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8화
제 318화
기운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백만 자루의 수왕검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검에 황준우의 정신이 연결되었다.
이 자리에는 그야말로 백만의 황준우가 서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셈.
신격을 얻은 황준우의 정신마저 아찔할 정도의 규모다.
“가자.”
그 위용을 만들어낸 직후, 작게 읊조린 황준우가 검게만 보이는 적진 사이로 맹수처럼 뛰어들었다.
“우선 처음에는 화려하게.”
따르는 백만의 수왕검 중 하나를 집어 휘두르자 초승달 모형의 강기가 주변을 갈랐다.
콰가각-!
악령과 요괴 구분할 것 없이 순식간에 두 토막 나 쏟아진다.
그것으로 시작이었다.
황준우가 앞장서자, 그 뒤를 따라 백만의 검세(劍勢)가 마치 폭풍처럼 움직이며 그의 주변을 뒤따르며 전장에 거대한 상흔을 남긴다.
카가가각-!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사라지는 악령들과 요괴 사이로 끝내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 후퇴! 후퇴하라!”
“키에에엑-!”
고성과, 괴성이 어우러지며 대지를 물들이던 검은 파도가 순식간에 물러나기 시작했다.
높디높은 흑색 성벽 앞을 가득 메우던 군세는 더 이상 없다.
결국 전장이었던 시체가 널린 땅 위에 홀로 남은 우타는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 승리의 포효, 아니 울음소리를 흘렸다.
“모, 모오……!”
뒤를 따라 성벽 위에서도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어찌 됐든, 승전이었다.
“어때? 이래도 인간이 약해?”
다시 하나로 돌아온 수왕검을 허리춤에 꽂고는 지상으로 내려선 황준우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우타를 향해 말했다.
“구원자. 인간 아니다. 신이다.”
다소 심통 난 표정의 우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인간이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강할 수 없다.”
“왜 말이 안 돼. 네 눈앞에 있는데.”
“……대왕보다 강한 인간, 처음 본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저은 우타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성벽을 향했다.
어찌 됐든 이제는 굳이 길을 뚫을 필요도 없이 정문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발걸음이 조금 처져 있었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무언가 허탈하다. 이런 기분, 우타 처음 느낀다.”
“뭔가 미안한데…….”
황준우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냥 너무 자신을 약하게 보는 것 같아 실력 행사를 한번 했을 뿐인데 우타의 기가 너무 죽자 기분이 이상해진 탓이다.
“그럴 필요 없다. 강한 구원자, 좋다. 그냥 우타가 조금 더 강했었으면, 그런 생각 할 뿐이다.”
우타가 그런 황준우를 향해 다소 억지로 지은 것이 분명한 웃음을 보이고는 팔을 들어 황준우의 어깨를 감쌌다.
“어쨌든 고맙다. 우타가 너무 인간 얕봤다. 구원자 덕에 우리 일족, 덜 죽었다. 우는 우마도 몇 없다.”
생각 외의 영웅이 복귀하는 모습을 보는 소머리 요괴, 우마 일족의 표정이 환하다.
며칠 밤낮 동안 이어질 공성을 각오했는데 그들 덕에 손쉽게 적을 물리쳤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타, 그리고 구원자다! 성문을 연다!”
일반 우마 일족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우마가 소리쳤다.
끄그극-!
동시에 굳건히 닫혀 있던 바위 성문이 굉음을 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걸 들어 올리고 내린다고?”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과는 벗어난 성문의 모습에 황준우의 입가로 헛웃음이 감돌았다.
돌로 만들어진 성문이라니, 애초에 상상도 못 했던 게 당연했다.
“우마 일족, 힘 좋다. 그리고 잘 만든다.”
다소 풀이 죽어 있던 우타가 가슴을 넓게 펴며 말했다.
어찌 됐든 눈앞의 황준우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라도 는 게 흐뭇한 듯했다.
이내 성문이 내려와 도개교가 되어 도랑과 성 사이의 길을 이었다.
“먼저 들어가라.”
“그러지, 뭐.”
황준우가 앞장서고, 우타가 뒤를 따른다. 황준우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것은 우마 일족의 예의였다. 우마 일족은 결코 자신보다 약한 자, 낮은 자를 앞에 세우지 않는다.
우타가 자신보다 황준우를 강하고, 높다고 인정한 일인 것이다.
“구원자다!”
“강한 구원자!”
“덕분에 살았다!”
황준우가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소 울음소리와 함께 다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모습만 다르지 인간과 다를 바 없구나.’
그들의 행동과 표정에 더욱더 그런 감정을 느낀 황준우가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었다.
어찌 됐든 개선장군이 된 셈 아닌가?
기분을 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런 황준우 앞으로, 일전에 목소리를 높였던 일반 우마 일족의 두 배는 커 보이는 존재가 나섰다.
‘진짜 크네.’
새삼 바로 앞에서 그를 본 황준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성벽 위에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우마 일족도 인간과 비교하자면 머리 두 개는 더 큰 편이니, 그 두 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벽이 아닌데도, 마치 벽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털도 일반 우마 일족에 비해 무성하게 자라난 데다, 뿔은 길지는 않으나 더 두텁고, 표정 역시 딱딱한 것이 고집스러워 보여 그런 감정은 더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난 우적이다. 구원자, 이름이 뭔가?”
“아, 난 황준우다.”
그러고 보니 우타에게는 소개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황준우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황준우! 구원자! 그리고 우리의 영웅!”
거칠게 외친 그가 손을 번쩍 들자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우마 일족이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영웅!”
“영웅이다!”
“영웅을 궁으로 모신다!”
또다시 우적이 선창을 내뱉었다.
“모신다!”
“영웅을 모신다!”
후창이 있은 후.
“어……?”
당황하는 황준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우적이 황준우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앉힌다.
“어어……!?”
“가자!”
우적이 외치며 등을 돌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우마 일족이 길을 넓게 열었다.
제일 앞, 선봉 자리는 모인 우마 일족 중 가장 강하고 높은 자의 자리다.
자연스레 우적이 최전방에 섰다.
그 뒤를 따르는 이는 우타다.
우르르-!
우적이 앞장서고, 우타가 뒤를 따르자, 그 뒤로 또 다른 우마 일족이 한참을 꼬리 물고 쫓는다.
“오랜 세월, 내 어깨 위에 오른 인간, 네가 처음이다.”
“그, 그래?”
“죽은 자, 요괴 중에서도 네가 처음이다.”
“고, 고맙네.”
선의로 한 일이기에 거절하지 못한 채, 조금은 불편한 자세로 우적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황준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마 일족, 강한 자를 좋아한다.”
“그런 것 같네.”
실제로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뒤를 따르고 있는 다른 우마 일족들의 선망과 존경의 시선이 가득 보였다. 그들이 보이는 호의는 순수하게 강함에 대한 찬사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 왔다.”
우적의 발걸음이 워낙 큰 탓일까?
그의 어깨에 앉아 얼마 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여기가…….”
“대왕의 궁이다.”
소의 뿔을 양각한 모양을 양옆에 달아 놓은 화려한 장식물 같은 궁궐이다.
그 앞에서, 자신의 어깨에 있던 황준우를 천천히 내려놓은 우적이 말했다.
“앞장서라.”
“내가?”
“그래. 네가. 유계와 금오도를 통틀어 대왕 외로는 최초다.”
“뭐, 그러지.”
우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앞에서 궁을 향해 들어간다.
성문만큼이나 견고해 보이는 궁의 문 앞에 선 황준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열면 돼?”
“강자는 자격이 있다.”
우적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뭐.”
황준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대한 궁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열린 내부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조용한 풍경.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층을 오를 수 있는 계단과, 곳곳에 보이는 방문이 전부다.
궁이라고 부르기에는 화려한 장식도, 어떠한 포장도 없기에 묘하게 서늘해 보이는 광경이기도 했다.
‘유계의 특성인가?’
아니면 우마 일족의 특성일까?
의문을 가득 담은 황준우가 궁궐로 들어설 때였다.
터벅, 터벅.
위층에서 다소 힘없는 걸음걸이와 함께 검은 장포를 늘어트리고 있는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인간…… 은 아니고.’
다소 붉은 빛이 감도는 적갈색 긴 머리에, 언뜻 보면 인간으로 착각할 법한 생김새를 가진 그녀의 머리 위로는 우마 일족의 상징이 분명한 뿔이 솟아 있었다.
그 크기가 워낙 작아 긴 머리 위로 살짝 솟아오른 탓에 처음에는 몰랐을 뿐이다.
“하아…… 드디어 온 건가. 구원자.”
그런 여인이, 다소 나른한 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황준우가 잘 보이는 위치의 계단에 주저앉은 그녀가 긴 장포를 두른 팔로 턱을 받치고는 지긋한 눈으로 아래를 바라본다.
“그쪽…….”
누구냐는 황준우의 질문이 채 끝을 맺기도 전이었다.
“대왕을 뵙습니다!”
황준우 바로 뒤편에 있던 우적이 먼저 외치며 고개를 숙인다.
“대력대왕(大力大王)을 뵙습니다!”
우타를 비롯한, 뒤를 따라왔던 모든 우마 일족이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휑하게 비어 있는 궁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거대한 함성.
다소 귀가 아프다고 느낄 수도 있는 그 음성 앞에서도 나른한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은 여인이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다 자리로 돌아가 봐. 영웅을 위한 행차라면 충분하잖아.”
“알겠습니다!”
“대왕의 명을 따릅니다!”
이번에도 우적이 소리치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우마 일족이 화답했다.
돌아서는 길, 우적이 궁문을 닫고 이제 다시금 조용한 적막이 내려앉은 곳에는 황준우와 여인, 우마 일족의 수장 대력대왕만이 남았다.
다소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서 어색한 표정을 지은 황준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우마 일족의 모습을 보고 생각은 했지만…… 당신이 정말 대력왕……?
“그래. 나 말고 누가 있을까.”
“그 제천대성의 대형이자 마왕 중의 마왕?”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을 크게 벌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꼴 보기 싫은 원숭이 이야기는 빼고 하자. 어쨌든 맞아. 그 우마왕.”
계단 난간에 나른한 자세로 몸을 기댄 그녀가 묘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뭐해. 어서 안 올라오고. 동료들 안 만날 거야?”
“아…….”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계단을 향할 때였다.
“신이나 되었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인간인 척하려고 해.”
여전히 나른한 우마왕의 목소리가 궁내부로 울려 퍼진다.
자연스레 몸을 굳힌 그를 향해 여유롭게 기다란 손가락을 내뻗은 우마왕이 손짓했다.
“날아서 와.”
잠시 그런 우마왕을 묵묵히 바라본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미안하지만, 인간인 척이 아니라 정말 아직은 인간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허공으로 날아오른 황준우가 단숨에 우마왕 앞에 선다.
“그런 주제에 날아오는 건 무슨 심보일까?”
“생각해보니까, 이미 예전부터 허공답보 정도는 했더라고.”
“큭, 재밌네.”
그 말과 함께 계단 난간에 더욱 힘겹게 몸을 기댄 우마왕이 손을 내민다.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
길고 새하얀 그 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물었다.
“업어줘.”
옅은 웃음을 지은 우마왕이 태연하게 말했다.
=========================================================================================