반복하는 동안 황준우와 함께 천하 곳곳을 누비며 요괴는 물론 마왕, 이름 높은 요선까지 몇 처리한 요동은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요괴는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대다수의 요괴란 존재들이 인간이 만든 부정적 감정을 기반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급한 요괴들은 인간을 마주한 것만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며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고위 요괴일수록 그런 감정을 일부 절제하는 것이 가능은 했다.
굳이 표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에 대한 악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소 불쾌하게, 마음 한편 어딘가에는 늘 인간에 대한 살의를 가지고 살아간다.
한데 지금 요동의 꼴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대한 번개 망치를 휘둘러,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여우 요괴의 머리를 내리찍은 그의 등 뒤로 목숨을 구제한 인간들이 달라붙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뇌신님!”
심지어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감격 어린 찬사를 내뱉는다.
눈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보다는, 희망의 빛이 가득한 채다.
‘뭐지?’
본래 그는 강력한 요괴로서 이깟 하찮은 여우 요괴에 비해 훨씬 더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었어야 할 터였다.
“뇌신님, 위!”
누군가의 외침에, 귀찮다는 듯 손을 번쩍 들어 번개를 쏘아 보냈다.
캬아악-!
괴상한 비명과 함께 양의 머리에 닭의 몸통을 가진 요괴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려 죽음을 맞이한다.
“멋지십니다. 뇌신님!”
누군가의 외침은 다소 장난스럽게까지 느껴진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터다.
그들은 방금 전 죽을 뻔했고, 요동의 손에 의하여 구은을 입었다.
아마 진심을 다한 감사 표현이겠지.
‘근데 내가 이걸 왜 받고 있냐고?’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확 그냥 여기 있는 인간들까지 다 죽여 버려?’
하필 나타난 요괴가 제법 강력해서 전력을 쏟다 보니 번갯불이 잘못 튀었다고 하면 그 무시무시한 인간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 안 해주면?’
목에 걸린,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황금빛 밧줄이 유달리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영멸 혹은 뒤지게 맞는 거지 뭐.’
다시 한번 번개 망치를 휘둘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요괴마저 처리한 요동의 눈에 짙은 불쾌함이 스쳐 지나갔다, 사라졌다.
불만은 많지만 도망갈 방법이 없다.
감히 싸울 용기도 나지 않았다.
며칠 전, 유계에서 걸어 올라왔다던 괴상한 이름의 마왕이 반항하다 일검에 영멸 당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우라질, 제기랄.”
욕을 내뱉은 요동이 자신을 보며 감격에 찬 표정을 한 인간들을 바라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기껏 살려줬는데 죽지 마라. 죽으면 쫓아가서 또 죽여버릴 테다.”
자기가 내뱉어 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를 기묘한 말을 남긴 요동의 머릿속에 음성이 울려왔다.
[동서쪽. 마차 무리.]
“예, 예. 위대하신 인간의 신님.”
몇몇 인간들로부터, 그의 이름이 황준우고 무신이라 불린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다른 인간에게 붙었다면 언제나 그렇듯 무림인들을 칭송하는 허황된 별호겠지만 황준우만큼은 달랐다.
‘놈은 진짜 신일지도 몰라.’
검신이니 도신이니, 심지어 요동과 같은 뇌신하고는 다른 진짜배기.
그게 아니라면 천하의 마왕마저 일검에 소멸하는 게 말이 안 되질 않는가?
[급하다. 요동.]
“갑니다. 가요!”
이어진 목소리에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인 요동의 신형이 번쩍이며 사라졌다.
“인간을 돕는 착한 요괴님이 계시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자신을 뇌신이라 부르라던 요동이 사라진 이후, 다시 한번 감격에 빠진 인간들이 부랴부랴 짐을 싸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넋 놓고 있다가 진짜 죽게 되면 지금의 구원도 의미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천하 방방곡곡을 누비며 균열의 틈새를 모두 막은 황준우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휴…… 일차적인 문제는 해결된 건가. 수고했다. 노예.”
그간 황준우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급한 상황마다 나서서, 인간들을 구하고 요괴들을 처리한 요동에게도 칭찬이 떨어졌다.
다른 인간들의 감탄이라면 모를까, 황준우의 칭찬은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요동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우라질, 부려먹을 대로 부려 먹어놓고 저게 다야?’
물론 그 심경을 솔직하게 내뱉을 용기는 없었다.
“헤헤, 그러면 이제 저는 가봐도 될까요?”
천하에 닥칠 수 있었던 큰 위기가 지나갔다.
그 위기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요동은 이제 미련 없이 금오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곳에 남아 눈앞의 인간과 두 번 다시 엮이는 건 완벽한 사양이다.
“흠…….”
짧은 신음을 내뱉은 황준우의 시선이 요동을 향했다.
침을 삼키는 모습이 제법 애절하다.
‘어떻게 하지?’
내뱉은 말대로 선계가 무너진 짧은 시간, 천하 곳곳에 생겨났던 균열은 모두 메워놓았다.
신격을 얻은 황준우가 우주기를 통하여 메운 만큼 다시 벌어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근데 이 균열이 끝이란 법은 없단 말이지.’
지금까지 황준우가 열심히 닫고 다닌 균열은 선계가 무너진 순간, 갑작스럽게 흔들린 세계의 균형에 멋대로 만들어진 구멍들이다.
이를 통해 성미가 급한 요괴 혹은 마왕 또는 유계의 존재 몇몇이 천하에 나와 제 욕심을 부리려 하였으나 모두 황준우와 요동의 손에 소멸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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