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7화
제 317화
고작 문 하나를 넘었음에도 이곳이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명확히 느껴졌다.
[칠야무신!]
영혼은 본질을 꿰뚫어 본다 하였던가.
[악마!]
계속되는 외침과 함께 황준우의 주변으로 악령들의 손길이 맞닿는다.
한때 그 외침에 괴로워한 적도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을 두들기기도 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괜찮아.’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흔들림이 없다.
악령들의 거친 손길이 살결을 마구잡이로 찢으려 하지만 감히 파고들지 못한 채 흩어진다.
‘그 모든 것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황준우의 몸에서 점점 진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우아악-!]
악령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흘러나오는 황금빛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그 비명은 심해졌다.
[끄아아아-! 네놈을 저주한다!]
긴 여운을 남기는 괴성과 함께, 이내 주변을 덮고 있던 검은 악령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중심,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던 황준우가 천천히 내려섰다.
“여기는…….”
주변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황폐한 땅, 검은 하늘이 우선으로 두 눈에 들어왔다. 곧 으스스한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황준우의 볼가를 스쳐 지나갔다.
“진짜 유계인가.”
하면 방금 전 황준우가 만났던 악령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황준우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그 넓은 공간에는 지나온 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서연이랑 스승님은? 부맹주도 안 보이고…….’
문을 넘어서는 순간 느꼈던 오묘한 공간의 이동 감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된 듯했다.
‘우선 찾아봐야 하려나.’
난감하다고 생각하며 볼을 긁은 황준우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누구지? 제법 빠른데?’
최소 황서연하고 동급.
하나 기운의 종류가 다르다.
그보다 더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어둡다.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기척의 주인이 나타났다.
꽤나 높게 솟은 뿔에, 소의 얼굴을 가진 다소 사나워 보이는 검은 눈의 그는 황준우를 이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황준우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상대에게서 어떠한 적의와, 악의가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우타다.”
“우타?”
“그렇다. 구원자여. 예상은 했지만 그대가 가장 늦었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궁으로 가야 한다.”
“잠깐. 내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네가 숙이 말한 조력자인가?”
“숙…….”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타가 곧 검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타가 아니다.”
“그렇다면 너와 함께 갈 수 없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일이 많거든. 동료들도 찾아야 하고, 숙의 부탁도 들어줘야 해서.”
“우타는 아니지만, 우타가 모시는 분이 하얀 신과 밀접하다.”
“우타의 왕이 하얀 신과 계약을 맺었다. 그분께서 지금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구원자의 동료들도 도착하여 먼저 궁에 도착했다.”
“아…… 그러니까 너는 일종의 안내자인가?”
동료들이 먼저 도착해서 궁에 있다는 말에 다소 안도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독특한 화법이었지만,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거대한 소머리를 크게 끄덕인 우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형형한 검은 눈에는 알 수 없는 걱정이 스쳐 지나간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 급하다. 우타, 먼저 뛸 테니 구원자는 따라와라.”
“아, 그러…….”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우타의 신형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굉장히 발 빠른데. 한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소라기보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의 뒤를 쫓으며 황금안을 일깨운 황준우의 시선이 우타의 검은 눈동자가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
거대한 검은 성.
우타와 닮은, 소의 머리를 단 요괴들이 괴성을 내지른다.
성벽 아래에는 검은 악령의 형태를 한 인간, 그리고 다양한 짐승의 형태, 또는 처음 보는 괴이한 모습을 한 요괴들이 기어오르고, 뛰어오르거나 성벽을 두드린다.
‘하늘 위에도…….’
하늘을 나는 요괴들이 성 위를 빙글빙글 돌며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중에는 한 손에 번개 지팡이를 든 뇌신도 보였다.
피와, 비명, 그리고 괴성이 난무하는 현장이다.
아무리 바보여도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를 수는 없었다.
“전쟁…….”
황준우의 짧은 읊조림에, 앞서 달려가던 우타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는 적에게 침략당했다.”
황폐하고 갈라진 땅을 한참이나 지나, 드디어 황준우와 우타의 눈에 검은 성이 보였다.
엄청난 공세를 겪고 있었지만, 성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소머리 요괴들의 저력이 만만치 않은지 방어벽은 아직 굳건했다. 다만 검은 성벽보다도 더 검게 느껴지는, 새카만 개미 떼 같은 병력이 아직도 끝을 모르고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터였다.
“저곳이 우리 성. 궁은 안쪽에 있다.”
“아, 나도 도울게.”
잘은 모르지만 소머리 요괴는 숙이 선택한 우군.
난관을 겪고 있다면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말했다.
“아니.”
하지만 우타의 고개가 단호히 내저어졌다.
“구원자는 궁으로 간다. 가서, 대왕을 만난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 우마(牛魔) 일족. 유계에서 가장 강하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우타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
“우타 역할, 구원자를 안전히 궁까지 데려오는 것. 인간은 약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지킨다. 다시 먼저 간다. 따라와라.”
그 말과 함께, 높게 솟은 뿔을 정면으로 세운 우타의 기세가 변했다.
‘이거…….’
거칠고 난폭하다 못해 미쳐 날뛸 듯한 기세다.
‘서연이 정도가 아닌데?’
황준우가 처음 느꼈던 기운은 그야말로 자신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던 듯했다. 이게 진짜 우타의 모습이다.
‘강해. 여동빈에 못지않을 만큼.’
그 느낌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듯, 검던 우타의 눈동자가 살짝 붉게 변했다.
다리가 바닥을 구를 때마다 커다란 울림이 주변으로 울려 퍼진다.
“뒤처지지 마라. 구원자.”
거친 콧김을 내뿜은 우타가 그 말과 함께 앞으로 쏘아진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궁수가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은 듯, 우타의 신형이 급작스럽게 쏘아지며 적진 한가운데를 향했다.
폭음과 함께 검은 개미 떼처럼 뭉쳐 있던 적 병력 진영의 일부가 담벼락 무너지듯 우르르 쓰러진다.
그 중심, 거친 외침을 토한 우타가 뒤를 바라보며 붉은 눈을 빛냈다.
시선에는 황준우를 재촉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우타는 황준우를 마치 가녀린 여인처럼 보고 있는 듯했다.
‘딱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데.’
물론 보호받고 지나가는 것도 편하지만, 황준우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타가 가진 인식을 다소 깨줄 필요가 있었다.
“수왕.”
우우우웅-!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수왕이 격한 울음을 토했다.
“그래, 저 친구한테 우리가 온실 속 아가씨가 아니란 걸 보여주자고.”
황준우의 신형이 앞으로 나아간다.
뛰쳐나오는 요괴들을 단숨에 짓뭉개고, 부수며 길을 뚫고 있던 우타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한 번 더, 크게 뚫는다!”
“그건 내가 하지.”
“안 된다. 인간……!”
말리려던 우타의 붉은 눈동자에 놀란 감정이 어렸다.
수왕검을 쥔 황준우의 신형이 이미 그를 넘어 지나가고 있다.
“바보 같은……!”
놀란 우타의 외침이 또 한 번 이어진 순간이었다.
황준우의 주변으로 황금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수만 개의 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검에 맞닿은 요괴와 악령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 사라진다.
아차 했을 때는 어느덧 황준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있었다.
‘뇌신……!’
그 위치가, 지팡이를 든 채 성을 요격하고 있는 새를 닮은 뇌신임을 확인한 우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뇌신은 선천적으로 강력한 힘을 타고난 무시무시한 요괴다.
특히 그들이 부리는 번개는 직격으로 맞는다면 튼튼한 우마족,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우타라고 하여도 견뎌내기 쉽지 않다.
‘위험……!’
새 머리를 한 뇌신이 황준우를 발견하고는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끝자락에 모이며 번쩍이는 새하얀 불빛이 단숨에라도 황준우를 뒤덮을 것 같은 때였다.
언제 날아갔는지 모를 수왕검이 뇌신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죽은 뇌신은 물론, 지상에서 황준우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우타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였다.
“자…….”
하늘에 올라, 뇌신의 목을 꿰뚫은 검을 뽑은 황준우의 눈이 전장을 넓게 훑었다.
정말 끝도 없어 보여, 황준우로서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천하의 모든 인간을 모아놔야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추측할 정도였다.
‘유계와 금오도는 서로 길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니.’
죽은 자들뿐이 아니라 요괴까지 한데 모여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하나씩 베서는 끝도 없어.’
황준우는 신격을 얻으며 자신이 품게 된 권능을 떠올렸다.
‘신속(神速), 파괴.’
황준우가 그토록 갈망했던 속도.
그리고 부딪치는 모든 것을 부수는 파괴.
나쁘지 않다.
적어도 무인이로서는 제일로 뽑아도 될 만한 권능이다.
하나 이와 같은 대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최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 하나 더 있지.’
이는 본래 황준우가 아닌 숙의 권능.
하나 황석후로부터 전수받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어디까지 먹히려나.”
모두의 무릎을 꿇릴까.
아니면…….
잠시 고민하던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언령이 나 자신한테도 통용되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 고개가 내저어졌다.
언령은 신의 지시다.
같은 신격을 얻은 황준우에게는 완전히 유효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민하던 찰나 수왕검이 울음을 터트렸다.
“너를? 하지만 네 속에도…….”
질문을 이어가던 황준우의 눈에 수왕검 속에 잠든 반고의 영혼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반고는 태초에 존재하였던 거신. 모든 것을 포용하였던 대지의 속성을 띠고 있다.
‘과연…… 그렇단 거지.’
반고의 영혼이 수왕검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바탕삼아 힘의 증폭을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슴속 한편에는 잠자고 있던 늠군의 관이 울렸다.
황준우가 생각하였던 언령의 힘에 또 한 번 증폭이 가해졌다.
그 엄청난 반동에 수왕검의 검신이 파르르 떨려올 정도였다.
‘이거 반고의 혼을 품지 않았다면 부서졌겠는데.’
엄청난 힘이 황준우를 통해, 수왕검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될까, 십만……?’
당연히 넘겠지.
그렇게 생각한 황준우가 수왕검을 놓고는 뒤로 물러나며 읊조렸다.
“백만수왕검(百萬獸王劍).”
쿠구궁-!
언령에 따라, 하늘이 검은 검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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