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4화
제 314화
‘문제는 남은 놈들이지.’
눈앞의 요동처럼 성미가 급해 흐트러진 흐름에 신이 나서 뛰쳐나온 녀석이 있는가 하면, 화들짝 놀란 와중에도 자신을 절제하고 흐름을 엉성하게 메워둔 채 눈치만 보는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황준우도 엉성하게나마 흐름이 메워져 있으면 그 틈새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에 있었다.
‘분명 기회를 엿보고 있을 텐데…….’
문제는 지금 황준우에게도 할 일이 아직 남았다는 것이다.
바로 유계에 다녀오는 일이다.
숙이 맡긴 일도 있고, 장과로의 부탁도 들어줘야 한다.
오래 걸리지 않으면 다행일 테지만,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면 지상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남천맹에 서신을 한 통 보내놓고…….’
요괴 중에는 끈질긴 사념만 견뎌낸다면 일반 무인들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종류도 있다.
그 정도라면 남천맹의 저력으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요선, 혹은 마왕급이다.
‘완시의 방에서 일행들이 나온 이후라면 조금 걱정이 덜할 텐데…….’
심지어 선계의 신선들도 휴식기다.
자연스럽게 요동을 향하는 황준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너…….”
“…….”
불안한 직감을 느꼈는지 요동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잠시 어디 좀 다녀와야 돼서 그런데, 내가 소개해주는 사람들이랑 협력해서 일 조금 더 하고 있어라.”
“인간님…… 아니 신님도 안 계신 곳에서요?”
“무슨 상관이야. 차라리 내가 없는 게 좋지 않아?”
좋다마다.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금오도에 남은 일도 있고, 제가 또 이래 보여도 뇌신 아닙니까. 따르는 녀석들도 있고 해서…….”
“따르는 녀석들?”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모습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낀 요동이 뒷걸음질 쳤다.
“아니, 뭐. 대단한 녀석들은 못 됩니다만…….”
“요선도 몇 있나?”
“없…….”
“거짓말 칠 생각하지 마.”
황준우의 눈에 다시금 황금빛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 눈빛만 보면 오금이 지리는 탓에 요동은 결국 솔직한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셋 정도…….”
“호오…….”
기껏해야 하나 정도 더 있을까 생각했는데 셋이나 된다고 한다.
눈앞의 요동이 어쩌면 더 유능한 요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황준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 녀석들 모두 불러올 수 있나?”
“신님이 틈이란 틈은 다 막아 버리셨지 않습니까.”
“뭐, 하나쯤 잠시 열면 되지.”
하긴 막기도 했는데 여는 게 문제일까.
속에서 뛰쳐나오려는 욕을 삼킨 요동이 굳은 표정을 했다.
“아니, 근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신님에게 패배해서 부하…… 아니, 노예가 됐다고는 하지만…….”
말을 하는 요동의 얼굴이 점점 힘없이 풀려간다.
‘젠장. 그래. 노예가 무슨 대가냐.’
제 말대로 부하라도 됐으면 모를까, 그의 처지는 노예였다.
함부로 주인에게 반항했다가는 단숨에 숨통이 끊어지다 못해 영멸을 맞이하게 될 비참한 운명.
‘대체 내 요생(妖生)이 어쩌다 이리 꼬였단 말인가?’
깊은 한숨만 푹, 푹 나왔다.
“물론 공짜로 부려 먹겠단 건 아니야. 약속하고, 이번 일만 지나면 풀어줄게.”
“그렇습니까?”
기쁜 일이다.
“정말로, 약속하고.”
“예. 예. 믿습니다. 아무렴 무신께서 거짓말을 하실까요.”
다만 속이 상할 뿐이었다.
솔직히 풀어 줄 거면 지금까지 바친 대가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흠…… 별로 내키지 않나 보네.”
“…….”
요동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야말로 힘이 쭉 빠진 탓이다.
“혹시 부탁하고 싶은 일이나 그런 건 없어?”
“없습니다. 노예 따위가 무슨 부탁이라고요…….”
작게 읊조리던 요동의 머릿속에 빛이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전혀 없지만은 않았다.
“뭔가 있나 보구나.”
“…….”
황준우가 그 기색을 놓칠 리 없었다.
난감한 표정의 요동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말해 봐. 어지간한 일이라면 다 들어줄 테니까.”
“아마 무신님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만…….”
드디어 요동의 입이 열렸다.
황준우는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사실 제가 뇌신 중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편에 속합니다.”
그 기색이 꽤나 진심 된 덕인지 요동 역시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사실 조금만 더 있으면 요괴왕이 될지도 모르죠.”
“요괴왕이라…….”
이야기는 들었다.
모든 요괴들,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요선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존재들.
바로 달기 역시 그 요괴왕 중 하나라고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일만 없었어도 전 이미 요괴왕이 됐을 겁니다.”
억울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본론이 드디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인데. 이야기해 봐.”
황준우는 재촉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흥미롭다는 듯 요동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쯤 되자 요동도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충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괴왕이 되기 위해 모아 두었던 번개의 정수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둑맞았다. 누군가가 빼앗아 간 것 같은데 금오도 내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만든 번개의 정수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는데 유계의 어느 마왕의 손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끝이었다.
‘어라, 이거?’
황준우의 머릿속에 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장과로의 어고에 이어서 요동의 번개 정수까지?’
묘한 냄새가 난다.
같은 인물이 훔쳤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준우의 직감은 분명 범인이 하나라고 외치고 있었다.
“제 번개 정수만 찾을 수 있다면 진짜 여한이 없습니다. 제가 그걸 만들려고 백 년을 넘게 동굴 속에서 참고 세월을 견뎌냈는데…….”
심지어 그걸 도둑맞고, 분한 마음에 날뛰다 갑작스럽게 열린 틈새에 인계로 뛰쳐나오자마자 황준우에게 붙잡혀 노예 신세가 되었다.
요동으로서는 요생이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좋아, 네 부탁 들어줄게.”
생각을 대충 정리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유계로 향한다는 목적이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예? 정말입니까?”
반면 요동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신의 부탁 탓에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는 유계로까지 향한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눈앞의 무신이라 하여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죽은 자들의 세상에 간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일 테니 말이다.
“응. 정말로.”
“구, 굳이 제 부탁 때문에?”
“…….”
황준우는 대답 대신 시선을 회피했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감격한 요동의 눈빛을 외면하기 힘든 탓이었다.
‘그래도 나 요동, 나름대로 신의 있는 요괴라고 자부하지 않았나?’
덕분에 그를 따르는 요선들도 셋이나 생겼을 정도다.
자신을 위해서 굳이 먼 길을 떠나겠다는 황준우를 외면하고 마냥 고집만 피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습니다. 저 역시 신님의 부탁대로 돌아오실 때까지 최대한 힘내서 인계를 지키겠습니다. 저를 따르는 부하 녀석들도 불러와서 함께요!”
완전히 감화된 듯 힘차게 외치는 요동을 보며 머쓱한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오래 끌 것도 없이 여기서 네 친구들을 불러볼까? 요선만 셋이라…….”
“바로요?”
“돌아갈 건 없지.”
아마 마왕 하나쯤은 통과할 수 있는 균열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 생각한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아 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세계의 흐름이 고요하게 흐르며 하나의 결을 맺고 있다.
‘잘도 메워놨군.’
한번 본인이 메운 틈새를 찾기 위해 집중하던 황준우의 황금안에 작은 이상이 감지되었다.
검이 허공에서 들어 올려져, 지면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찌이익-!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운이 출렁이며 거대한 균열이 벌어진다.
그 규모에 요동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뭐, 뭐야? 요괴왕이랑 마왕을 동시에 소환이라도 하려고?’
하급요괴라면 수천 마리가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균열.
“아, 이거 생각보다 힘 조절이 힘드네.”
입맛을 다신 황준우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한다.
그나마 이게 조절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연스레 요동의 몸이 또 한 번 떨렸다.
“네 친구들 부를 방법은 있지?”
“그, 그렇죠.”
“일단 불러. 그 전에 나오는 놈들은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영멸이다.”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황준우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군지 몰라도 재수 없게 걸릴 녀석들이 불쌍하구나.’
벌써부터 틈새의 너머로 아귀다툼하듯 뛰쳐나오는 기운들이 몇 느껴졌다.
이 정도로 큰 균열이라면 여태껏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아왔던 인내심 좋은 녀석들 몇몇도 신나서 뛰쳐나올 만한 곳이다.
‘어디 보자…… 운이…… 나쁘지 않네.’
그중에는 요동을 따르는 요선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오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요동은 정신을 집중하고, 그들에게로 자신의 존재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응한 세 요선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의식이 접선 되고, 서로의 생각이 오간다.
[대형!]
[소식이 끊겨 놀랐잖소!]
[기다리시오, 곧 우리가 갈 테니!]
요란한 목소리가 꽤나 반갑다고 느꼈으나, 그를 내색할 틈은 없었다.
방금 전, 눈치를 보고 뛰쳐나왔던 거대한 양 머리의 요괴가 두개골이 절단되며 영멸했다.
그 힘의 규모가 요동 본인을 앞서는 것을 보아하니 최소 요괴왕 급이다.
“어디서 나오자마자 살기를 날려대.”
사인은 나오자마자 황준우를 향해 살의를 뿜어댄 탓이다.
문제는 이 안의 녀석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말했듯, 기본적으로 요괴는 인간을 증오한다.
[일단 빨리 나와. 내가 앞에 있다. 그리고 나와서 인간 하나가 보일 텐데 절대 덤벼들지 마. 기세도 내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그냥 무조건 머리 숙여. 아니, 무릎 꿇어.]
[……대형?]
[시끄럽고. 영멸되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해.]
의아해하는 세 요선의 기운과 접선을 끊고 물러난 요동이 황준우의 옆에 섰다.
‘또 혹시 모르니까…….’
겁도 없이 나댈지도 모르니 나타나자마자 저놈이라고 지목을 해줘야겠다 생각한 요동이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세 요선이 도착할 때까지 두 요괴왕과 한 명의 마왕이 더 영멸되었다.
정말이지 끔찍한 무력이었다.
요동의 부하, 각자 쥐와 뱀, 매의 얼굴을 한 요선들이 도착할 때까지 꽤나 큼직한 대요괴나 유계의 존재가 다섯이나 더 영멸했다.
마치 미끼를 풀고 낚시를 하듯, 편안한 자세로 기다리다가 상대가 나타날 때마다 발검술을 선보인 황준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차원의 틈새를 다시 메운다.
“무서운 자…….”
요동이 몸을 덜덜 떨며 말하자, 주변에 자리 잡은 세 요선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인계로 뛰쳐나오자마자 함께 모습을 드러낸 마왕 하나가 소멸하는 모습을 목격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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